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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9] 쉬베이훙



▲1929년 1월 베이핑(北平) 예술전문학원 원장시절의 쉬베이훙(앞줄 왼쪽 셋째). 목수 출신 치바이스(앞줄 왼쪽 넷째)와 왕린(王臨·앞줄 왼쪽 둘째), 리커란(李可染·가운데 줄 왼쪽 둘째), 우쭤런(吳作人·뒷줄 왼쪽 여섯째), 둥시원(董希文·뒷줄 오른쪽 둘째) 등 후일의 대가들을 교수로 초빙했다. 김명호 제공

무명화가 쉬베이훙, 초상화 한 장으로 ‘21세 대학교수’



1959년 봄, 대만 중앙연구원 원장 후스(胡適)는 “대륙 시절, 볼 때마다 낯설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여인이 있었다”며 1945년 마지막 날, 중국 현대미술의 초석을 쌓은 쉬베이훙(徐悲鴻)과 28년의 결혼생활을 끝낸 장비웨이(蔣碧微)를 거론했다.



총통부 고문 주자화(朱家<9A4A>)가 “듣고 보니 맞는 말 같다”며 거들자 국방부장 위다웨이(兪大維)도 “그런 거 보면 장다오판(張道藩)도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마디했다. 차차 얘기하겠지만 장다오판과 장비웨이는 젊은 시절부터 2000여 통의 연애편지를 주고받은, 중국 연애사(戀愛史)에 남을 연인 사이였다.



세 사람은 6년 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난 중앙미술학원 설립자 쉬베이훙을 회상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쑨둬츠(孫多慈)와 랴오징원(廖靜文)을 비롯해 이름 석 자만 대면 중국 천지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여인들과 루쉰(魯迅), 캉유웨이(康有爲), 천싼리(陳三立), 장다첸(張大千), 왕궈웨이(王國維), 장제스(蔣介石), 타골, 천리푸(陳立夫), 치바이스(齊白石),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 각자의 전문 분야 앞에 큰 대(大) 자가 붙는 사람들의 이름이 막 튀어나왔다. 중국을 좀 안다는 사람들이 들어도 뭐가 뭔지 모를 얽히고설킨 인간사에 관한 것들이었다.





▲젊은 시절의 장비웨이. 쉬베이훙과 장다오판이 가장 좋아했던 사진이라고 전해진다.



1916년 가을, 상하이의 유대인 거부 하퉁(哈同)이 창힐(蒼<9821>)과 공자를 흠모한다며 창성명지(蒼聖明智)대학을 설립하고 창힐의 초상화를 공모했다. 일자무식이었던 부동산 벼락부자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교육사업”이라고 꼬드긴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덕에 무명의 청년화가 쉬베이훙은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창힐은 중국인들이 ‘한자의 창조자’라고 굳게 믿는 전설적 인물이었다. 불어와 독일어를 공부하며 일자리를 찾아 헤매던 쉬베이훙은 단숨에 한 폭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어렸을 때부터 읽은 사서에 의하면 창힐은 눈알이 4개였다. 명지대학 교수들은 쉬베이훙이 순전히 먹고살기 위해 그린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영낙없이 눈이 4개 달린 하퉁이었다. 신필이라며 입에 침들을 튀겼다. 하퉁은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이런 분이 미술을 가르쳐야 애들이 제대로 배운다”며 당장 모셔 오라고 자동차를 보냈다. 21세의 시골 청년이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명지대학에는 당대의 대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들 중 청말 유신파의 영수였던 캉유웨이와 고전학자 장메이성(蔣梅笙)이 쉬베이훙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캉유웨이는 대수장가였다. 쉬만 오면 글씨도 같이 쓰고 온갖 고서화를 꺼내 보여 줬다. 스승의 예를 취하면 “네가 나보다 낫다. 친구처럼 지내자”며 절대 못하게 했다. 나이는 캉유웨이가 38세 더 많았다. 장메이성은 쉬베이훙만 다녀가면 “인품, 자질 할 것 없이 나무랄 데가 없다. 딸이 하나만 더 있으면 원이 없겠다”며 부인에게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장녀는 이미 출가했고 작은딸 장비웨이도 수저우(蘇州)의 명문 차(査)씨 집안 아들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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