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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4) 이승만의 손가락



이승만의 손에는 망국의 상처가 담긴 비밀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경무대를 찾아온 진명여고 학생들로부터 선물을 건네 받은 뒤 촬영한 모습이다. 일제 때 고문으로 화상을 입었다는 이 대통령의 손이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이승만 대통령의 개인적인 버릇을 소개한 일이 있다. 뭔가 불만스러울 때 두 손을 오므려 입에 갖다 댄 뒤 입김을 훅훅 불어대는 동작 말이다. 나는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자신의 뜻대로 일이 펼쳐지지 않을 경우 대통령은 늘 그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 그런 동작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최근에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회고록을 다시 꺼내 읽으면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대통령에게서 직접 설명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초기 독립운동을 펼쳐갈 무렵 일본 관헌(官憲)에게 붙잡혀 고초(苦楚)를 겪은 일이 있다. 짐작하건대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병합된 직후의 일일 것이다. 대통령은 그 때 역시 일본에 의해 약 2년 동안 구금된 적이 있었다.

 마크 클라크 장군이 아는 바로는 이 대통령이 당시 일본 관헌에게 붙들려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손가락을 불로 지지는 고문을 당해 결국 손에 화상(火傷)을 입었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안을 두고 보고를 하기 위해 경무대를 찾을 때 성에 차지 않는 일이 생기면 두 손을 오므리고 입김을 불어대던 이 대통령의 동작은 그런 배경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육신(肉身)에 새겨진 깊은 상흔(傷痕)을 매만지는 버릇. 그 상처를 어루만지는 것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정신적인 긴장감을 높이려는 대통령의 무의식이 작용한 결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클라크 장군 또한 휴전협정 막바지 타결을 앞두고 있던 때인 53년 4~5월께 경무대를 늘 방문하면서 미국의 일방적인 휴전 타결 움직임에 반대하는 이 대통령과 치열한 신경전을 펼치면서 대통령의 그런 모습을 자주 봤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경무대와 백악관은 마크 클라크 도쿄 유엔군 총사령관을 매개(媒介)로 삼아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신경전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휴전을 기정사실화했고, 포로 처리 문제 등에서 공산 측의 제안을 때로는 상당 폭으로 받아들이는 결정까지 내리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심기는 매우 불편해지고 있었다. 개인적인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공산 북한을 그대로 둔 채 한반도의 허리를 갈라 한편에 그냥 물러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휴전회담에 참석한 공산주의자들의 면모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자세히 소개한 바 있다. 그들은 집요하고 그악스러운 협상가들이었다. 그들이 펼치는 모든 제안과 발언에는 상당한 계략(計略)이 숨어 있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따라서 그들과의 협상은 몇 가지 고비를 넘어야 제 궤도에 오르는 게 보통이었다. 공산 측 회담 대표들은 당시 이런 제안을 해왔다. “반공 성향의 포로들을 제3국으로 송환하지 않고 한국 내에 남겨둬도 좋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의 액면(額面)만을 그대로 믿는다면 꽤 커다란 진전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의 말은 끝까지 들어보고 마지막까지 저울질해 봐야 진짜 의도를 짚어낼 수 있는 법이다.

 그런 그들의 제안 뒤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북한과 중국의 설득 대표단이 중립국 위원단과 함께 한국 내를 돌아다니며 활동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얼핏 보면 커다란 문제가 없을 듯했으나, 그들의 제안을 수용한다면 한국은 공산주의 국가들이 노리는 선전장으로 변할 수도 있었다. 저들이 침략한 한국 땅을 밟고 다니면서 선전활동을 하겠다는 의도였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이런 공산 측 제안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아주 곤욕을 치렀다. 대통령은 또 자신의 주먹 위로 입김을 훅훅 불면서 그런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클라크 장군은 “이 대통령이 어느 때보다도 불쾌한 기색을 띠며 ‘그놈의 빨갱이 간첩들을, 그놈의 빨갱이 파괴분자들을 우리의 후방 지역에 들어오게 하려느냐. 나는 그놈들을 한 발짝도 발붙일 수 없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적었다.

 이제 휴전협상은 미국이 이끄는 서방 측, 그리고 북한과 중국이 참여한 공산 측의 싸움에서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강한 휴전협정 타결 의지에 스스로 묶여 있던 워싱턴은 번번이 공산 측의 계략 섞인 제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미국이 돕고 있던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강한 투지만을 키우고 있었다. 유감이었던 것은, 이 대통령의 투지가 이제는 북한과 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워싱턴을 향해 뻗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과정에서 중간의 매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입장은 매우 궁색해지고 있었다. 그는 반공정신에 매우 투철한 미군이었다. 따라서 개인적인 성향으로 보면,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훌륭한 지지자였다. 그 스스로도 이 대통령을 “아시아의 위대한 지도자”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워싱턴의 뜻을 이 대통령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아주 여러 번 속을 썩이기도 했다. 군인으로서 그가 개인적으로 품은 생각은 이 대통령과 같았다. 한반도에서 일으킨 공산주의의 침략을 끝까지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는 점에 생각이 일치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 워싱턴의 정책 결정을 완수해야 하는 사령관이었다. 따라서 그가 53년 4월과 5월께 이 대통령 앞에 나타날 때는 ‘악역(惡役)’으로 등장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워싱턴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책적인 의지와 취향은 알고 있었을지 몰라도,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잘못 짚었을 것이다. 평생을 저항과 투쟁으로 살아온 노 대통령의 결기는 급기야 더욱 거세게 일어서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또 폭탄과 같은 메시지를 워싱턴에 던졌다. 워싱턴은 이 대통령이 던진 이 ‘한 방’으로 다시 깊은 충격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줄 위를 걷는 아슬아슬한 곡예(曲藝)처럼 보였다.

정리=유광종 기자
백선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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