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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내음 싱그러운 날것의 맛 , 멸치젓과 환상궁합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41> 밥상에 활력주는 겨울 물미역









겨울에 싱싱한 제철 채소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육지 사람들의 잘못된 상식이다. 온실 재배를 하지 않은 싱싱한 제철 채소가 바다에서 나오는 계절이 바로 겨울이다. 근년 들어 갑작스럽게 인기를 모으고 있는 매생이를 비롯하여 미역·파래·톳 같은 해초들은 모두 겨울이 제철이다. 그중 우리 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미역, 즉 물미역이다.



겨울 물미역이 맛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는 나물 이외에 뭐 그리 특별한 게 있느냐고들 한다. 사실 나도 결혼하기 전까지 그 정도였다.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육지 사람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난 후 내 물미역 취향은 완전히 달라졌다. 부산 출신인 시댁 식구들이 먹는 방식은, 육지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희한한 방식이었다.



가장 큰 차이는, 물미역을 데치지 않고 생으로 먹는다는 것이다. 미역은 검붉은 색깔의 해초다. 시장에 나오는 물미역도 이런 상태며, 몇 가닥씩 고무밴드로 묶어 1000원에 판다. 이것을 뜨거운 물에 데치면 예쁜 진녹색으로 변하며, 그 과정에서 생미역의 강한 바다 냄새와 바닷물의 짠맛 같은 것들이 빠지면서 순해진다. 그런데 바닷가 출신들은, 이렇게 순화된 맛이 아니라 싱싱한 바다 냄새 그 자체를 즐긴다. 그래서 미역을 데치지 않고 검붉은 날것 그대로를 먹는다.

미역을 날것 그대로 먹기 위해서는 우선 싱싱한 물미역을 구입해야 한다. 그래서 수퍼마켓에서 깨끗하게 비닐 포장을 해놓은 물미역을 구입하는 것은 위험하다. 비닐 속의 상태를 잘 점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래시장에 가서 죽 둘러보면, 반짝반짝 검은 윤기가 흐르는 싱싱한 것들을 만날 수 있다. 눈으로 보는 것도 미심쩍으니 반드시 만져 보아야 한다. 미역 이파리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았을 때 미역이 뭉개져 손에 묻으면 이미 신선도가 떨어진 것이다. 질도 중요하다. 싱싱하지만 뻣뻣한 미역도 있다. 이런 것은 잘 빨아 놓아도 뻣뻣하고 맛이 없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미역을 골라야 한다. 데쳐 먹을 용도라면 약간 선도가 떨어지거나 다소 뻣뻣해도 문제가 되지 않으나, 생으로 먹는 경우에는 안 된다.



생으로 먹기 위해서는 잘 빠는 것이 핵심이다. 뿌리 부분의 딱딱한 줄기를 얼추 떼어내고는, 냉기가 가신 정도로 약간 미지근한 물을 조금 넣고 마치 손빨래를 하듯 두 손으로 박박 주물러야 한다. 한참을 빠닥빠닥 주물러 빨면 미역에서 약간 거품이 인다. 마치 바닷가 파도와 함께 밀려오는 거품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소 뻣뻣했던 미역은 점점 부드러워진다. 처음 보는 사람은 이렇게 이불빨래 하듯 치대어도 미역이 뭉그러지지 않을까 걱정을 할 정도인데, 손가락에서 뭉개지지 않는 싱싱한 물미역은 이렇게 치대도 전혀 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선도가 약간이라도 떨어진 미역은 이렇게 빠는 과정에서 이파리가 모조리 흩어져 버리고 줄기만 남는다.



어느 정도 짠물이 빠졌다 싶으면, 찬물로 두어 번 깨끗이 헹군다.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미역이 야들야들 맛있어 보인다. 사실 미역을 빠는 일은, 마른 미역에서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다 잊혀진 과정이다. 옛날에는 미역을 데치지 않고 넓적한 상태로 말렸고 이것은 물에 불려 여러 번 손으로 주물러 잘 빨아야 맛이 있었다. 요즘에도 이런 미역이 없는 것은 아니나, 매우 값이 비싸다. 요즘 흔히 먹는 말린 미역은 끓는 물에 데쳐 말린 것들이다. 그래서 이런 미역은 물에 불리면 진녹색이 되고, 그리 공들여 빨지 않아도 부드럽다. 조리 과정이 단순해졌다고는 하나, 역시 맛은 데치지 않고 말린 미역이 윗길이다.



깨끗이 헹군 물미역을 바구니에 받쳐 물을 뺀다. 이 물미역이 겨울철 밥상의 가장 중요한 쌈 채소가 된다. 쌈의 양념은 초고추장도 괜찮지만, 역시 가장 맛있는 것은 멸치젓이다. 봄에 담가서 잘 익은 멸치젓은 이 계절에 다시 빛을 발한다. 너무 삭아 멸치 뼈와 국물만 남았다면 좀 섭섭한 일이고, 김치 냉장고 같은 곳에서 잘 보관되어 건더기에 아직 멸치 살이 남아 있다면 가장 좋다. 이 멸치젓 건더기에다 마늘과 고춧가루만을 섞어 양념을 한다. 그리고 물미역에 밥을 얹고 짭짤한 멸치젓 한 점을 얹은 쌈을 입에 밀어 넣는다. 데친 미역에서는 맛볼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바다 냄새가 싱그럽다. 짭짤하고 감칠맛이 일품인 비린 멸치젓은 생미역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겨울 과메기 같은 비린 음식도, 쪽파와 함께 이 물미역에 싸먹어야 제 맛이 나는 법이다. 물미역 취향이 없는 육지 사람들은 대신 마른 김에 싸서 먹지만, 어찌 싱싱하고 매끄러운 물미역을 따라가랴.



잘 빨아놓은 생미역으로 나물을 무쳐도 좋다. 굵은 줄기를 대강 떼어내고 칼로 적당하게 썰어, 간장과 참기름·깨소금만 넣어 살짝 버무린다. 비린 멸치젓에 쌈을 먹는 것은 아침에는 부담스러우나, 이런 미역무침은 아침 밥상에도 아주 잘 어울리는 반찬이다. 특히 남편과 시댁 식구들은, 떡국에는 반드시 이 미역나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뜨거운 떡국에 미역나물을 얹어 떠먹으면서, 뜨거운 국물에 살짝 녹색으로 바뀌기 시작한 미역의 냄새가 싱그럽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고깃국에 김이나 파래 같은 해초 냄새 섞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육지 사람 입맛이 여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게 먹고도 물미역이 남으면 국을 끓인다. 물미역으로 끓인 미역국은, 마른 미역으로 끓인 미역국과는 아주 다른, 색다른 맛이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미역을 살짝 볶은 후, 멸치나 조개 등을 넣고 끓인다. 싱싱한 갯가의 맛으로 먹는 국이므로, 국물 재료로는 고기보다는 해물 쪽이 좋다. 특히 이 계절에 값이 싼 홍합 같은 것을 넣으면 아주 잘 어울린다. 단 물미역으로 국을 끓일 때 주의할 점은 살짝 끓여서 바로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끓이면 물미역은 떫은맛이 생긴다. 많이 끓여서 서너 끼 넉넉히 먹는 미역국과 달리, 단 한 끼에 해치우는 것이 좋다.

가장 값싼 재료인 물미역 하나로도 이 겨울 밥상은 활기가 넘친다. 그 활기는 마치 추운 겨울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부둣가 사람들의 왁자한 분위기를 닮았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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