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토끼는 완전히 절망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용궁에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걸 알기에

곰처럼 웃는 토끼에게, 호랑이가 포효했다. “짧게 말해! 이 초고속시대에 웬 말이 그리 많아? 광케이블에 집어넣고 확 쏴 버리기 전에 대책만 말해!”
“대책 뭐 있습니까. 인간들처럼 대통령선거를 해서 우리 땅짐승과 소통할 수 있는 권력을 창출할 수도 없는 거고. 하늘님은 영원한 독재자시잖아요.”

新토끼뎐 희망을 쟁취하라


토끼의 말 듣기에 짜증이 솟구친 동물들이 다 함께 소리질렀다.
“대책이 뭐냐고!”
“대책은, 무조건 비는 거죠. 헤헤헤!”
토끼는 쥐처럼 웃었다. “제발, 용서해 달라고, 앞으로는 절대로 날짐승·물고기 괴롭히지 않겠다고 싹싹 비는 거죠.”

쥐가 찍찍댔다. “그토록 무서운 불벼락을 내리신 분이 쉽게 용서를 할까?”
토끼가 염소처럼 제 턱을 쓰다듬었다. “쉽게 용서하실 게 틀림없어. 하늘님도 너무 심하게 자연을 초토화시킨 게 마음에 걸리실 거거든. 누가 복구하지? 바로 우리 땅짐승밖에 복구할 수가 없어. 우리가 싹싹 빌면 못 이기는 척 용서하실 거야. 대자연의 복구를 위해서.”
격론이 있었지만, 토끼의 말대로 의견이 모아졌다. 땅짐승들은 높은 제단을 쌓고 사흘 낮밤을

하늘님께 빌었다.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 제발, 우리에게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세요. 물고기와 날짐승과 싸우지 않고, 사이 좋게 지낼 테니, 요새 말로다 소통하고 통섭할 테니, 제발 긍휼히 여겨주세요….”

하늘님의 용서를 받은 땅짐승들은 힘을 모아 자연을 복구했다. 땅짐승들의 성실한 노동에 감동한 하늘님은 땀짐승들을 위로하기로 했다. 하늘님이 땅짐승들의 리더인 호랑에게 하문했다. “내가 무엇으로 너희들을 기쁘게 할꼬?”

“하이구, 감사함다, 하늘님. 흐흐, 뭐, 저희 같은 것들은 그저 유식한 말로다 삼S―술(Soju), 섹시(Sexy)암수, 뽀다구(style)―면 충분합지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가 무슨 유흥업소라도 하는 줄 아느냐?”

호랑이는 전적으로 토끼의 머리에 의지하고 있었다. 토끼를 불러 의논했다. “큰일 났다. 하늘님 또 삐진 모양이시다. 그분은 왜 그리 잘 삐지시냐.”
“하늘님 관점에서 생각해보세요. 겨우 자연 경제가 회복됐는데, 곧바로 또 마시고 거시기하고 모양다리만 내는 유흥세상이 되면 웃기잖아요. 아이엠에프 극복했다고 곧바로 유흥하고, 금융위기 얻어맞고 다시 정신 차리고, 또 금방 잊고 유흥하고, 이런 게 뭐 패턴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하늘님이 앞장서서 유흥판을 벌여줄 수는 없는 거라고요.”

“대책만 말해!”
“이런 때는 스포츠가 짱이지요. 주최하는 분도 생색나고 참가하는 이들도 때깔 나는. 사실 스포츠를 하게 되면 호랑이님이 말한 3S는 자동으로 따라오게 돼 있어요. 스포츠 자체가 누가 더, 어느 팀이 더 뽀다구 나는지 보는 거잖아요? 또 섹시암수가 땀 흘리는 걸 섹시암수들이 구경하는 거잖아요? 연애 못하고 있는 노총각·노처녀들, 배우자 제일 빨리 구할 수 있는 데가 동남아나 중앙아시아가 아니라 스포츠경기장이란 걸 모른다니까요. 그리고 스포츠 끝나면 포장마차에서 소주나 맥주 한잔 쭉 하고 헤어지는 게….”

