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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한 달부터 출입한 재욱이, 이젠 ‘도서관 가이드’

도서관 아이’ 재욱이(가운데)가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서 친구와 책을 보고 있다. 오른쪽은 어머니 김영남씨. 아래 사진은 재욱이를 주인공으로 한 책 도서관 아이. 최정동 기자
“도서관에 있으면 뭐가 제일 재미있어요?” “벤 선생님하고 공차기 하는 게 제일 좋아요.”
‘도서관 아이’로 불리는 정재욱(6)어린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 읽기’가 아니라 ‘책 읽어 주는’ 원어민 선생님과의 공놀이다. 재욱이는 순천 기적의 도서관 이야기를 소재로 지난달 발간된 그림책 도서관 아이(한울림어린이)의 실제 주인공. 2003년 개관 때부터 줄곧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해 온 김영남(40)씨가 ‘도서관에서 낳아 기른’ 아이다. 개관 준비 때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봉사에 앞장섰던 영남씨는 공교롭게도 개관 1주년 기념행사날 재욱이를 낳고 딱 한 달 만에 아이를 업은 채 도서관으로 컴백했다. 영남씨와 재욱이의 발걸음을 재촉한 기적의 도서관에는 어떤 기적이 숨어 있을까?

기적의 도서관이 만들어 낸 순천의 기적


아이 함께 키우는 공동육아 공간
생후 한 달부터 도서관 터줏대감이 된 재욱이에겐 도서관 자원봉사자들 모두가 엄마다. 영남씨가 견학 안내, 교육 참여 등으로 바쁠 땐 서로 기저귀를 갈아 주고 자기 집에 데려가 재우기도 하면서 모두가 아이를 함께 키웠다. 시끌벅적한 어린이도서관에서 먹고 자며 유아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재욱이에게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이라기보다는 엄마·아줌마들과 함께하는 생활공간이자 동네 형·누나·또래들과 어울려 신나게 노는 행복한 놀이터이며 기본 예절과 사회성을 터득하는 배움터이기도 하다.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도록 지어진 아름다운 건물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책은 너무도 당연한 생활의 일부일 뿐, 책을 읽지 않고 그저 도서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즐겁다.

“저희 도서관으로 단체 견학을 많이 오는데 제가 안내를 하고 다니니까 재욱이도 저를 흉내 내 처음 온 사람들을 여기저기로 안내하곤 하죠. 어른들이 책을 소중히 대하고 남에게 봉사하는 모습을 항상 보니까 아이도 기본적인 예절과 태도가 저절로 형성되는 것 같아요. 책은 스스로 읽는다기보다는 많이 읽어 주죠. 책 읽어 주기를 통해 아이가 다양한 감각을 깨칠 수 있고, 또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 간에 형성되는 교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는 재욱이처럼 자원봉사자 자녀로 아기 때부터 도서관에 살다시피 하여 개관 기념일마다 주는 자랑스러운 ‘도서관 아이’ 배지를 받은 아이들이 30명이다. 이 아이들은 서로 형제처럼 어울리며 엄마들끼리도 가족처럼 지낸다.

전업주부 출신으로 순천 기적의 도서관구상 단계부터 주도적 역할을 한 허순영관장.
이런 환경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하드웨어적 측면에서 젖먹이 아기 때부터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배려한 도서관의 공간, 소프트웨어적 측면에서는 북스타트 프로그램을 꼽을 수 있다. 건축가 정기용(65)씨의 작품인 도서관 구석구석엔 아이들을 위한 배려가 배어 있었다. 전체가 온돌바닥인 데다 3세 미만의 아기를 위한 ‘아그들방’에는 ‘코~하는방’까지 있어 아기와 엄마들이 책을 보다가 수유를 하고 낮잠도 잘 수 있다. 재욱이와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별나라다락방’은 우주를 여행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도록 설계된 공간. 또 각종 공연과 행사가 벌어지는 강당의 중앙통로는 계단이 아니라 거대한 미끄럼틀이다.

