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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칙사로 올 때마다 횡포 부린 조선출신 환관 윤봉과 정동



조선에 왔던 명나라 칙사의 행렬도. 중앙에 보이는 관복을 입고 가마를 탄 사람이 칙사다. 15세기 조선에 온 칙사 가운데는 조선 출신 환관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갖가지 요구를 하며 횡포를 부렸다. [사진=『영접도감사제청의궤(迎接都監賜祭廳儀軌)』, 규장각 소장]

환관은 궁정에서 일하던 거세된 남자를 가리킨다. 환관 말고도 내시·엄인(<95B9>人)·초당(貂<74AB>)·화자(火者)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환관은 분명 남자지만 실제로는 남자 구실을 못했던 ‘제3의 성(性)’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궁형(宮刑)을 받은 사람들을 환관으로 쓰다가 이후 전쟁에서 사로잡은 포로나 외국에서 바친 사람들을 충당했다. 선천적인 성 불구자나 스스로 거세한 사람들이 환관이 되기도 했다. 환관은 천했지만 궁궐에서 제왕이나 궁첩들과 접촉하면서 권력과 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환관 중에는 종이를 발명한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나 대항해를 이끌었던 명의 정화(鄭和)처럼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도 있다. 하지만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했던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로 잘 알려진 후한의 조고(趙高)나 명이 망하는데 일조했던 위충현(魏忠賢) 등 중국사에서 환관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환관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15세기 명에서 조선에 파견했던 칙사(勅使) 가운데 조선 출신 환관이 많았던 사실이다. 건국 직후부터 조선은 명의 요구에 따라 어린 화자들을 명에 들여보냈는데, 이들이 명에서 환관으로 활동하다가 황제의 명을 받고 조선에 다시 사신으로 왔던 것이다.

 조선 출신 환관들의 폐해는 컸다. 위세와 탐욕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왔던 윤봉(尹鳳)은 악명이 특히 높았다. 1425년(세종 7)부터 1431년까지 잇따라 왔던 윤봉은 명 황제의 신임이 두텁다는 것을 내세워 엄청난 탐욕을 채웠다. 1429년의 경우 윤봉이 명으로 귀환할 때 챙겨 갔던 선물 궤짝이 200개였다. 궤짝 1개를 나르는 데 8명의 인부가 필요했는데 그 행렬이 태평관(太平館)부터 무악재까지 늘어설 정도였다. 조선 정부는 윤봉이 올 때마다 그의 본가에 선물을 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인사 청탁을 들어 주기도 했다.

 1428년 윤봉은 조선에서 정동(鄭同)이란 아이를 뽑아 간다. 명에 들어가 환관이 된 정동은 1455년(단종 3)부터 1483년(성종 14)까지 모두 다섯 차례 조선에 칙사로 온다. 그의 이런저런 요구와 탐욕 또한 윤봉 못지않았다. 그야말로 ‘칙사 대접’을 요구해 조선 조정을 괴롭혔다.

 당시 조선은 사회경제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조선 출신 환관들을 우대했다. ‘명사(明使)’로서 그들을 접대하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었지만, ‘조선 출신’인 그들의 주선과 협조를 통해 명과의 외교적 현안을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5세기 조선의 입장에서 조선 출신 환관들은 명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유이자 일종의 ‘필요악’이었던 셈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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