“우리가 뭐 별의별 운동을 다하는 인간이냐? 우리 땅짐승이 무슨 스포츠야!”
“우리도 달리기는 할 수 있지요!”
토끼가 가르쳐준 대로, 호랑이는 하늘님에게 달리기대회를 주청했다. 하늘님이 생각해봐도 참으로 쌈박한 아이디어였다. 달리기야말로 땅짐승의 자랑이 아닌가. 날짐승은 날 수 있고, 물고기는 헤엄칠 수 있고, 땅짐승은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늘님배 땅짐승 달리기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다. 상금은 없다. 하지만 부상이 어마어마했다. 하늘님은 열두 짐승만 뽑아 동물신의 지위를 주겠다고 했다. 하필이면 딱 열둘인가? 인간들은 하루를 열둘의 시간대로 나누어 살았다. 열두 녀석을 뽑아서 각 시간대를 책임지는 시간신으로 삼고자 했다. 12등 안에 들면 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땅짐승들은 유일신교의 세계에서 살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신이 될 수 없었을 텐데, 비록 잡신이지만 동물도 신이 될 수 있는 다신교의 세계에 사는 게 참 기뻤다.

닭은 날짐승이지만 대회 참가를 허락받았다. 닭은 하늘님께 이런 청원서를 썼다. ‘하늘님, 저는 조금 날 수도 있고 빨리 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날짐승한테는 날지도 못하는 멍텅구리 소리를 듣고, 땅짐승한테는 다리가 둘밖에 안 되는 멍청이 소리를 듣습니다. 젠더처럼 저의 정체성이 의심스럽습니다. 이왕 날짐승인지 땅짐승인지 모를 바에야 신이라도 되고 싶습니다. 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닭의 희망이 아니라 저처럼 정체성을 의심 받는 모든 소수자의 희망입니다. 하늘님, 우리의 희망을 실현 가능한 감동 영상으로 바꿔주세요!’

하늘님은 닭의 청원서를 읽고 놀라워했다. “이런 문장이 닭대가리에서 나오다니!”
하늘님은 깨끗이 속았다. 닭이 쓴 문장이 아니라 토끼가 쓴 문장이었다.
소가 1등으로 도착할 뻔했으나, 소 등에서 훌쩍 뛰어내린 쥐가 1등을 했다. 소는 분했지만 두 번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쥐가 십이지의 첫머리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미약한 힘을 일찍 파악하고, 약삭빠르게 꾀를 썼기 때문이다’라고 소문이 났지만, 달리 말하면 쥐는
사기를 친 것이다. 남의 등을 쳐먹지는 않았지만 남의 등을 타고 왔다.

사실은 소도 사기꾼이었다. 소는 다른 동물들보다 여섯 시간이나 먼저 출발했다. 눈치 빠른 쥐가 부정 출발하는 소 등에 잽싸게 올라탔던 것이다.
소는 어떻게 해서든 1등 동물신이 돼 죄도 없이 병도 없이 죽어간(진짜로 구제역에 걸려 죽은 소는 소수다) 소들의 원혼을 달래고 싶었는지 모른다.

글쎄, 세계적인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세계적인(정확히 말하면 미국적인 혹은 유럽적인이라고 해야겠지만) 프로리그에서 골을 넣거나 홈런을 치거나, 이런 것들이 ‘국위선양’이라는 데는 억지로라도 동의해보겠는데, 국민에게 희망까지 준다는 데엔 이해하기 어렵다고 불퉁대는 이들이 간혹 있어 그걸 ‘(불치병인) 세계병’이라고 비웃기도 하나 보다.

비판자들이여, 소를 보라. 어느 날 갑작스레 생죽음 당한 소, 그런 친구들의 죽음을 까마귀에게 전해 듣고도 꾸역꾸역 살아가야만 하는 소들, 그런 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겠다는 일념으로 1등을 하고자 했던 우리 소를 보라. 정말 집단적인 희망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가?