‘북스타트 프로그램’은 젖먹이에게 책 꾸러미를 나눠 줘 유아 때부터 책과 친숙하도록 하는 프로그램. 모든 아이가 평등하게 책을 갖게 하고 소리와 이야기, 노래와 율동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책과 친해지도록 유도한다. 원어민 선생님이나 자원봉사자 이야기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 시간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모에게 책 읽어 주기 교육을 시킴으로써 아이와의 유대감도 높여 준다.

이때 함께 교육받은 엄마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해 품앗이 공동육아로 발전하게 된다. “가장 좋은 선생님은 엄마라고 하잖아요. 요즘 엄마들은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육아에 자신 없어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데, 결코 아이들이 행복한 방법은 아닐 거예요. 품앗이 육아는 엄마들이 직접 돌아가면서 각자 가진 작은 재능을 발휘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죠. 엄마들에게 자신감을 주고, 사교육에 기대지 않고도 아이를 잘 키우는 모델이 될 수 있어요. 또 공동책임으로 아이들을 키우면 이웃간 교류도 활발해지고 서로 돕고 사는 좋은 문화로 정착될 수 있죠.” 순천 기적의 도서관 허순영(52) 관장의 말이다.

주부들, 자원봉사 통해 자아실현
기적의 도서관이 어린이에게만 행복을 선물한 것은 아니다. 재욱이 엄마 김영남씨가 출산 한 달 만에 도서관으로 돌아온 진짜 이유는 뭘까? 시부모님을 모시며 갇혀 살다시피 하던 그녀는 시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오히려 허탈하고 우울해진 심리를 도서관에서 극복했다고 털어놓았다.
“도서관이 그립고, 도서관 사람들이 보고 싶고, 새로운 강의도 너무 듣고 싶었어요. 재욱이 낳고 한 달 동안 쉰 것 말고는 정말 매일 개근하다시피 했죠. 작가 선생님들도 만나고, 동화구연도 배우고,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게 진짜 좋아요. 작지만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얼마나 뿌듯한지요. 봉사도 어차피 할 거라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서울까지 가서 북아트 자격증을 따와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아이들과 같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아이들에게 방향 제시를 해 줄 수 있다는 게 흐뭇하고 보람 있어요. 이런 게 봉사의 기쁨인 것 같아요. 도서관이 없었다면요? 어휴, 생각할 수도 없어요.”

자원봉사를 통해 끝없이 배우고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것이 즐겁다는 영남씨는 현재 순천 기적의 도서관 자원활동가 회장을 맡고 있다. 순천 기적의 도서관은 지금까지 500명이 넘는 자원활동가를 배출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봉사자도 90명이 넘는다. 도서관이 생기기 전에는 ‘세상물정 모르고 집에서 살림만 했던’ 그녀들이 도서관에서 찾은 기적은 뭘까?

“초창기에는 직원들과 똑같이 오전 8시에 출근해 하루에 12시간씩 일했어요. 그러고도 밤이 되면 빨리 아침이 오길 바랐죠. 도서관에 가고 싶어서요. 왜냐하면 내가 만들어 가고 내 손을 필요로 하는 내 서재이자 내 거실이거든요. 사소한 문제라도 생기면 내가 나서 해결하면서 느끼는 보람도 있고, 또 사람들과 부닥치는 과정에서 남들과 ‘다름’을 인정하게 되니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워질 수도 있었던 것 같아요. ”

