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지지자들과 싸우지 않고 어떻게 국가의 미래를 여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처음 타결된 게 2007년이다. 그해 온 나라는 들끓었다. 진보진영은 졸속·굴욕 협상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정민 칼럼

‘매국노’ ‘제2의 이완용’이란 조롱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과 협상 책임자들에 대한 화형식이 이어졌다.

화약고에 기름을 부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었다. 집권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의 당 의장을 지낸 김근태 전 의원, 법무장관을 지냈던 천정배 의원 등 지도부는 단식 농성을 벌였다. 노 대통령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했던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전국을 돌며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집권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건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었다.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으로 협상을 이끌었던 김현종 삼성전자 해외법무법인 사장이 지난해 말 협상의 막전막후를 엮어 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홍성사)란 책을 냈다. 김 사장은 “노 대통령의 애국애족 의지와 국익을 위한 뚜렷한 개방 철학이 있었기에 미국·유럽연합(EU)을 비롯한 45개 국가들과 FTA를 출범하고 타결시킬 수 있었다”고 적었다. 노 대통령의 발언도 소개했다.

“정치적 부담은 크지만 결딴 내고 갑시다! 쇠고기·스크린 쿼터·자동차 배출가스 기준, 이 세 가지 통상문제는 한시적인 것이지만 FTA는 지금 하지 않으면 놓칩니다. 대원군 시절의 병인양요·신미양요 등의 역사를 보면 결국 우리가 힘이 약해서 일본에 나라를 내줬는데, 식민지 전쟁과 같은 경제 전쟁이 이미 시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김현종) 본부장은 미국에 가서 ‘대통령이 결심하겠다. 그 방향으로 가겠다’고 전하기 바랍니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도 노 대통령은 “한·미 FTA가 안 돼도 내가 책임지는 거고, 돼도 내가 책임지는 거요. 본부장은 철저하게 장사꾼 논리로 협상하고 한·미동맹 관계나 정치적 요소들은 절대로 의식하지 마세요. 모든 정치적 책임은 내가 질 겁니다”라고 힘을 실어줬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고뇌는 컸다. 자신을 대통령으로 밀고 당선시켜준 지지세력들과 반대쪽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협상 과정을 지켜봤던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이러다 집토끼마저 놓친다는 당의 불만에 노 대통령은 미안해하고 괴로워했다”고 기억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 이정우 전 실장 등 반대파들을 청와대로 불러 “개방해서 성공할 수도 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 닫아놓고 성공한 나라는 어디에도 없지 않느냐”고 설득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최측근이던 이광재 강원지사가 기억하는 장면은 가슴 뭉클하다.

“청와대 본관에서 관저로 가다 보면 잔디밭에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세상에서 가장 복된 땅)’란 비석이 있어요. 노 대통령이 이 비석을 보곤 혼잣말처럼 그러더군요. ‘복된 땅은 무슨? 여기도 암투가 끊이지 않는 곳인데…’라고요. 그러면서 ‘지지자들과 싸우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어떻게 열겠나. 진보 대통령은 진보정책을 다 쓸 수 없고, 보수 대통령도 보수정책을 다 쓸 수 없어. 그 사람들(FTA 반대론자)도 대통령 돼보면 내 생각을 이해하게 되겠지’라고요.”

‘대통령 노무현’과 ‘정치인 노무현’ 사이의 갈등과 고뇌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당시 그는 ‘막판에 FTA 협상을 결렬시키고 반미 감정을 고조시켜 대선을 치르려 한다’는 보수진영의 음모론과 ‘개방론자들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는 진보진영의 협공에 시달렸다. 이런 공격을 받으면서도 한·미 FTA를 밀고 나간 건 국익을 지켜야 한다는 지도자의 양심 때문이었을 게다.

정치인이 눈앞의 이익이나 표를 외면하긴 쉽지 않다. 그래서 다수가, 지지자가 원하는 길로 간다. 그 길은 넓으며 동반자도 많다. 외롭지도, 위험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런 길에만 익숙해지면 쉽게 포퓰리즘에 빠진다. 무상급식·감세 문제 등 지난해 정치권을 달궜던 포퓰리즘 논쟁이 그런 예다. 포퓰리즘이 난무하고 ‘지지자들과 싸우지 않으려는’ 정치인이 많아진다면 나라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신묘년 새해가 밝았다. 우리 앞엔 한·미 FTA 국회 비준과 같은 민감한 이슈들이 산적해 있다. 내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예비주자 간 경쟁도 본격화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눈앞의 이익만 좇는다면 정치판은 포퓰리즘 경연장이 될게 뻔하다.

국가 경영을 책임지겠다고 나선 여야의 지도자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지지자들과 싸우지 않고는 국가의 미래를 열 수 없다’고.

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