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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위험을 피해 물러나는 건 내겐 불가능한 일”

생텍쥐페리만큼 우정을 핵심 테마로 삼은 작가도 없다. 1m85㎝ 키에 건장한 체격인 그는 학창 시절 특이한 코의 생김새 때문에 놀림감이 됐다. AP=본사특약
서양과 달리 우리는 사랑보다는 ‘정(情)’을 중시해 왔다. 정은 서양 언어에는 없는 개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을 주요 테마 중 하나로 삼은 서양 문학작품이 있다. 프랑스의 조종사·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지은 어린 왕자(1943)다. 어린 왕자에는 프랑스어의 ‘길들이다(apprivoiser)’라는 동사가 특수하게 사용된다. 우리말로는 ‘정들다’로 번역해도 좋을 뜻을 담고 있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11>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어린 왕자는 1억3400만 부가 팔렸으며 220개 언어로 번역됐다. 초기 반응은 뜨겁지 않았지만 어린 왕자는 생텍쥐페리 작품 중 가장 깊이 있는 책으로 점차 인정받게 됐다. 어린 왕자는 비행기 모터 고장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한 주인공이 소행성 B612에서 온 어린 왕자와 만나 우정·사랑·희망·지식·삶·죽음의 본질에 대해 배운다는 ‘지혜 문학’이자 ‘성인 동화’다. ‘인생은 도정(道程)이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동화 형식으로 돼 있지만 내용이 결코 쉽지 않다. 우수한 번역으로 인정받는 1943년 영문판에도 오역이 다수 발견됐을 정도다. “제대로 보려면 가슴으로 볼 수밖에 없다”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제임스 딘이 좋아한 말)와 같은 작품 중 내용은 지식인층도 사로잡았다.

프랑스어판 『어린 왕자』의 표지.
생텍쥐페리의 정식 이름은 ‘앙투안 장밥티스트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다. 그가 태어난 가문은 비록 몰락했지만 5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뼈대 있는’ 귀족 가문이었다. 어머니 마리 드 생텍쥐페리는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여성이었다. 남편이 병사하고 5명의 아이를 키워야 했지만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그의 친정에는 음악가·예술가가 많았다. 예술가 기질을 타고난 그는 자녀들에게 음악·자연 교육을 시켰다.

어머니 덕분에 생텍쥐페리에게 유년기는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기간이었다. 생텍쥐페리는 13세에 ‘어느 모자의 오디세이아’라는 글로 상을 받고 글재주를 인정받았다. 편집장으로서 ‘메아리(L’<00E9>cho)’라는 학급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다른 많은 대문호의 경우처럼 생텍쥐페리의 모든 작품도 자전적이다. 어린 왕자에서 어린 왕자와 우정을 나누는 조종사도 생텍쥐페리 자신을 투사한 것이다. 그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까지 낙방·실연·궁핍과 같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가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해 준 것은 비행이었다. 조종사가 된 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마치 왕이 된 것처럼 행복합니다”고 쓰고 있다. 생텍쥐페리는 아프리카·중남미로 향하는 우편 항공노선을 개척했는데 당시 비행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비행기의 최고 고도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피해 비행해야 했다. 그는 세 번이나 비행 사고로 죽을 뻔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가 그 어떤 문학사조에도 속하지 않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비행 체험 덕분이다.

생텍쥐페리의 ‘장미’는 부인 콘수엘로
생텍쥐페리는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이었다. 피터팬에게 웬디가 있었고 어린 왕자에게는 소행성에 두고 온 장미가 있었지만, 생텍쥐페리는 웬디를 찾지 못했다. 생텍쥐페리의 주변에는 어릴 때부터 항상 여자들이 있었다. 우선 그와 약혼하고 파혼한 루이즈 드 빌모랭이 있다. 한때 하늘을 향한 그의 집념을 꺾게 만든 계기가 되기도 한 여성이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장미와 가장 근접한 생텍쥐페리의 장미는 애증이 교차했던 아내 콘수엘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가 유혹하고, 그를 유혹한 수많은 여자 있었다. 뉴욕에서 장기 체류하는 동안에도 생텍쥐페리는 그가 사교나 직업상 만나게 된 젊은 여성들과 친구나 연인 사이가 됐다. 러시아의 로마노프가 출신으로 배우였던 나탈리 페일리도 그중 한 명이다. 유럽으로 돌아온 생텍쥐페리는 미국에서 들고 온 어린 왕자로 어떤 여성을 ‘꼬이려고’ 한 적도 있다.

생텍쥐페리는 경제 생활에서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린 왕자에서 기업인은 소유한 것을 세느라 여념이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생텍쥐페리는 항상 쪼들렸다. 유명 작가가 된 다음에는 많이 벌고 많이 썼다. 그는 진료비 지불 문제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도 했다. “친애하는 의사 선생님: 내가 지불해야 하는 돈의 잔금을 한 달에 30달러씩 분할해 지불하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 이상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은행에 잔액이 한 푼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실 출판사 편집자가 선불로 준 돈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를 명상으로 이끈 사막의 침묵
어린 왕자의 배경 중 하나는 사막이다. 생텍쥐페리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사막에 대한 생텍쥐페리의 첫인상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막은 그를 사로잡았으며 사막의 침묵은 그에게 명상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생텍쥐페리는 사막에 사는 주민들을 적대시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려 애썼으며 친교를 맺기도 했다.