초대 자원활동가 회장 윤해경(50)씨는 주인의식을 갖고 도서관 일에 참여하면서 인간적으로, 엄마로서도 성숙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녀 역시 독서치료·북아트·미술강좌 등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교육을 받아 마을의 작은 도서관 운영자로 진출하기도 했고, 현재 소외 지역을 찾아가 동극 공연 등 여러 가지 이벤트를 열면서 책 읽어 주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강사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이렇게 의욕적인 자원봉사자들을 더욱 결속시키고 이들에게 역할모델을 제시한 구심점이 있었으니, 바로 허순영 관장이다. 2003년 당시 ‘느낌표’ 방송을 보고 주최 측에 어린이도서관의 이상적인 모델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낸 것을 계기로 기적의 도서관 구상 단계부터 주도적 역할을 해 왔다. 그녀 역시 전업주부로서 우울증을 겪다가 책을 통해 세상으로 뛰쳐나온 케이스. 어릴 적부터 작가의 꿈을 간직해 왔기에 처음에는 논술학원을 열어 아이들을 만나게 됐는데, 공부에 쫓겨 행복하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에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들어 민간 어린이도서관을 열게 됐단다. 그러면서 어린이도서관에 대한 나름의 비전을 키워 오다 기적의 도서관과 기적처럼 만나게 된 것.

그녀는 존재 자체로 역할모델이 됨과 동시에 자원봉사자 엄마들이 다양한 교육을 받고 자신의 취향을 발견해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줬다. 많은 엄마가 독서지도사, 사회복지사, 방과후 선생님, 도서관 운영자 등 전문인력으로 키워졌다. “저희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자질을 키운 사람들이 마을 단위 작은 도서관의 운영자로 가기도 하고, 학교 도서관으로 진출하기도 하죠. 할머니 자원봉사자들도 곱게 화장하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오셔서 책 읽어 주기를 진행하시거든요. 무대에 선 것처럼 설렌다며 좋아하시고 덕분에 다들 10년씩은 젊어지셨다고 해요. 동화구연작가 자격증을 따신 분들도 있고, 치매병원 돌보기로 발전해 동년배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 주러 다니시는데, 할머니들이 바깥 활동을 하시면서 갖게 된 자부심이 대단하시답니다.” 허 관장은 기적의 도서관 자원봉사자들이 순천시 전체의 독서문화 환경을 확 바꾸는 중요한 핵심 인력이 됐다고 자부한다.

115억 들인 대형 도서관 내년 개관
이런 기적은 도서관 안에만 고여 있지 않았다. 기적의 도서관 이후 순천시는 커다란 ‘도서관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기적의 도서관에 가기 힘든 소외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시 전체에 도서관에 대한 요구가 폭발한 것. 이에 순천시는 2005년부터 10개 마을씩 공모를 받아 ‘순천시민 누구나 책을 읽고 싶으면 10분 이내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갈 수 있도록’ 1㎞마다 하나씩 ‘작은 도서관’을 세우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목표는 2년 전 이미 달성했다. 현재 순천시에는 기적의 도서관을 비롯한 큰 도서관 5곳과 마을 단위의 작은 도서관 43곳이 운영 중이다. 시민 6000명당 도서관 한 개인 셈이다.

‘책 있는 마을회관’ 개념인 작은 도서관은 공모 과정부터 마을 전체가 뭉치고 참여를 활성화하는 계기가 됐다. 도서관은 더 이상 개인주의적인 학습 공간이 아닌, 주민들이 정보 교류를 위해 모여드는 커뮤니티 공간이 됐다. 도서관에 대한 주민들의 의식 자체가 바뀐 것이다. 기적의 도서관 자원활동가 초대회장 윤해경씨도 ‘하날다래 작은 도서관’을 운영한 경험자다. “작은 도서관은 사랑방이죠.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에요. 저는 책 읽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서관에서 마음껏 간식도 먹으면서 영화도 보고, ‘도서관에서 하룻밤 자기’ 이벤트도 열고 해서 도서관을 하루에 100명 가까이 이용하도록 끌어냈죠. 맞벌이 가정의 경우에 아이들이 엄마·아빠가 귀가할 때까지 공부하면서 기다리는 장소 역할도 하도록 했고요. 지역 주민들이 책을 통해 서로 가까워지도록 노력했어요.”

