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요나라는 고조선 옛 땅서 유래, 8조범금 전통도 지켜”

한민족에겐 ‘오랑캐의 왕’으로 각인돼 있는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872?~926 )는 요나라의 1대 황제다. 10년(916~926) 재위하면서 거란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그는 마치 중국 변방 왕조의 왕 같다. 그런데 그가 이끈 민족이 한민족과 뿌리를 공유한다면 어떻게 되나. 사서는 요가 고조선을 이었다는 기록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그는 한민족 북방 역사에서 팽개쳐져 왔다. 사진<1>은 네이멍구(內蒙古) 바린좌기(巴林左旗)에 있는 야율아보기 묘역. <2>는 묘의 안내석. <3>은 요가 고조선 옛땅에서 일어나 법통을 이었다고 기록한 요사의 기록(붉은선 안). 우실하 항공대 교수 제공
①고조선과 요나라
고조선은 BC 2000년쯤~BC 103년까지 존재한 한반도의 뿌리 국가라는 게 한민족의 지식이다. 고조선 건국 신화인 단군 신화는 한민족의 얘기였다. 고조선에서 부여와 고구려가 나왔다고 우린 믿는다. 과연 그럴까. 중국의 사서(史書)들은 이런 믿음을 허문다. 먼지 허옇게 뒤집어쓴 역사책엔 고조선은 오랑캐인 거란이 만든 요(遼·916~1125)로 이어졌다고 쓰여 있다. 고조선이 오랑캐 나라로 이어졌다면 한민족은 뭐란 말인가. 한민족의 과거는 어떻게 된 걸까.

김운회의 新고대사: 단군을 넘어 고조선을 넘어


진나라(265∼419)의 정사 진서(晉書)에는 의아한 기록이 있다.
모용황(慕容<76A9>)은 모용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모용외가 건무(建武·후한 광무제 때 연호) 초에 군대를 이끌고 정벌 전쟁을 했다. 그 공이 크게 쌓여 조선공(朝鮮公)에 봉해졌으며 이를 모용황이 계승하였다. [慕容<76A9>字元眞, <5EC6>第三子也. …建武初, 拜爲冠軍將軍、左賢王, 封望平侯, 率衆征討, 累有功. 太寧末, 拜平北將軍, 進封朝鮮公. <5EC6>卒, 嗣位(晉書 卷 109)]

우리가 대표적 오랑캐로 알고 있는 동호(東胡·후일의 남부의 거란계, 북부의 몽골계를 형성)의 선비 계열인 모용외와 모용황이 조선공(조선왕)에 봉해졌다니(당시 조선은 오늘날 요동·요서다). 조선은 한민족의 단어 아닌가.

역시 오랑캐인 거란족의 나라 요의 요사(遼史)에도 난감한 기록이 있다.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遼史 卷49)]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遼史 地理志2)]고 기록하고 있다. 8조범금은 고조선 법제로 8조법(八條法)이라고도 한다. 동경요양부는 현재의 랴오양(遼陽)시다. 선비족이 조선왕이고, 요가 고조선 법제를 갖고 있다는 것은 한반도가 조선이고 고조선을 이은 땅으로 배워온 사람들에겐 충격이다.

요가 고조선을 승통한 것은 영역을 살펴봐도 드러난다.
고조선사에서 핵심 쟁점의 하나는 패수(浿水) 문제이다. 즉 위략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을 하였는데 오랑캐의 옷을 입고 동으로 패수를 건넜다.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渡浿水(魏略)]라는 대목이 나온다. 위만이 건넌 패수가 어디인지에 따라 고조선의 ①대동강 중심설, ②요동 중심설 등으로 나뉜다.

