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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처 “진정 행복하려면 남을 섬길 방도 찾아라”

“나만 불행한 건 아닐까.” “남보다 덜 행복한 건 아닐까.” 현대인들에게 부과된 질문이다.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1613~80)는 『잠언집』에서 이렇게 말한다.“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중앙포토]
“올해 나는 행복했는가.” “내년에는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연말연시는 행복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볼 만한 때다.
행복에 대해 묻는 게 해가 될 수도 있다.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1806~73)은 “자신이 행복한지 묻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게 된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말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해 따지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행복은 권리이기 이전에 의무다.

연말·연시에 따져보는 ‘행복의 과학’


선진 각국의 서점가, 일터, 학교에서 행복 열풍이 불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는 ‘행복학(science of happiness)’이 최고의 인기 강의 중 하나다. 사원들의 행복 증진을 위해 행복 전담 부서를 창설하는 회사들이 있는가 하면 야행성인 학생들의 생활 습관을 고려해 등교 시간을 늦추는 학교들이 있다.

영국 정부는 앞으로 4년간 매년 200만 파운드(310만 달러)를 투자해 ‘행복 지수(Happiness Index)’를 개발한다고 11월 말 발표했다. 프랑스·캐나다 정부도 행복 지수를 개발하고 있다. 국제적인 움직임도 활발하다. 지난해 12월에는 100개국이 참가한 국민행복지수(GNH) 국제회의가 브라질에서 개최됐다.

국가적·사회적 차원에서 행복이 논의된 역사는 길다. 18세기 이후부터 행복의 추구가 사상적으로 정당화됐다. 미국 독립선언문(1776)에 행복추구권이 나와 있고 영국 철학자 제러미 벤담(1748~1832)이 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도덕과 입법의 기초다”라는 공리주의 원칙은 근대 법·정치·경제의 제도와 관행에 깊숙이 녹아 있다. 최근 두 가지 이유로 행복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다. 우선 국민소득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국민의 수가 줄어든 나라가 많다. ‘풍요 속의 불행’은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떠올랐다.

행복학의 발전도 행복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원인이다. 영국 작가 G.K. 체스터턴(1874~1936)은 “행복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신비이기에 이성적으로 따져서는 절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마누엘 칸트(1724~1804)도 “행복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의 이상(理想)이다”며 행복을 이성의 영역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과학은 행복 문제를 방치하지 않았다. 20세기 말부터 행복학은 ‘행복 경제학(happiness economics)’과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행복학이 밝혀낸 행복의 조건은 어떤 게 있을까. 상식적인 내용도 많다. 그러나 프랑스 작가·사상가 볼테르(1694~1778)의 말처럼 “상식은 그리 흔한 게 아니다.” 오히려 상식적이기에 간과하기 쉬운 행복의 조건을 행복학이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행복은 친절, 우정, 가족, 명상, 자연, 자선, 용서, 감사, 운동, 섹스, 민주주의와 상관 관계가 높다는 것이다. 매사에 감사하고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는 기혼자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게 방대한 데이터 분석과 실험을 통해 확인됐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우리 속담처럼 자녀가 있는 사람들이 덜 행복하다는 결과도 나왔다. 한편, 사람은 깨어 있는 시간의 반 정도를 ‘딴생각하기(mind-wandering)’로 보내는데, 무슨 일이든지 당장 하고 있는 일을 할 때 행복하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문제는 인과관계다. 상관관계가 밝혀졌다고 해서 인과관계까지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남을 섬길 방도를 찾은 사람이다”고 했다. 행복학에서도 봉사·자선과 행복이 관계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남을 도움으로써 행복해지는 것인지 행복한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인지 원인-결과 관계가 분명치 않다. 『안네의 일기』의 안네 프랑크(1929~45)는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면 자신도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노력으로 행복하게 될 수 있는지도 문제다. 행복도 학습이 가능할까. 연구 결과에 따르면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대략 50%가 유전, 10%가 환경, 40%가 노력이다.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결국 유전자가 우리의 행복을 좌우한다.

유전자는 기억을 통해 행복·불행에 영향을 미친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1869~1951)는 “지나간 행복을 회상하는 것만큼 행복에 치명적인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기억이 현재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사람마다 다르다. 1978년에 실시된 연구에 따르면 복권 당첨자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사람이나 시간이 지나면 예전과 비슷한 행복 수준으로 복귀한다. 사람마다 행복의 ‘설정값(set point)’이 있어서 그 설정값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행복에도 ‘요요 현상’이 있다.

행복학은 우리가 유전과 환경에 도전해 행복을 쟁취할 방도를 제시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행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활동으로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감사의 편지를 써서 그에게 직접 전달하기, 감사 일기 쓰기,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 베풀기와 같은 게 있다.

행복을 논함에 있어 ‘돈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학 연구에 따르면 연간 10만~15만 달러의 소득에 도달한 이후에는 소득 증가가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돈으로 무엇을 산다면 물건보다는 여행, 댄스 교습, 외국어 강의, 식사와 같은 경험을 구매하는 게 행복 증진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밝혀졌다.

행복학은 상식뿐만 아니라 역사 속 위인들의 지혜와도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분수를 아는 게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1863~1952)는 “무엇이 가능한지에 대해 아는 게 행복의 출발점이다”고 했으며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르 르 보비에 드 퐁트넬(1657~1757)은 『행복론』(1687)에서 “행복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 중 하나는 과도한 행복을 기대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행복학도 같은 결론을 내린다. ‘행복 초강대국’으로 불리는 덴마크가 이웃한 스웨덴·핀란드보다 국민의 행복도가 높은 이유는 덴마크 사람들의 ‘인생에 대한 기대’가 낮기 때문이라고 한다.

『보물섬』의 작가인 로버트 스티븐슨(1850~94)은 “행복의 의무만큼 우리가 과소평가하는 의무는 없다”고 했다. 드디어 행복은 의무가 됐다. 그러나 “우리는 왜 행복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쓸모없게 된 것은 아니다. 긍정적인 답이 준비돼 있다. 행복한 사람들이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원이 생산성이 높고 행복한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높다. 그러나 행복이나 행복학에도 한계가 있고 문제점이 있다. 행복학의 경우 연구 설계나 방법론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예컨대 연령과 행복 관계에 대해 행복학은 ‘행복은 연령과 무관하다’ ‘48세가 가장 행복한 나이다’ ‘70대가 가장 행복하다’와 같이 다양한 결론을 내린다.

행복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는 극단적인 주장을 했다. 그는 “평생 가는 행복은 그 누구도 참을 수 없는 지옥이다”고 주장했다. 실용적인 차원에서 행복에 문제가 발견된다. 행복학에 따르면 행복한 사람들은 협상에 나서지 않는 게 좋다. 불행한 사람들이 속임수를 잘 알아챈다. 행복한 사람은 부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행복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더라도 결론은 단순할 수 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BC 384~322)는 말한다. “행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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