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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미네르바의 부엉이’ 세밑에 날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위촉을 받아 1년 남짓 외국의 정기간행물을 심의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업자들이 수입하려는 간행물이 선정성·폭력성 등에서 국내 법규·풍속에 저촉되지 않는지 살피는 업무였다. 말이 외국이지 심의 대상의 99%가 일본에서 건너온 만화잡지였다. 일본 연수·도쿄특파원 시절 이미 적잖이 감상(?)을 해본 처지였는데도 새삼 충격을 받았다. 특히 동호인 잡지를 표방하며 무명 출판사들이 펴낸 만화들은 그야말로 선정성과 폭력성의 극치였다. 성인 남녀의 성행위는 이미 식상했는지 동성이나 가족·청소년 대상의 적나라한 성 묘사가 대세였고, 목이나 팔·다리가 잘리거나 내장이 드러나는 장면도 흔전만전이었다. 정기 회의를 마치면 동료 심의위원들과 “눈 씻으러 갑시다”며 근처 식당에 가서 한잔하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토양 덕분에 일본이 세계적인 만화·애니메이션 대국으로 우뚝 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이든 폭력이든 어떤 때는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스토리, 모든 이미지’가 일본 만화에는 담겨 있다. 내가 회의에서 본 만화는 사전에 어느 정도 ‘혐의’를 인정받아 심의에 오른 것들이다. 그 반대편에서는 대단히 교육적이고 예술적·심미적인 우수한 창작만화가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게 일본 만화 생태계의 힘이다. 한국이 그 힘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리 풍토에서는 아직 어림도 없다는 느낌이었다.



 선정·폭력성을 보다 못한 도쿄도(都)에서 칼을 빼든 모양이다. 지난 15일 도쿄도의회는 ‘청소년 건전육성 조례’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안 제출 후 9개월간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 보호’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 뒤끝이다. ‘강간 등 형벌법규에 저촉되는 성행위를 부당하게 찬미·과장’하는 만화·애니메이션은 18세 미만 청소년·어린이에게 판매하지 못하도록 한 조항이 핵심이다. 그나마 표현의 자유 위축을 우려해 조례를 ‘신중하게 운용해야 한다’는 결의문을 함께 통과시켰지만 일본 출판계로부터는 항의가 빗발치고 있다.



 한국에서도 올해 ‘표현의 자유’를 놓고 일본 이상으로 시끄러웠다. 일본의 만화 논란 수준을 뛰어넘는, 매우 중대한 결정들이 이루어졌다. 이달 초 ‘미국 쇠고기 광우병’ 보도를 한 MBC PD수첩 제작진에 대한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이 나왔고, 사흘 전에는 헌법재판소가 ‘미네르바’ 박대성씨가 낸 헌법소원에서 “전기통신기본법에 규정된 ‘공익’의 의미가 불명확하고 추상적이다”며 위헌 결정을 해 박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둘 다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획기적인 쾌거다. 세상사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제대로 보인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든 뒤에야 날아오른다”는 헤겔의 말을 인용하자면, 올해 대한민국판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세밑에 날아오른 셈이다.



 나는 같은 언론인으로서 PD수첩 제작진은 ‘무죄’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광우병 보도의 상당 부분이 허위라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박대성씨도 반성해야 옳다. 그러나 PD수첩·박대성씨의 잘못이 두 판결·결정의 커다란 의미를 훼손하지는 못한다. 사실 반성할 측은 더 있다. 40년도 더 지난 낡은 조항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법 정비를 안 한 국회의원들은 비난 받아야 한다. 온 사회가 ‘미네르바’에 휘둘리는데도 입 한 번 뻥긋 못하거나 오히려 미네르바를 찬양하고 나섰던 지식인 집단은 또 뭔가. 그 많은 경제·경영 학자는 어디 있었나 말이다. 헌법재판소는 “허위 사실 유포는 무조건 처벌하기보다 진실의 시장에서 걸러내게 하라”는 취지로 위헌 결정을 내렸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거짓을 가려낼 책임의 대부분은 지식인 사회에 돌아온다. 얄팍한 우리 지식인층이 법원·헌재가 폭넓게 인정해준 표현의 자유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팩트(fact)보다 이념에 더 좌우되는 체질이 새해에는 바뀔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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