대동강 중심설(패수=대동강)은 2000여 년 동안 대부분의 한국이나 한족(漢族)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였다. 여기엔 삼국사기수경주(水經注·중국 북위 때 저술된 중국의 하천지)의 주석자인 력도원(<9148>道元·북위 시대의 지리학자)의 견해가 큰 영향을 미쳤다. 력도원은 수경에 나오는 패수는 낙랑현에서 흘러나오고라는 말을 중시하여 북위에 온 고구려 사신에게 낙랑이 평양성이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기록을 남기면서 패수는 대동강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틀렸다.

수경 원문에는 패수는 동으로 바다로 간다 ‘패수는 낙랑의 루방현(鏤芳縣)에서 나온다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루방이 어딘지가 문제다. 사서들에서 루방은 현재의 베이징 인근으로 나타난다. 요사에 따르면, 루방은 요나라 때는 자몽현(紫蒙縣)이었다[紫蒙縣. 本漢鏤芳縣地. [(遼史 卷 38 地理志2 東京道)]고 나온다.

청의 대표적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의 영평이주기(營平二州記)에 따르면, 자몽현은 백랑과 창려에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秦漢之間 東胡邑紫蒙之野 唐書 地理志 平州有紫蒙, 白狼 昌黎 等城, 蓋平州之界 契丹之南界(顧炎武, 營平二州記)]. 즉 자몽현은 현재의 베이징 동부 해안지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패수가 동으로 바다로 들어간다는 설명에 딱 들어맞는다. 진서에는 모용외가… 자몽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호라 불렀다(邑于紫蒙之野, 號曰東胡)는 기록이 나온다(晉書 卷 108)). 이는 중요한 말이다. 이 말은 고조선의 중심지와 동호(요나라의 선민족)의 중심지가 일치하며 후대 요의 영역에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동호, 즉 고조선이 베이징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개는 고조선을 한반도 국가로 본다.

이젠 다른 문제, 즉 신화를 살펴보기 위해 시기를 더 거슬러서 1세기 후반의 진수의 삼국지를 보자.

흉노의 한 제후가 3년 전장에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다. 제후는 아이를 죽이려 했다. 아내는 낮에 길을 가다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니 번개가 입에 들어와 삼켜 임신했으니 이 아이는 필시 기이하여 크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후가 안 믿자 아내는 친정집에 아이를 보내 기르게 했다. 아이는 자라며 기골이 크고 용맹할 뿐 아니라 지략이 뛰어나 부락이 그를 경외하고 복종해 마침내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이 사람은 한국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동호의 후예인 선비족의 영웅 단석괴(檀石槐·텡스퀘이)다. 단석괴는 2세기 중엽 동북 초원의 부족을 통합해 현재의 허베이(河北)에서 둔황(敦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다스린 지배자였다. 후대의 칭기즈칸쯤 되는 인물이다. 그가 죽고 제국은 약화돼 225년 모용부(慕容部), 우문부(宇文部), 단부(段部) 등으로 분리됐다. 조선공 모용외는 모용부에 속한다. 단석괴의 후손인 모용외가 조선의 왕이므로 단석괴는 조선의 시조급 인물이란 얘기가 된다.
그런데 이 단석괴의 신화는 부여의 건국자 동명과 고구려의 건국자 고주몽의 설화와 아주 흡사하다.

진수의 삼국지에는 옛날 고리(<69C0>離) 왕의 시녀가 임신했다. 왕이 죽이려 하자 시녀가 닭 알 크기의 기운이 내려와 아이를 갖게 됐다고 했다. 시녀가 아이를 낳자 왕이 돼지우리와 마구간에 버렸는데도 죽지 않았다. 왕은 그 아이가 하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여 그 시녀에게 기르게 하였다. 그가 부여를 세워 다스렸다(三國志 魏書 扶餘傳)고 한다.