나머지 동물들은 정직했다. 동이 틀 무렵 일제히 출발했다. 이 땅에는 시속 100㎞대인 치타, 시
속 80㎞ 이상인 영양·누·사자·톰슨가젤 같은 동물들이 살지 않는 관계로, 호랑이와 말과 용, 그리고 토끼가 선두권을 형성했다.

용이 땅짐승이었다고? 용은 닭 얘기를 들었다. 용도 토끼에게 청원서 대필을 부탁했다. 나 용은 날짐승인지 땅짐승인지, 심지어 물고기인지 너무나도 헛갈려 하는 포스트모던한 짐승으로, 그렇게 포스트모던한 짐승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달리겠다는 요지로 토끼는 써주었다. 토끼는 대필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저 닭에게는 달걀 한 알, 용에게는 아카시아잎 한 다발 받았을 뿐이다.

쥐는 지혜를 사기 치는 데 썼다. 하지만 쥐보다 훨씬 지혜로운 토끼는 정정당당하게 승부했다. 토끼는 부정 출발하지도 않았고 다른 동물을 타고 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부정한 방법이라면, 토끼에게는 훨씬 멋진 꾀가 있었다. 맛있는 곤충이 우글거리는 데를 알려주면, 날짐승들은 기꺼이 어디까지든 태워다 줄 것이다.

그러나 토끼는 달리기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달리기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토끼는 딱 한번 졌다. 바로 거북이한테 진 것. 자다가 졌다는 소문이 났는데, 웃기는 소리다. 잠 좀 잤기로서니 거북이 따위에게 졌겠는가. 실은 짜고 친 고스톱이었다. 용궁의 선생님인 거북이가 간곡히 청했다.

지금 어린이들은 누구나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교훈을 비웃는다. 태어날 때 이미 성공할 것인가 말 것인가 정해진다. 부잣집에서 태어나면 부자로 살아가는 거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가난뱅이로 사는 것이다. 인생역전, 그따위 것 없다.

“미래의 희망 어린이들이 그토록 허무주의적이어서야 되겠습니까. 토끼님,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환경일지라도 누구나 최선을 다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토끼는 거북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거북이는 자신의 승리를 이야기로도 만들고 동영상으로도 찍어 용궁학교에서 잘 써먹고 있단다. 인간들의 4대 최첨단무기(스마트폰·트위터·구글·페이스북)에 그 쪽 팔린 얘기가 수만 가지로 변형돼 절찬리에 떠돌고 있다고도 한다. 창피하지만, 거북이 같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준다면야, 나야 뭐, 좋지. 토끼는 인간들의 최첨단무기에 떠도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괜히 좋았다.

토끼는 요새 기분이 썩 괜찮았다. 인간 사이에선 스타가 된 모양이고, 땅짐승 세계에서는 핵심 브레인이 되었다. 이번 달리기대회에서 1등만 한다면, 이건 뭐 완전 토끼판이지!
허영심 가득하다고 비웃지 마라. 허영심에서 비롯된 최선을 다한 질주야말로 다리도 짧은 토끼가, 말과 호랑이와 용 사이에서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이다. 강력한 우승후보 말이 선두권에서 탈락했다. 말은 빠르기 했지만 편자를 박지 않은 탓에 아파하더니 뒤처졌다. 용은 뱀과 실랑이 하느라 뒤처졌다. 뱀이 무슨 수로 달리기를 할 것인가. 뱀은 용의 비늘 속에 착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용은 뱀을 떨어내려고 용을 쓰느라 속도가 뚝 떨어졌다. 지혜롭다는 소리를 듣는 또 하나의 동물 뱀도 남을 이용해 먹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진정한 1등의 영예는 호랑이와 토끼의 경쟁으로 좁혀졌다. ‘1등만 아는 더러운 세상’을 엎치락뒤치락했다.
골인 지점에 다다랐다. 토끼가 5m쯤 앞서 있었다. 호랑이가 뛰어 올랐다. 호랑이가 정확히 5㎝를 이겼다. 토끼는 분했다. 다리가 조금만 길었더라도! 그렇게 토끼는 신체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2등을 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 1등 동물신의 영예를 안은 쥐와 2등 동물신의 위업으로 몰살당하고 있는 제 종족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고 자부하는 소가 짠하고 나타났다. 금도금으로 번쩍이는 트로피와 진귀한 꽃송이로 엮은 꽃다발을 목에 걸고.

