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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1128일의 기억]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8) 워싱턴서 전우들과의 해후



환영 파티에 펜타곤 총출동 … 워싱턴은 왜 날 극진 환대할까

1953년 5월 미국을 방문했던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정면으로 걸어오는 사람 중 오른쪽)이 미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해 생도들의 영접을 받고 있다. 미 육군참모총장 로튼 콜린스의 초대를 받아 방미 길에 오른 백 총장은 첫 도착지인 워싱턴에서 옛 전우를 모두 재회하는 등 미군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백선엽 장군 제공]


처음 도착한 날의 행사는 다른 게 없었다. 나는 공항을 떠나 워싱턴 시내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나를 수행하는 사람은 하우스만 소령과 남성인 대위였다. 그들은 나와 한 호텔에서 묵었다. 내가 미국에서 모든 일정을 소화하는 데 일종의 안내원 역할을 맡은 사람이 하우스만 소령이었다.

 그날 저녁에는 주한 미 대사관에서 나와 함께 전선을 누비고 다녔던 미군 지휘관들을 초청했다.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의 주최로 간단한 연회(宴會)를 연 것이다. 그날 나는 전선에서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했던 미군 지휘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파티는 이튿날에도 열렸다. 이번에는 나를 미국으로 초대한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이 주최한 연회였다. 역시 많은 미군 지휘관이 참석했다. 펜타곤 국방부의 일반 고위관리들도 모두 나왔다.

 나는 사실 그때까지 미국이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인 나를 미국에 초대한 배경을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례(定例)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을 공식 방문한 대한민국 국군으로는 내가 최고위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상례적인 방문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그래도 미국이 어떤 특정한 의도를 지니고 나를 미국 방문길에 오르도록 했다고 볼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의전적인 차원에서 미국은 당시로서는 별로 내세울 게 없었던 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을 극진히 환대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그 점이 참 궁금하기도 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결판 짓는 데가 전선(戰線)이다. 그곳에서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 채 다가오는 적과 싸우는 동료에게는 특별한 감정이 남는다. 더구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무기를 들고 찾아와 공동의 적에 맞서 싸웠던 미군 전우(戰友)들에게는 깊은 감사의 마음이 앞섰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미군 지휘관들을 워싱턴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얼마 전에 함께 섰던 전선의 추억을 다시 떠올리면서 우리는 많은 감회에 젖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았으나 그런 분위기에 취했다. 미군 지휘관들 또한 나와의 재회를 즐거워하면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전체적으로 보면 미군 지휘관들은 전투를 수행하면서 감정 표현이 별로 없다. 작은 감정 표현에 서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기복이 없는 편이다. 그러나 일단 한 조직으로 묶인 경우에는 계급과 직무 등 만들어진 질서에 충실히 따른다. 그런 면에서는 매우 충직(忠直)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았다.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1896~1987)

 내가 6·25 전쟁 초반에 1사단을 이끌고 낙동강 교두보에서 다부동 전투를 치른 다음 북진(北進)을 준비하고 있을 때 국군 1사단으로 와서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한 장교가 헤이즐레트 중령이었다. 그는 북진 길에 여러 가지 군사 경험을 내게 전했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자력(資歷)이 나보다는 뛰어나고, 나이 또한 나보다 많았으나 내 밑에서 수행해야 하는 직무에 매우 충실했다.

 그 또한 내가 미국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리셉션에 함께 참석해 나와 반가운 해후를 했다. 그는 내가 1950년 10월 말 평양 이북의 운산까지 진출했다 이듬해 1·4 후퇴로 경기 남부 지역까지 밀리는 고난의 길을 함께했던 전우이자 참모였다.

 그는 내가 워싱턴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훌륭한 ‘참모’ 역할을 했다. 내가 급히 미국 방문길에 오르면서 가지고 온 예복 바지가 형편없이 구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의 초청을 받아 공식적으로 미국을 방문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공식적인 여러 행사를 치러야 했는데, 마침 가지고 온 예복 바지들이 많이 구겨져 있었던 것이다.

 헤이즐레트는 이미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호텔 방까지 찾아왔다 내 바지가 많이 구겨져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내일 아침까지 다려 올 것”이라며 바지를 들고 나갔다. 나는 다른 방법을 강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는 결국 그 이튿날 아침까지 내 바지를 반듯하게 다려 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자신의 부인과 함께 내 바지를 다리기 위해 밤새 애를 썼다는 것이다.

 리셉션은 끝났지만 여러 미군 지휘관이 나와 함께 호텔의 내 방까지 왔다. 그들은 밤늦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이야기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가장 화제가 됐던 것은 아무래도 한국의 상황이었다. 휴전을 할 수 있을 것이냐, 아니면 계속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일 것이냐는 문제였다.

 미군들도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 취임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하루빨리 정전(停戰) 협정에 조인할 수밖에 없어 휴전이 현 상황에서는 대세(大勢)를 이룰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들은 밤 10시 넘어서까지 그런 대화를 즐겼다. 아주 진지한 분위기에서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다. 그들이 다 돌아갔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 사이의 알력, 그 때문에 점차 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는 휴전 관련 사안들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밤 11시쯤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시간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밤중에 누가 찾아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이야기를 마치고 떠난 뒤 시간이 제법 흘렀던 때였다. 나는 다가가 방문을 열었다. 알레이 버크 제독이었다.

 내가 강릉 1군단장으로 있을 때 동해안의 제7함대 소속 5순양함대를 이끌고 나를 지원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전선에서의 임무를 마친 뒤 본토로 돌아와 해군 전략국장을 맡고 있었다. 그가 나를 다시 만나 매우 즐겁다는 표정으로 방문을 들어섰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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