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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 e-메일 3년간 배달, 세상이 따뜻해졌다

권희덕(54·맨 오른쪽) ㈔시세아 이사장이 지난 14일 서울 강남 센트럴시티 밀레니엄홀에서 열린 ‘2010 시세아 디너쇼’에서 공식 주제가인 ‘따뜻하게 안아주세요’를 KBS어린이합창단 출신 학생들과 함께 부르고 있다. 권 이사장 옆은 이 노래 작곡자 추가열씨다. 최정동 기자
지난 14일 오후 7시 서울 강남의 센트럴시티 6층 밀레니엄홀. 검은색 정장 차림의 나경원(47)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검은색 양복 차림 민병덕(56) KB국민은행장이 한자리에 섰다. 먼저 나 최고위원이 이해인 수녀의 시 ‘차를 마셔요, 우리’를 낭송했다.

최진실 목소리 연기했던 성우 권희덕씨의 특별한 선물

“오래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싶거든 차를 마셔요, 우리… 조용히 차를 마시는 동안 세월은 강으로 흐르고 조금씩 욕심을 버려서 더욱 맑아진….”

능숙한 나 최고위원의 시낭송이 끝나자 민 행장이 오세영 시인의 ‘원시(遠視)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시가 물결치듯 장내에 흘렀다.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시세아 디너쇼 오프닝 무대에서 시를 낭송 중인 나경원(47·왼쪽)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민병덕(56) KB국민은행장.
민 행장과 나 최고위원은 특별한 연이 없었다. 둘을 한자리에 서게 한 건 성우 권희덕(54·여)씨다. 이날 무대는 권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시로 세상을 아름답게(시세아)’ 디너쇼의 오프닝 무대였다. 디너쇼는 국내 최초의 ‘장애인 목욕탕’ 건립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사였다. 나 최고위원은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딸(유나)을 둔 어머니다. 국회 연구단체인 ‘장애아이 위 캔(We Can)’을 7년째 이끌며 장애인의 문화 향유권 향상을 위해 애쓰고 있다. 민 행장은 장애인 목욕탕 건립계획을 듣고는 선뜻 내년에 KB 공익기금에서 거액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권씨는 3년여 전부터 꾸준히 시낭송 파일을 만들어 시세아 회원들에게 매주 수요일마다 e-메일로 배달해 왔다. 지난 15일로 모두 169편을 배달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그간 적립한 회비 4000만원으로 ‘장애인 이동 목욕버스’를 마련했다. 진해·안성·안양·수원 등 전국을 돌며 목욕 봉사를 했다. 앞으로의 목표는 국내 최초의 장애인 목욕탕 건립이다. 맹인 하모니카 연주자인 전제덕씨와 가수 겸 화가 조영남씨도 이런 취지를 알고 축하공연에 선뜻 나섰다. 권씨를 14~15일 두 차례 만나 시낭송 문화사업을 하며 장애인 지원운동에 팔 걷고 나선 사연을 들어봤다.

-장애인 지원에 나선 계기가 뭔가.
“두 가지다. 심장병 어린이 11명을 수술받게 한 경험과 친한 방송국 PD가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사건이다. 2003년 수퍼탤런트와 수퍼모델 선발대회를 벤치마킹해 기획한 게 ‘수퍼보이스’ 선발대회였다. 그 대회 대상 수상자가 성대모사의 달인 배칠수씨다. 그런데 행사를 치르고 보니 500만원이 남았다. 그걸로 차병원과 협의해 심장병 어린이 3명을 수술받게 했다. 2004년 5명, 2005년 3명이 추가로 수술을 받았지만 2006년 기업들이 후원을 거절해 중단됐다. 2004년 친하게 지내던 김모 PD가 미국에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2년 동안 수술받고 귀국했다. 휠체어를 탄 그는 ‘일이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내가 장애인 뮤지컬 ‘위드 러브(With Love)’를 기획 중이어서 연출을 맡겼다. 안무는 가수 강원래씨가 맡았다. 뮤지컬은 막을 올리자마자 내려야 했다. 장애인이 나온다고 일반인들이 철저히 외면했다.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그래서 시낭송 파일 선물을 시작했나.
“그렇다. 내가 워낙 시를 좋아한다. 한 편의 시에는 길이 있고 철학이 있다. 내 목소리가 촉촉해 시낭송에도 딱 맞는다. 시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어떤 결혼식이든 축시를 직접 써서 갖고 가 부모는 물론 신랑·신부, 하객까지 울고 웃게 할 자신이 내겐 있었다.”
실제로 권씨가 이날 행사에서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는 시를 구성지게 낭송하자 객석 여기저기에선 훌쩍거림이 들렸다. 충혈된 눈으로 자리를 뜨는 중년 남성들도 많았다.

