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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로 변한 포격전 … 마오쩌둥, 짝수 날엔 포격 중단

1958년 겨울, 금문포전이 뜸해질 무렵 국방부에서 샤먼전선 해방군을 접견하는 국방부장 펑더화이(왼쪽 첫째). 김명호 제공
1958년 10월 13일 마오쩌둥은 국방부장 펑더화이가 샤먼 전선에 보내는 ‘국방부 명령’을 직접 기초했다. “오늘부터 포격을 다시 2주간 중지한다. 금문의 군민들이 식량과 군사장비 등 충분한 보급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병불염사(兵不厭詐)! 전쟁에서는 적을 속이는 것을 거리낄 필요가 없다고들 하지만 이건 절대 속임수가 아니다. 중국민족의 이익을 위해서다. 지금 대만과 대만해협에는 쓸데없이 빈둥대는 미국인들이 많다. 이들은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8>

장제스에게는 평화회담을 제의하고 미국을 질타했다. “합리적인 해결이 될 때까지 우리의 내전은 끝난 것이 아니다. 장이 대화를 거부하고 완고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포를 쏘고 안 쏘고는 우리의 자유다. 미국은 정전을 얘기하지만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미국과 공격을 주고받지 않았다. 정전이고 뭐고 할 일이 없다. 미국이 무슨 자격으로 이 문제에 끼어드는지 알 수가 없다.”

이어서 대만과 미국을 이간질시켰다. “대만 당국은 저들에게 위임장을 준 일이 없다. 장제스도 근본적으로 중·미회담을 바라지 않는다. 미국인들은 위대하고 선량하다. 평화를 바라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단 미국 정부 안에 덜레스처럼 인간사가 뭔지를 모르는 부류들이 섞여있다. 금문 포격은 중국의 내정이다. 외국은 간섭할 권리가 없다. 연합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펑더화이의 성명서를 무시했다. 중공 측에 정전회담 개최를 요구하고, 대만의 장제스에게는 금문도에서 철수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일주일 후, 4척의 미군 함정이 국민당 수송함을 호위하기 위해 금문 해역에 진입했다. 이때 미 국무장관 덜레스는 대만을 향하고 있었다. 마오는 금문 포격을 명령, 4척의 국민당 함정을 격침시켰다. 장제스가 미국 측에 금문 철수를 거절할 명분을 주기 위한 마오의 선물이었다.

금문도를 시찰 중인 장제스(왼쪽 셋째). 왼쪽 둘째는 후렌의 뒤를 이어 금문방위사령관에 부임한 류안치(劉安祺).
덜레스가 대만에 머무는 동안 샤먼포대는 연일 금문도에 포격을 가했다. 장제스는 “계속되는 포격을 봐라. 내가 살아있는 한 철군은 절대 안 된다”며 덜레스에게 목청을 높였다.

덜레스가 대만을 떠난 다음 날 마오는 “다시 대만동포에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기초했다. “국·공 양당 간에 얽힌 일들은 풀기가 수월하다. 앞으로 짝수 날들은 포격을 하지 말라고 샤먼전선에 명령했다. 홀수 날이라고 해서 꼭 포격을 하겠다는 말도 아니다. 매달 15일간 식량, 채소, 식용유, 연료, 무기를 충분히 보급 받아 장기간 금문도를 고수해라. 부족할 경우 허락만 한다면 우리 측에서 공급하겠다. 너희들이 단결해서 대외문제가 수월하게 풀리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동포들을 속이지 않는다.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희망이 충만한 시대에 살고 있다. 애국자에는 항상 출로가 있다. 너희에게 당장 미국과 결별하라고 권하지 않겠다.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대륙과 대만을 완전히 분리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에 함께 대처하자는 마오의 의중을 파악한 장제스는 국민당 선전공작자 회의를 소집했다. “금문도와 샤먼 간의 포격전은 중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내전의 연속이다. 침략이 아니다. 미국인들 만나면 쓸데없이 입 놀리지 말라”며 단단히 일렀다.

이듬해 3월부터는 대륙을 ‘중공정권’이라 부르고 스스로를 ‘중화민국’이라고 불렀다. ‘홍색중국’과 ‘자유중국’이라는 용어도 더 이상 공식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양측의 포격전은 유희로 변했다. 한 차례의 미국 대통령 선거와 1960년 6월, 아이젠하워가 대만을 방문했을 때를 빼고는 서로 빈 바다에 쏴댔다. 명절과 국경일에는 휴식을 취했다. 79년 1월 1일 중공과 미국 간에 국교가 수립되는 날까지 그랬다.

94년 11월 금문포대가 샤먼에 포격을 가했다. 적지 않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만 측에서는 즉각 “적의가 없는 오발 사건”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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