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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서울과 워싱턴의 갈등 (241)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이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북한의 김일성 등 공산정권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그려 전시하고 있다. 그해 5월 모든 포로의 일괄 송환을 내세운 공산포로들이 자유송환을 원하는 반공포로들을 살해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우리는 당시의 포로 교환을 ‘리틀 스위치(Little switch)’라고 불렀다. 휴전이 이뤄지면 대규모로 포로를 서로 교환하는 작업에 앞서 먼저 치르는 작은 규모의 포로 교환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전쟁은 수많은 죽음, 또는 희생과 함께 포로를 양산한다. 전쟁과 포로는 따지고 보면 ‘바늘과 실’의 관계이기도 했다. 전후(戰後) 문제의 하나로서 이 포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는 항상 민감한 주제다. 특히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에는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 공산 측의 북한군과 중공군이 모두 들어 있어 문제의 가닥을 어떻게 잡고 풀어야 하는지가 우선의 큰 골칫거리였다.

 공산군 포로는 전쟁이 벌어져 저들이 아군의 손아귀에 들어왔던 그 순간부터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그들을 잡아 수용소에 가뒀다가 때가 오면 풀어주는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공산주의의 이념에 깊이 빠져 있던 포로는 역시 공산주의자로서의 기질을 나름대로 철저하게 발휘했다. 따라서 그들을 한 장소에 가둬두는 것 자체가 문제일 때도 있었다.

 6·25 당시 전쟁포로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이 1952년 5월 초 도쿄에 부임할 때 벌어진 일이었다. 그가 부임하던 5월 7일 거제도의 포로수용소를 관할하는 프랜시스 도드 준장이 수용소의 포로들에게 거꾸로 잡혔다. 포로에게 포로로 잡히는 아주 엉뚱한 사건이었다.

 그 전말은 이렇다. 한국전쟁 중에 잡힌 포로 중에는 공산주의 체제에 환멸을 느꼈거나, 아예 공산주의에 동의할 마음이 없었는데도 몸이 그 체제에 묶여 있어 억지로 전쟁에 나선 사람이 많았다. 53년 봄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 있던 공산군 포로 중 그런 사람은 어림잡아 40%를 넘었다.

 당시 약 8만 명의 북한군과 공산군 포로가 거제도 수용소 등에 붙잡혀 있었는데 그중 3만2000여 명은 휴전 뒤에도 공산국가인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이른바 ‘반공(反共) 포로’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공산주의 이념에 철저하게 물들어 있던 포로들이 결국 말썽을 일으키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은밀하게 전해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수용소 안팎에서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켰다.




프랜시스 도드(1899~1973)

 대표적인 게 도드 장군 납치 사건이었다. 그는 “요구사항이 있다”면서 면담을 요청한 공산군 포로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순진하게 나섰다가 돌변한 저들에 의해 끌려간 경우였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그는 그해 5월 7일 오후 2시쯤 포로들의 요청에 따라 제76 수용소 앞에 가서 문을 연 뒤 포로 대표들을 나오도록 했다. 포로 대표들은 평소처럼 도드 장군에게 식량과 피복·의약품 등 물자를 더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1시간 정도 면담이 이어졌다고 했다.

 포로들은 자신들이 석방 뒤 소련으로 보내질 수 있도록 “소련을 중립국으로 인정하라”는 등의 엉뚱한 요구사항을 내밀면서 시간을 끌었다고 했다. 더 이상 면담을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도드 장군이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오물(汚物)을 버린다는 명목으로 잠시 수용소 밖으로 나왔던 20여 명의 포로가 달려들어 도드 장군을 납치해 자신들이 갇혀 있던 수용소로 끌고 갔다.

 이 내용이 그 유명한 ‘수용소장 도드 장군 납치 사건’의 전말이다. 그는 결국 4일 동안 포로수용소에 감금됐다. 그의 부주의함은 워싱턴을 비롯해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 한국에 있던 미 8군 사령부와 한국군 사이에서도 널리 회자됐다. 그러나 경계를 게을리한 도드 장군도 분명히 화제였지만, 온갖 것을 요구하면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제 의지를 관철하려는 공산군 포로의 그악스러움(사납고 모짊)이 더 우리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 사건은 무장병력을 긴급 파견해 수용소 주위를 둘러싼 미군의 행동에 포로들이 결국 압박감을 느껴 도드 준장을 풀어주는 선에서 매듭지어졌다. 도드 장군은 이 사건 때문에 한 계급 강등됐다. 명예를 중시하는 미군의 전통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도드 장군의 실책은 치욕스러운 것에 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공산군 포로는 그렇게 말썽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수용소에 갇혀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는 난동과 폭동을 일삼으면서 어엿한 정치적 행동을 선보이는 게 공산군 포로였다.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은 자신이 도쿄에 부임하자마자 터진 공산군 포로의 ‘기습’으로 인해 포로 문제를 상당히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공산군 포로들은 겉으로 처우개선을 늘 요구하고 나섰지만, 실제 그들이 주목하고 있던 것은 휴전이 성사될 경우 자신들을 어디로 보내느냐는 문제였다. 공산군 포로들은 포로 전원을 공산주의 북한이나 중국으로 보내는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절반에 해당하는 반공 포로들은 여전히 공산 치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신들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포로 송환 문제는 사실 아주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것은 휴전회담의 길고 긴 협의 과정에서 두고두고 뜨거운 문제로 부상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대해 명쾌한 입장이었다.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포로들을 공산주의 국가로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더구나 반공 성향이 있는 북한군 포로를 김일성의 공산 치하로 송환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일로 규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이 코앞에 닥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늘 ‘북진통일’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부상을 당하거나 몸이 쇠약해진 포로들을 서로 맞바꾸자는 내용의 ‘리틀 스위치’는 그런 포로 문제를 직접 건드리고 나선 조치였다. ‘북진통일’을 열심히 외치는 대한민국의 대통령, 그런 우방의 통치권자를 지켜보면서도 한편으로는 포로 일부 교환에 이어 휴전회담의 속도를 높이자는 워싱턴의 의중(意中)은 조만간에 어떤 형태로든 충돌이 불가피해 보였다. 그것은 예상보다 아주 빨리 닥친 실제 상황이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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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