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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석 칼럼]근원 김용준이 던진 화두 ‘원숭이’… 해월 최시형이 던진 화두 ‘서양 추장’

매력적인 산문집 딱 한 권을 꼽으라면, 『근원 수필』(열화당)을 집어야 한다. 화가이자 미술사학자인 근원(近園) 김용준(1904~67)의 수필집인데, 구수하면서도 격이 높다. 어떤 이는 그의 글맛을 이렇게 표현했다. “뒷맛이 포근하여 몸은 도시에 있으되 마음은 아득한 산골 숲에 있는 듯 행복하다.” 요즘엔 참 기품 있게 제작한 양장본이 나왔지만, 초판이 나온 건 48년도다. 해방 직후 탄생한 출판사 1호 을유문화사가 그걸 펴냈다.

 근원은 사람됨 자체가 매력적인데, 아호(雅號)에 얽힌 일화만해도 그렇다. 그는 아호 부자로 유명하다. 200개의 호를 자랑했던 ‘아호 재벌’ 추사(秋史) 김정희엔 크게 못 미치지만, 매정(梅丁, 매화를 사랑하는 남자)등 10여개를 가졌다. 대표적인 게 근원. 한문으론 본래 近猿이라 썼다. “평생 원숭이처럼 남 흉내나 내다 죽을 인간”(31쪽)이란 겸손이지만, 실은 서구 미술·중국풍을 모방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다짐이리라. 속을 모르는 남들이 “점잖은 아호에 어찌 원숭이?”라며 극구 말렸다. 하는 수 없어 ‘近園’으로 고쳤다지만 의미는 여전한 셈일까?

 이후 세상이 온통 원숭이 흉내 즉 서양풍이다. 생활환경부터 그러해서 양복·양장·양말조차 서양 것임을 의식 못한다. 양말(洋襪)은 본래 서양버선이란 뜻이니까. 그런 건 곁가지이고, 심각한 건 사고방식이다. 서구 합리주의, 즉 철학자 데카르트의 낡은 패러다임에 내내 갇혀 산다. 이 참에 기막힌 어휘에 무릎을 쳤다. 서추(西酋)가 그것이다. 전택원의 신간 『마음의 이슬 하나』(바보새)는 서추란 말을 소개하며 ‘서양추장’으로 풀이했다. 놀랍게도 동학지도자 해월(海月) 최시형(1827~98)의 옛 신조어란다. 저자의 말을 들어보자.

 “해월은 서추란 말을 썼습니다. ‘인(仁)의 방패를 들고 예(禮)의 검을 들어 서추를 쳐내면 이런 장부가 없다.’면서…. 서추, 즉 서양추장이란 막상 서양엔 없습니다. 서추는 서구화된 우리 자화상입니다.”(460쪽 발췌) 서세동점 물결 속에 서구화는 일단 피할 수 없었다. 문제는 ‘서구보다 더 서구적인’ 지금의 한국사회다. 때문에 서추란 무슨 벼슬한 듯 서구적 가치의 효용을 믿는 우리 모습을 포착해낸 절묘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그게 맞다면, 원숭이 흉내에서 나아가 원숭이 추장임을 자임하는 셈일까?





 사실 20세기 이후 프란츠 파농이 ‘백인보다 더 얼굴 하얀 흑인’을 지적했지만 그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문제제기다. 전통·국수(國粹)로 역주행하자는 제안이 아니라 자기정체성을 묻는 진지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즘 서구 합리주의는 지식체계와 방법론에 똬리를 틀었다. 그래서 인문사회과학 자체가 서구중심주의를 확대재생산한다. 즉 학문하는 행위란 게 남의 다리나 긁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도 근원·수운이 있어 위안이다. 그들이 준 화두 ‘원숭이·서추’만 해도 어디란 말인가?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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