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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남침인 걸 할머니·할아버지 얘기 듣고 알았어요”

자서전의 주인공 할머니·할아버지들(사진 가운데 앞줄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문태현·이순금·인영순·이재근씨)과 동대전고 봉사동아리 ‘나눔’ 학생들이 16일 오후 1시 동대전고 도서관에서 만났다. 신인섭 기자
이순금(66) 할머니는 3일 오후 3시 대전광역시 대덕구 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자신의 자서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할머니는 “내가 뭘 했다고 자서전이에요…”라며 쑥스러워했지만 막상 250여 쪽짜리 두툼한 자서전을 보고는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자서전 표지에는 여호와 이레라는 제목과 할머니의 사진이 있었다. 책등에는 ‘글- 박초희·손승지·유연희·이정미·천다빈’이 쓰여있었다. 모두 동대전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다. 할머니는 “별 볼일 없지만 내 인생이 이 책에 다 들어가 있어요. 책도 책이지만 자서전 쓰면서 손녀들이 새로 생겨 그게 더 소중해요”라고 말했다. 이날 기념회는 이순금 할머니 외 4명의 할머니·할아버지의 자서전 출판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는 동대전고 학생들의 특별한 봉사활동

대전시 대덕구 연축동에 살고 있는 이순금 할머니는 44년 논산에서 태어나 21살에 결혼해 세 자녀를 둔 평범한 할머니다. 그런 할머니가 자서전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동대전고 학생들의 역할이 컸다. 대전시 대덕구에 있는 동대전고에서는 지난해부터 대덕구 내 할머니·할아버지 자서전을 써드리고 있다. 지난해 문학동아리 ‘한울’에서 시작해 올해는 이 행사만 맡아 진행하는 봉사동아리 ‘나눔’이 생겼다. 2학년 학생 20명이 6월부터 5명의 할머니·할아버지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인터뷰부터 글쓰기, 사진, 편집, 표지 디자인까지 인쇄를 제외한 모든 작업을 직접 했다.

6개월간의 작업 끝에 여호와 이레 ·그리스도와 함께(인영순, 글 김민정·김현지·곽진빈·노가윤)·(이재근, 글 김현민·신동욱·신승기·조효윤)·엄마의 일기(이선여, 글 김동훈·김재식·김희범)·송암 이범식의 회고록(이범식, 글 고영주·남경민·남다희) 등 5권의 자서전이 탄생했다. 이 자서전 주인공 중 3명(이순금·인영순·이재근)과 봉사동아리 ‘나눔’ 학생 20명을 16일 오후 1시 동대전고 도서관에서 만났다.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기’ 행사를 기획한 동대전고 김원명(58) 교장과 김수진(28) 교사는 “자서전을 쓰면서 아이들이 철이 많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김 교장은 “첫해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 날 한 학생이 저한테 와서 ‘교장 선생님. 제가 어제 할머니 인터뷰하면서 놀라운 걸 발견했어요. 6·25가 북한의 남침이더라고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고등학생이 그걸 이제 알았느냐고 했더니 ‘학교에서 배우긴 했는데 긴가민가했거든요. 그런데 어제 할머니한테 그때 상황을 생생하게 듣고 나니까 이제 정확히 알겠어요’라고 말했죠”라며 “꼭 역사적 지식이 아니더라도 어르신을 공경한다든가 생활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하는 등 아이들이 많이 달라졌지요”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6개월에 걸쳐 완성한 자서전. 왼쪽부터 『엄마의 일기』 『송암 이범식의 회고록』『여호와 이레』『꿈』 『그리스도와 함께』.
학생들이 할 만한 의미 있는 봉사활동을 찾던 두 교사는 우연히 신문에서 노인들의 과거 얘기를 듣고 글로 정리해 드리는 봉사활동을 발견했다. 동대전고 학생들이 그런 활동을 해 보면 어떨까 해서 처음에는 신문이나 교지 형태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어르신들의 얘기가 재미도 있고 양도 많았다. 그래서 한 사람당 한 권씩 책으로 엮기로 했다. 복지관과 연계해 봉사활동 시간도 인정하도록 했다. 김현지 학생은 “지금까지 했던 다른 봉사활동은 시간 채우려고 다녔던 게 사실이에요. 그런데 자서전 쓰는 건 남한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스스로 의미 있는 일을 한 것 같아 자랑스럽네요”라고 했다.