고구려의 건국 신화는 부여의 신화에 윤색을 가해 탄생되는데, 삼국사기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朱蒙)인데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 하백의 따님은 부여 왕에 의해 방안에 갇혔는데 햇빛이 그의 몸을 비추어 이를 피하였지만 그 빛은 계속 그녀를 따라다녔다. 곧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알을 하나 낳았는데…부여왕은 이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는데 먹지 않았고 돼지도 먹지 않았다. 길거리에 내다 버렸으나 마소가 피해 다녔고 들에 버리자 새들이 보호해 주었다. 마침내 왕은 알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녀는 이 알을 따뜻한 곳에 두었는데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자(字)를 주몽이라고 하였는데 그곳 풍속에 주몽이란 활의 명인이라는 뜻이었다(三國史記 高句麗本紀)라고 한다.

동호의 후예이자 실존 인물인 선비족 영웅 단석괴의 탄생 설화가 동명이나 고주몽의 출생 설화와 거의 일치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할까. 부여나 고구려가 동호·선비의 일파이거나, 단석괴의 출생 신화를 시조 신화로 차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시조 신화를 차용하지는 않으므로 결국 동호와 우리의 역사는 하나의 범주에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시기를 더 거슬러 올라 BC 3세기경 사마천의 사기에는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를 1000리 밖으로 격퇴하였다[秦開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90E4>千餘里(史記 卷110 匈奴列傳)]고 하는 기록이 있다.

한대의 정책 서적인 염철론(鹽鐵論)에선 이 사건이 연이 동호를 습격하여 바깥으로 1000리를 물러나게 했으며, 요동을 지나 동쪽으로 조선을 공략하였다(鹽鐵論 卷 8 伐攻篇)라고 표현된다. 같은 사건이 진수의 삼국지에서는 위략(魏略)을 인용해 고조선과 연나라의 갈등이 극심하여 결국 연나라의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서쪽 지방을 침공하여 2000여 리의 땅을 빼앗았으며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고조선과의 경계를 삼았다. 이로써 고조선이 매우 약화됐다고 한다[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裏,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三國志 卷30 魏書30)]. 즉 고조선은 동호다. 이 동호는 어떤 존재일까.

사기 흉노열전에는 동호는 오환(烏桓)의 선조이며 후에 선비(鮮卑)가 되었다.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하였다고 했다. 즉 흉노 동쪽의 광대한 부족을 통칭하는 단어다. 송호정(교원대)은 동호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BC 5~3세기에 요령성 서쪽 지역의 각 소수민족에 대한 범칭으로 사용되었다고 분석한다. 동호와 한민족을 일컫는 동이(東夷)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요나라로 돌아가 보자. 요나라는 전체 동이족의 맹주로서 동이 풍속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고려사에 고려가 요나라에 대해 조공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요 황제는 동이(東夷) 풍속을 따라 거듭 고시(<695B>矢)를 바치던 의식을 올린다니 정성이 갸륵하여 진실로 애대(愛戴)하는 바가 되었도다라고 감격한다. 고려가 동이족 전통을 고수하는 데 대한 요 황제의 찬사로, 요 역시 동이족이며 고려와 한 민족임을 의식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국인의 직계 조상으로 인식되는 예맥과 동호가 다르지 않다는 것은 1960년대 북한의 사가 이지린(李址麟)이 분석한 바 있다. 그는 동호(東胡)=맥(貊)으로 보고 맥(貊)과 예(濊)는 고대 조선 종족으로 예족은 BC 8~7세기 이전에 고조선을 세웠고, 맥족은 그보다 늦게 부여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이 부분은 오랫동안 남한의 사가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동호(東胡)와 동이(東夷)가 다르지 않고 동쪽 오랑캐라는 의미에 불과한 말을 민족명으로 세분해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까지 역사 연구의 혼란을 초래했다.

결론을 맺어보자. 진서 요사 당서 등의 기록들은 고조선이 동
호이며, 후일 요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고조선과 삼국의 구체적인 연관성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데 반해 요사만 요와 고조선의 연관성을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이런 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민족 선조는 좁은 한반도에서 머물지 않고 넓은 북방 벌판에서 역사를 썼다는 의미다. 후대가 잊고 있을 뿐이다.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