하늘님 앞이라 감히 날뛰지는 못했지만, 토끼는 환장하는 줄 알았다. 호랑이는 당연히 제 차지였던 1등을 빼앗기고도 대단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호랑이님, 이건 아니잖아요. 하늘님께 항의하셔야 됩니다. 1박2일 찍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하늘님이 기라면 긴 거지 무슨 말이 많아. 이놈아, 난 네가 참 고맙다. 네 머리 아니었으면 우리가 동물신이 될 수 있었겠느냐?”
동물신이 된 열한 마리의 짐승은 밤새도록 흥겹게 놀았다. 토끼만 흥겹지 않았다. 찌그러진 상통으로 침묵하고 있던 토끼에게 누군가 물었다.
“말 많은 토끼, 오늘같이 기쁜 날 왜 이리 조용하셔?”

“바보들, ‘동물신’은 훈장에 지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니라고. 훈장, 그건 그냥 껍데기야. 권력자들이 죽을 때까지 충성 열심히 하라고 붙여주는 껌딱지에 불과해.”
“자식, 4등이나 해놓고 그딴 소리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토끼는 슬그머니 일어나 잔치판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토끼는 감히 하늘님께 편지를 썼다.

‘하늘님도 즐겨보시는지 모르겠지만, 인간들이 즐겨보는, 남자 대여섯이 이틀치기로 놀러갔다 오는 걸 리얼 뭐라고 보여주는 프로가 있습니다. 남자들은 밥 먹기나 잠자리를 두고 희한한 게임들을 하는데, 아무리 괴상한 게임일지언정 처음 몇 년은 그래도 나름 정정당당하게 게임하더니 올해는 완전히 야바위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깃발 뽑아오기 같은 걸 할 때, 혼자 안 자는 겁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신발을 숨기고 테이프로 다른 사람들을 묶어놓고 이럽니다. 두엇이 짜고서 남들을 속여먹는 것도 예사입니다. 그렇게 사기와 협잡과 부정이 난무하는 걸 게임이라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프로를 어린이들이 즐겨본다는 걸 아십니까. 정당하지 못한 방법이라도 1등만 하면 된다는 걸 어린이들에게 주입교육시키고 있는 겁니다. 갖은 방법으로 군대를 안 다녀오는데 성공한 사람들이 벙커에 모여 앉아 군대를 움직이는 나라고, 온갖 부도덕한 과정으로 권력을 쟁취한 분들이 통치하는 나라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떻게 일요일 저녁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 먹을 때 하는 프로그램에서조차 사기를 쳐서라도 1등만 하면, 성공만 하면, 돈만 많이 벌면 된다는 개념 없는 개똥철학을 설파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그런데, 믿었던 단 한 분, 하늘님마저 쥐와 소와 뱀, 이 세 동물의 명백한 ‘부정’을 인정함으로써, 하늘님은 이 세상에 거의 진리와도 같은 말씀 하나를 하신 셈이 되었습니다. 사기를 쳐서라도 1등 해라!

부정한 방법을 써도 좋다, 무조건 1등만 하면 장땡이다, 라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 거나 다름없다고요, 하늘님. 하늘님은 명백히 잘못했습니다. 이번 달리기대회 취소하셔야 됩니다. 재경기해야 합니다. 하늘님마저 ‘정의’를 버리시면 안 됩니다.’

이런 편지를 받고, 그래 내가 참 잘못했다, 반성해야지, 그리고 이런 충성스러운 간언을 한 토끼에게는 금일봉을 하사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통치자가 있다면, 정말 이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다. 하늘님은 대로했다.