-‘시세아’는 어떻게 설립하게 됐나.
“내가 첫 번째 시낭송 파일을 보낸 게 2007년 10월 3일이었다. 처음엔 지인 2000여 명에게 보냈다. 별 피드백이 없었다. 무료라서 그런 것 같았다. 그즈음 고려대·성균관대·한양대 등 대학원 최고위 과정 여러 곳에 다니면서 최고경영자(CEO)들을 많이 알게 됐다. 그분들 생일이나 자녀 결혼식 때 시낭송한 걸 선물했더니 금세 내 팬이 됐다.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어 타깃을 CEO로 하고, 시낭송 파일 구독을 유료화했다. ‘권희덕의 특별한 선물’이란 이름도 붙였다. 앞만 보고 달려온 50대 CEO들에게 뒤를 돌아볼 여유를 주자는 취지였다. 현재 유료회원 300여 명 중 매달 1만원의 회비를 내는 일반회원 100여 명 외에 10만원을 내는 특별회원 200여 명이 있다. 거기서 힘을 얻어 지난 8월 ‘시세아’를 사단법인화했고 최근 지식경제부에 장애단체 등록 신청서를 냈다.”

-장애인 목욕봉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올해 2월 진해의 특수어린이집에 목욕 봉사를 갔다. 시각장애가 있는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늘 그렇다고 했다. 목욕을 시켜 줬더니 배실배실 웃더라.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애가 웃었다’며 놀라워했다. 애가 더듬거리며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할 때 가슴이 울컥했다.”

-장애인 목욕탕을 세우려는 이유가 있나.
“한국에 찜질방이 많다. 그런데 장애인이 들어가 따뜻한 목욕을 할 수 있는 데는 한 군데도 없다. 다른 고객에게 혐오감을 준다고 안 받는다. 돈이 50억원이 들든지 100억원이 들든지,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꼭 이루겠다. 내가 정채봉 시인의 ‘첫 마음’이란 시를 좋아한다. 항상 1월이면 그 시를 낭송한다. 초지일관에 관한 시다. 처음은 미약해도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말씀을 믿는다.”

권씨는 타고난 성우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린이방송국에서부터 목소리로 살기 시작했다. 1975년 동아방송 성우로 데뷔해 숱한 외국 영화의 여주인공 목소리를 도맡았다. ‘카사블랑카’의 잉그리드 버그먼, ‘닥터 지바고’의 라라,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멕 라이언 등은 물론 동방불패의 중성적 이미지인 링칭샤(林靑霞) 목소리도 그였다. 90년대 초엔 배우 최진실씨가 출연한 삼성전자 광고로 유명해졌다. 당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던 광고 카피의 최씨 음성은 실제는 권씨 목소리였다.

“최씨 목소리를 약 10년간 연기하면서 돈도 많이 벌었다. 한때 TV·라디오 광고를 틀면 5개 중 한 개는 내 목소리였다. 어린이부터 노인역, 내레이션까지 두루 잘 팔렸다. 선배들이 ‘돈가방’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외환위기 때 빌딩 짓다가 다 까먹었다.”

-성우라기보다는 문화 사업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항상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가지 치기를 좋아한다. 건강상 이유도 있다. 내가 37세까지 7년마다 한 번씩 네 번 입이 돌아갔다. 안면마비증이었다. 어릴 때는 1주일이면 완쾌됐는데 성인이 되니까 3개월이 걸렸다. 갑자기 성우를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90년대 초 녹음실(‘소리사냥’)을 인수해 운영했다. 지금 시낭송 파일도 거기서 다 만든다.”

-내년 계획은.
“언제나 녹음실에 들어가면 몸이 아무리 고달파도 나는 행복하다. 시는 3D 디지털로는 감흥이 안 온다. 2D 아날로그라야 정감이 살아난다. 1월엔 도종환 시인이 쾌척한 시 16편을 내 목소리로 녹음, CD로 만들어 판매한다. 수익금은 장애인 목욕탕 기금으로 적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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