학생 3~5명이 한 팀으로 6개월간 시험기간을 제외하곤 매주 1~2회, 한 번에 2~3시간씩 어르신들의 집으로 찾아가 인터뷰했다. 녹음기를 틀어놓고 이야기를 메모했다. 인터뷰는 다음 시간까지 정리해 어르신께 읽어드리고 틀린 부분은 수정했다. 이순금 할머니 자서전을 담당한 박초희 학생은 “평소에 책 읽고 글 쓰는 걸 워낙 좋아하는데 직접 책을 쓰면서 봉사활동도 할 수 있다고 해서 지원했어요. 할머니 댁에 가면 정말 반갑게 반겨주셨어요. 우리도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집에 가면 인터뷰만 하는 게 아니라 오늘 있었던 얘기도 하고 어깨도 주물러 드렸죠. 할머니 재미있게 해드리려고 가끔 막춤도 추고요(웃음). 그렇게 정신없이 6개월이 지났는데 어느 새 책이 완성됐어요. 내가 책을 쓰다니, 너무 신기하고 보람찼어요”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어르신들 섭외가 힘들었다. 자서전 얘기를 하면 할머니·할아버지는 대부분 “난 그럴 정도 사람이 못 돼요. 살면서 한 것도 없는데”라며 제안을 거절했다. 이순금 할머니는 남편 문태현(73) 할아버지가 자서전 쓰는 것을 반대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책으로 쓴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나이 어린 학생들이 와서 책을 쓴다고 하니 의아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반대했지요. ‘가만히 있는 새를 왜 새장에서 꺼내려고 하느냐’고 호통 치기도 했고요. 근데 이 여사(이순금 할머니)가 해보고 싶다고 나를 계속 설득하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한 번 해보자고 했죠.” 학생들을 만나면서 문씨의 생각이 변하게 됐다. 그는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정성이 보이더라고요. 평범하게 살아온 우리한테도 뭔가 배우려는 모습도 보이고요. 학생들이 뭐 하나라도 얻어갈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더 학생들을 챙겼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미리 틀어놓고 간식도 손수 챙겼다. 이순금 할머니 자서전을 쓴 학생들은 마지막 인터뷰 날 울음을 터뜨렸다. 세 자녀가 모두 외국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가 외로우실 것 같아 자식들이 있는 나라를 찾아 보시라며 지구본을 선물했다. 박초희 학생은 “할머니가 선물을 안 받으시는 거예요. 선물을 받으면 이제 마지막이라고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요”라며 “그 얘길 듣고 모두 같이 울었어요. 자서전 다 쓴 다음에도 종종 찾아 뵐 거예요”라고 말했다.

인영순(72) 할머니는 “노인이라고 집에만 가만히 있을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교회도 가고 봉사활동에 복지관도 다니느라 우리도 얼마나 바쁜데…그래서 처음엔 안 하려고 했어요. 근데 학생들 보니깐 우리 손녀들 생각이 나더라고. 얼마나 귀여워. 애기들(학생들)이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라며 “친손자·손녀가 얼마 전에 모두 대학에 들어갔어요. 그때 내가 하도 마음고생을 많이 해서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걔들이 대학생이 되고 이제 내 인생에서 대학입시 걱정은 더 이상 없다고 좋아했는데 이제 얘들이 내년에 대학시험 봐야 하잖아요. 그게 벌써 걱정이네요. 진짜 손녀가 생긴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인영순 할머니의 자서전을 써드린 김민정·김현지·곽진빈·노가윤 학생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생활이 많이 달라졌다고 했다. “할머니가 우릴 보시면서 항상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너희들은 절대 내가 살았던 것처럼 살지 마라. 나는 여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대에 태어나 하고 싶은 걸 하나도 못했다. 공부가 미치도록 하고 싶었는데 너희 나이 때(18세) 시집을 가야 했다. 지금은 너무 좋은 세상이니 꿈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라.’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참 복받은 사람들이구나. 열심히 살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학생들에게 자서전을 쓰면서 힘들었던 일을 물었다. 남경민 학생이 “인터뷰를 녹음한 다음 글로 풀어 썼어요. 10분 녹음한 것 듣는 데 한 시간이 걸렸어요. 할아버지가 발음이 안 좋으신 데다 옛날 말이나 한문, 방언 같은 걸 많이 쓰셔서 그걸 일일이 인터넷으로 찾다 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라고 말하자 학생들이 모두 맞장구쳤다. 노가윤 학생은 “우리 할머니도 어렸을 때 배 아프면 ‘금계랍(염산-키니네: 과거 해열 진통제로 쓰이던 약)’을 드셨다고 했는데 한 번도 못 들어본 단어였어요. 이런 말이 많아 힘들었어요”라고 했다. 작업하면서 같은 팀 친구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 경우도 있었다. 원고를 완성한 다음 다 같이 모여 수정하는데 친구끼리 문장을 고치다 보니 감정이 상해 다투는 일이 생겼다. 곽진빈 학생은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니까 잘 마무리하자며 화해하고 다시 같이 작업했어요. 그 일 때문에 지금은 더 친해졌어요”라고 말했다.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기’ 행사는 내년에 규모를 두 배로 확대한다. 올해 자서전을 썼던 봉사동아리 학생들이 내년에 행사를 진행할 후배들을 직접 뽑을 예정이다. 학생들은 인터뷰를 잘 진행할 수 있게 말 잘하고 글 잘 쓰는, 성격 좋은 후배를 뽑겠다고 했다. 목소리 큰 사람(어르신들이 귀가 잘 안 들려서)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김원명 교장은 “사실 디자인이나 내용이 부실한 구석이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우리 학생들이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이잖아요. 아직 어린 나이에 한 사람의 인생을 정리하면서 학생들이 참 많은 것을 얻었을 거예요. 어르신들과 학생들 모두에게 의미 있는 일이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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