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중앙시평] 묵은 둥치에서 튼실한 새싹이 움튼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밀레니엄(Millennium)이라는 낯선 단어를 유행시키며 요란스럽게 출발한 21세기의 첫 10년은 기대와는 달리 무척이나 우울한 시기였다. 알카에다의 9·11 테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지구촌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웠고, 서해교전에 이은 천안함 테러와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끊임없는 도발은 한반도를 다시금 무력충돌의 긴장상태로 몰아넣었다. 한마디로 충격과 불안의 10년이었다.



 그 충격과 불안을 그대로 안은 채 21세기 두 번째 10년의 첫 새해가 밝았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또 한 해의 삶을 다부지게 꿈꾸곤 하지만, 신년의 다짐이란 것이 새로움에 대한 지나친 기대나 뜬금없는 환상에 이끌리기 일쑤다 보니, 세밑에 이르면 어김없이 후회와 아쉬움의 긴 한숨을 내쉬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새해 첫 아침을 ‘새것’ 대신 ‘옛것’을 찾는 것으로 시작해본다.



 요즘에는 많은 가정이 김치를 시장에서 사다 먹지만, 내가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품앗이로 손수 김장을 담갔다. 한겨울 밤, 얼어붙을 듯한 추위에도 어머니는 마당으로 나가 김장독에서 차디찬 김치 국물을 떠내 밤참 국수를 말아주시곤 했다.



 김장철이 지나면 곧바로 메주를 쑤어 말렸다. 짚으로 묶은 메주덩어리를 겨우내 처마 밑에 걸어두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발달한 저장기술 덕분에 겨울에도 딸기를 맛보고 한여름 식탁에도 동치미가 올라오는 시절이지만, 먹을거리가 풍성해진 만큼 식생활은 퍽이나 반(反)자연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러다가는 ‘제철 과일’의 맛도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언젠가 송나라 때의 『세설신어(世說新語)』를 뒤적이다 고시(古詩) 한 구절에 그만 정신이 아득해진 적이 있다. “만나는 것마다 옛것이 아니니, 어찌 빨리 늙지 않을 수 있으랴(所遇無故物 焉得不速老).” 단지 세월의 빠름을 한탄하는 뜻만은 아닌 듯하다. 옛것이 사람을 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새것이 사람을 늙게 만든다는 뜻이라면, 이런 역설이 없겠다. 그러나 나는 단 열 자에 불과한 이 짧은 글귀야말로 옛 사람의 지혜가 묵직이 담긴 통찰이라고 믿어 가슴 깊이 품어 두기로 하고 있다.



 스웨덴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히말라야의 작은 마을 라다크에서 16년 동안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라는 이채로운 책을 펴냈다. ‘ancient’와 ‘future’는 합쳐질 수 없는 단어다. 그러나 노르베리 호지는 이 둘을 한데 묶어, 서로 멀리 떨어진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장(場)으로 엮어내는 초(超)시간적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라다크 사람들은 ‘지난번 봤을 때보다 많이 늙었네요’라는 말을 마치 겨울에서 봄으로의 변화를 말하듯 스스럼없이 한다. 그들은 나이 먹는 일을 겁내지 않는다. 삶의 각 단계는 그 나름대로 좋은 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다 여성적이고 영성적(靈性的)인 가치를 추구하는 새로운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은 실상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온 가치 - 자연 속에서의 우리의 위치, 우리들 서로의, 우리와 지구 사이의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해묵은 나무둥치에서 튼실한 새싹이 움트는 법이다. 보수의 뿌리에서 진보의 새 잎이 돋아나고, 그 잎이 떨어져 다시 뿌리의 자양분이 된다. 기껏해야 시대의 한 단면을 찢어 서로 차지하려는 보혁(保革)의 싸움은, 가없는 역사의 지평에서 바라보면 바다 위의 한낱 포말(泡沫)처럼 덧없는 것일지 모른다. 사회주의 중국이 자본과 시장의 힘으로 굴기(<5D1B>起)하려는 시대가 아닌가? 새로운 것을 거부하지 않는 ‘넉넉한 보수’는 듬직하고, 연륜(年輪)의 무게에 경의를 표할 줄 아는 ‘따뜻한 진보’는 감동적이다. 보혁은 서로를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파트너로 만나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세계를 함께 열어가야 한다.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일로만 세월을 보낸다.”(사도행전 17) 서구문명의 뿌리인 헬레니즘의 본산지 아테네를 향한 헤브라이즘의 탄식이다. 21세기에도 우리는 선인(先人)들로부터 퍼내고 퍼내도 마르지 않는 지혜의 샘물을 새롭게 길어 올린다. 어머니가 손수 담근 김장김치, 집메주로 진득이 달여낸 간장, 그 고향 같은 손맛이 다른 어떤 새 맛보다 더 그리운 새해 첫 달이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