철저히 주민의,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도서관으로 운영되는 작은 도서관은 지역 특성을 살린 차별화한 형태와 운영방식을 도입했다. 순천의 역사자료를 집중적으로 모은 생활향토 전문 도서관인 ‘풍덕글마루 작은 도서관’은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부여해 지역 이탈을 막고 지역 문화를 계승하자는 취지를 지닌 특수도서관이다. 비어 가는 구도심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재조성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기획된 ‘한옥글방도서관’도 독특하다. 예술 관련 서적과 함께 규방공예 손바느질, 전통인형 닥종이인형, 한옥과 동양사상 등 한옥에 맞는 각종 문화체험과 전통예술 전시, 국악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실시해 문화소양을 길러 주는 예술전문 도서관이다.

“내년이면 순천대 앞에 115억원을 들인 대형 도서관을 개관합니다. 시민 공영 자전거인 온누리자전거로 도서관들을 순회 탐방하면서 체험하는 관광 연계 프로그램도 구상 중입니다. 2013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면 순천은 세계 최고의 생태정원을 보유한 국제적인 명품 도시가 될 텐데, 이런 국제도시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도 도서관 문화와 콘텐트를 통한 시민교육이 필수적인 것이죠.” 국제도시로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도 도서관을 통한 평생학습기반이 구축돼야 한다는 것이 순천시립도서관 안문수 관장의 말이다.

신문 읽기로 명문대 입학도
올해 전남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한 새내기 대학생 한나라(19)양. 자원봉사에 열심인 엄마를 따라 기적의 도서관이 개관하던 초등학교 때부터 도시락을 싸들고 도서관을 다닌 또 다른 ‘도서관 키즈’다. 나라양은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고 독서와 신문 읽기만으로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이 일대에서 유명하다. 엄마와 함께 도서관을 다니면서 책 냄새, 책 먼지까지 사랑할 정도로 독서를 좋아하게 됐다. 성적도 좋은 편이었던 나라양이었지만 고교 입시를 앞두고 공부 방향을 잡지 못해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 그녀를 구원해 준 게 바로 도서관 독서상담실을 통해 권유받은 신문 읽기. “처음엔 관장님께서 무조건 신문을 읽고 원고지에 칼럼을 베껴 쓰라고 하셨어요. 한참을 그러다가 다음 단계는 제목을 가리고 기사를 읽은 뒤 스스로 제목을 붙여 보라고 하셨죠. 어느 순간 제목을 제대로 맞혔을 때 느끼는 쾌감이 짜릿했고, 그러면서 재미를 붙여 매일 신문 34면을 다 읽게 됐어요. 덕분에 언어영역만큼은 걱정 없었죠. 선생님들도 친구들에게 언어영역은 나라한테 물어보라고 하실 정도였어요.”

신문방송학과에서 언론인의 꿈을 키우는 나라양은 지금도 아르바이트를 통해 번 돈으로 스스로 구독료를 내며 신문을 꾸준히 읽는다고. “아무리 디지털시대라지만 활자로 된 책, 신문이 갖는 힘은 특별한 것 같아요. 도서관을 통해 그 힘을 깨닫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고, 책을 읽고 신문을 읽는 그 아이들이 우리 지역을, 사회를 이끌어 갈 인재로 자라날 거라고 믿습니다.” 허순영 관장의 말이다.

스마트폰·전자책·태블릿PC…. 디지털 극한의 시대다. 이제 곧 아이들이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다닐 필요가 없어질 거라고 한다. 세상의 모든 책이 손 안의 PC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도서관도 곧 사라질까? 인구 27만 명의 작은 도시 순천에 불고 있는 훈훈한 도서관 바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도서관은 책만 읽는 곳이 아니라고. 어린아이가 자라는 곳이며, 청소년들이 사고를 확장하고, 여성들이 자아를 찾고, 아빠가 아이와 친해지고, 이웃이 가족이 되며, 노인들이 젊어지는 곳이라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있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것이 도서관의 기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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