“이 찢어 죽일 놈의 토쾡이!”
그러나 토끼가 틀린 말한 게 없었다. 무턱대고 죽일 수는 없었다. 하늘님은 호랑이에게 비밀지령을 내렸다.
“토끼를 죽이지 못하면 네가 죽는다!”

호랑이는 참 갈등이었다. 토끼 때문에 땅짐승들을 다스리기가 얼마나 쉬웠던가. 토끼는 자신의 우뇌나 다름없었다.
이때 물세계 용왕으로부터 특사가 왔다.
“저희 용왕께서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다.”
“또 토끼 간을 달라는 얘기고만. 도대체 지금까지 우리가 바친 토끼가 몇 마리인가? 한·미 관
계도 이 정도는 아닐걸.”

“그래서 우리 물세계랑 3차 세계대전이라도 벌이자는 겁니까?”
“보내면 될 거 아뇨. 가서 기다리쇼. 그렇지 않아도 죽을 날 받아놓은 토끼 한 마리 있으니.”
호랑이는 토끼를 불러들였다.
“토끼야, 네 조상 중에 용궁 가서 살아온 분이 계시지?”

“그때는 간 꺼내놓고 다니는 유치한 꾀도 통하는, 참 순진무구한 세상이었죠.”
“나는 너를 용궁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너를. 그러기에 왜 하늘님한테 개겨.”

“나도 내 바른 입 때문에 죽을 줄 알았어요.”
수만 마리 동물이 토끼를 전송했다. 정직한 말버릇 때문에 적이 많았던 토끼, 수다스러웠던 토
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지혜와 문장을 기꺼이 베풀었던 토끼, 허영심도 상당해 경거망동하기 일쑤였던 토끼, 수백 동물의 웃음소리와 몸짓을 흉내 낼 수 있었던 토끼, 좌충우돌 꾀주머니 토끼가 용궁으로 죽으러 간다. 그리고 동물들이 만든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토끼야, 토끼야, 살아 돌아오너라!”
용왕은 굉장히 오래 살았다. 삼백 살도 넘는다. 그간 먹은 토끼 간이 500개는 될 테다. 용왕은 토끼 간을 진통제처럼 복용했다. 과거엔 간을 바치러 온 토끼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런 절차를 생략한 지 오래되었다. 토끼를 잡아오면 바로 배 갈라서 간을 꺼내 달였다. 그런데 이번에 온 토끼가 죽어도 용왕님을 뵙고 죽겠다고 발광을 한다는 것이었다.

토끼는 속사포 쏘듯 진언했다.
“용왕님의 병은 토끼 간을 먹는다고 나을 병이 아닙니다. 내가 이 예쁜 혓바닥으로 용왕님 병을 고치겠어요. 키스하자는 말은 아니고요, 정치적인 고민 싹 풀어드릴게요. 북쪽 바다 해모수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세요. 갈치들의 항의를 더 이상 묵살해서는 안 돼요. 갈치들과 대화하세요. 왜 재벌 문어들 편만 드십니까. 오징어·주꾸미·낙지에게도 희망을 주세요. 백령도와 연평도 바다의 꽃게들은 언제까지 공포 속에 떨어야 합니까. 꽃게들도 편안한 바다 가능해요. 물세계의 모든 고기가 서로 다양성을 존중하며 개성을 실현하는, 그런 참 살맛나는 세상이 불가능합니까? 아니다, 가능한 세상이다, 바로 그런 세상을 너희들이 만들어가야 한다, 이런 희망 찬 각오를 저 치어들이 가슴으로 간직할 수 있도록….”

토끼는 완전히 절망해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용궁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을 만들어낸 위대한 토끼 종족이다. 살 수 있다는 염원으로 말하자. 용왕의 가슴에서 들끓고 있는 오만 가지 고민을 풀어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말하자. 내 땅으로 살아 돌아가야 한다. 돌아가서, 이제껏 살아온 것처럼 재밌게 살아야 한다. 소박하지만, 강력한 소망! 그저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다. 희망은 쟁취하는 것, 용왕의 병이 낫지 않고는 못 배기게, 간절히
‘랩’하자.

선데이 배너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