생텍쥐페리는 팔방미인이었다. 비행 관련 특허를 10개나 내기도 했는데 일부는 전후 미국에서 실용화되기도 했다. 레이더의 원리 중 하나도 생텍쥐페리가 정립한 것이다. 그는 특허 갱신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했다. 내성적이었던 그는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 마술을 보여 주기도 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삽화도 직접 그렸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편지에 작은 그림이나 만화, ‘그림 수수께끼(r<00E9>bus)’를 그려 넣는 습관이 있었다.

민간 항공기를 주로 조종하던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의 자유를 위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한다. 그는 “전쟁은 모험이 아니라 질병이다”고 말한 평화주의자였지만 전쟁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뒷전에 물러서 있는 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생텍쥐페리는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 모든 정치적 파벌의 프랑스인들을 한데 묶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프랑스가 우선입니다’는 제목으로 방송 연설을 한 적도 있다.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절규했다. “독일이라는 어둠이 프랑스를 뒤덮고 있습니다. 프랑스 민족이 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생텍쥐페리는 프랑스인들을 결집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어린 왕자의 출간으로 왕정주의자라는 말까지 듣게 됐다. 그와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의 관계도 껄끄러웠다. 생텍쥐페리는 권위주의적인 드골을 지지할 수 없었다. 생텍쥐페리는 독재나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인이었다. 어린 왕자가 암시하는 것처럼 생텍쥐페리에게 터키의 혁명가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도 독재자에 불과했다. 생텍쥐페리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드골에겐 심각한 문제였다. 드골 측은 ‘생텍쥐페리는 독일 편’이라는 의혹을 공공연히 제기했으며 상심한 생텍쥐페리는 과음에 빠지기도 했다.

생텍쥐페리가 미국으로 간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가를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바브나무(baobab tree)’ 세 그루는 추축국인 독일·이탈리아·일본을 상징한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생텍쥐페리를 ‘참견꾼(interloper)’으로 간주했다.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죽음 예고
어린 왕자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다. 생텍쥐페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삶은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풍요롭게 되고, 우리들은 여러 해 동안 나무들을 심는다. 그러고 나서는 죽음이 우리가 한 일들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우리가 심은 나무는 잘라 버리는 시절이 온다.” 생텍쥐페리는 아버지와 동생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일찍 죽음과 대면했다. 조종사 동료들도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났다.

동생의 죽음에 대해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회상한 바 있다. “나는 14세 때 처음으로 배운 것이 있다. 그때 내 동생은 며칠 전부터 거의 살 가망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어느 날 새벽 4시쯤에 그의 간호사가 나를 깨웠다. ‘동생이 찾고 있어요’. ‘아픈가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나는 급히 옷을 입고 내 동생에게 간다. 그는 평상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죽기 전에 형한테 말을 하고 싶었어. 나는 곧 죽을 거야’.”

“나는 죽은 것처럼 보일 거야, 사실은 아니지만 말이야.” 어린 왕자가 비행사에게 살짝 일러 준 말이다. 죽음을 앞둔 평온함은 생텍쥐페리가 사망하기 몇 년 전부터 그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였다. 자신의 동생이나 어린 왕자처럼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죽음을 친구들에게 예고했기 때문에 친구들은 그의 실종 소식을 듣고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1942년부터 안녕을 고하고 있었다.

1944년 7월 31일 생텍쥐페리는 미국산 쌍발기인 라이트닝 P-38을 개량한 정찰기를 몰고 코르시카의 비행장을 이륙했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레이더 스크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죽음을 예고했기에 자살설이 제기됐다. 프랑스 사람들의 충격이 컸다. 생텍쥐페리는 2002년까지 프랑스 50프랑 지폐를 장식하기까지 한 국가적 영웅이었던 것이다.

한 어부가 1998년 생텍쥐페리의 신분 인식 팔찌를 발견했다. 2000년에는 정찰기의 잔해가 발견돼 2003년 인양됐다. 잔해가 발견된 곳이 원래 목적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정찰기가 수직으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돼 자살설이 힘을 얻는 듯했다. 2008년에는 그가 독일 공군에 의해 격추됐다는 주장이 제기됐으나 독일·프랑스 측 조사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 일반적인 경우(Saint-Exup<00E9>ry)와 달리 하이픈(-)을 빼고 ‘Saint Exup<00E9>ry’라고 썼다고 한다. 하이픈을 빼면 ‘성(聖) 엑쥐페리’가 된다. 우리는 어린 왕자에서 어쩌면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했던 ‘성인 엑쥐페리’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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