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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의 삶은 재즈가 되고, 이들의 재즈는 역사가 됐다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의 한 장면. ‘한국 재즈 1세대 밴드’는 홍익대 인근 재즈클럽 ‘문글로우’에서 매주 목요일 연주를 한다. 이동기의 클라리넷 독주에 다른 멤버들이 리듬을 맞추고 있다. [이써씬픽쳐스 제공]


늙음은 낡음일까. 이 불경한 물음이 파릇한 젊음에겐 진실인 듯 여겨질 테다. 그러나 서둘러 답하진 말자. 여기, 근사한 어떤 늙음이 있다.

 9일 오후 서울 홍익대 주변 클럽 ‘문글로우’. ‘한국 재즈 1세대 밴드’의 공연이 펼쳐졌다. 평균 나이가 일흔을 훌쩍 넘는 늙은 밴드의 연주다. 백발의 뮤지션이 빚어내는 재즈에선 농익은 향기가 진동했다. 이들이 들려주는 ‘웬 유 위시 어폰 어 스타(When You Wish Upon A Star)’ 등 스탠다드 재즈 음악에 중년의 관객들이 빨려 들어갔다.

 이 밴드는 말 그대로 한국 재즈의 1세대들로 이뤄졌다. 1950~60년대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재즈를 익혔고, 반세기 가까이 한국 재즈의 명맥을 이어온 거장들이다. 10년 전부터는 ‘한국 재즈 1세대’란 이름의 밴드를 꾸리고 클럽에서 정기연주를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한국 재즈의 뿌리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 바람이 통한 걸까. 이들 재즈 1세대의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다. 재즈평론가 남무성씨가 연출한 ‘브라보 재즈 라이프(16일 개봉)’다. 1년에 걸쳐 1세대 재즈 뮤지션들의 삶과 음악을 다큐 형식으로 담아냈다. 영화 속에서 은발의 뮤지션들은 한국 재즈의 뿌리를 증언하고, 묵직한 연주도 들려준다. 영화는 연주하듯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듯 연주하며 흘러간다. 음악과 영상이 스미고 짜이면서 한국 재즈의 역사를 담담히 기록했다.

 이날 ‘문글로우’ 공연을 마치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둘러 앉았다. 맥주를 나누며 한국 재즈와 자신들의 음악 인생에 대해 풀어놨다.




다큐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의 출연진. 왼쪽부터 김수열(색소폰)·박성연(보컬)·류복성(퍼커션)·이동기(클라리넷)·최선배(트럼펫)·신관웅(피아노)·김준(보컬) [이써씬픽쳐스 제공]



 “영화 촬영이 어렵진 않았어요. 만날 하는 대로 연주하고 이야기했더니 그게 영화로 나왔더군요. 연기가 아니라 생활이었죠.”(신관웅·피아노)

 실제 영화는 약간의 상황만 주어질 뿐, 재즈 1세대 멤버들의 일상을 그대로 담아내는 데 집중했다. 첫 장면부터가 강렬하다. 앞니가 빠져 트럼펫을 더 이상 불 수 없게 된 강대관의 집에 멤버들이 모인다. 술잔을 나누던 이들이 하나 둘 악기를 꺼내더니 즉석 합주를 한다. 악보도 없이 시작된 연주는 새벽까지 이어진다.

 “즉석연주 장면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시작된 거에요. 재즈는 손가락이 아니라 마음으로 연주하는 음악이거든요.”(최선배·트럼펫)

 이들이 맨 처음 재즈를 접했던 50년대 후반엔 제대로 된 재즈 음반을 접하기 어려웠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LP 판이 유일했다. 류복성(퍼커션)은 당시 미군 부대 주변을 샅샅이 뒤져가며 재즈 음반을 사들였다. “레코드판을 돌려 들으면서 하나하나 채보하는 게 재즈를 익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우리 세대는 스스로 재즈를 배웠다고 할 수 있어요. 레코드판을 따라 한 음 한 음 불어보면서 재즈 이론을 익혔죠.”(이동기·클라리넷)

 그렇게 고집스레 재즈 기둥만 붙들고 살아온 이들, 그러나 곤궁한 삶은 늘 스스로를 짓눌렀다고 한다. 32년째 재즈클럽 ‘야누스’를 운영중인 보컬 박성연은 “카바레에 채용됐다가 재즈 부른다고 쫓겨난 적도 있다”고 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어떤 치들은 대중가요로 달아나기도 했다.

 “돈 좀 벌까 싶어서 (가요 쪽으로) 들어갔다가 결국엔 재즈로 돌아왔죠. 재즈가 제 음악의 뿌리니까요.”(이동기)

 “경제적으론 힘들더라도 재즈를 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 보장도 없지만 그저 재즈가 좋으니까요.”(김준·보컬)

 영화에는 류복성과 고려대 재즈 동아리 학생들이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소주 9병을 비운 실제 술자리를 스크린에 담았다. 한 학생이 말한다. “재즈의 거장이시다.” 류복성의 답이다. “거장은 무슨, 거지지. 난 부자 안 부러워. 재즈 뮤지션이니까.”

 ‘한국 재즈 1세대’의 음악에선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가 들린다. 개인의 음악적 열정은 물론 한국 음악사의 온갖 질곡이 메아리 친다. 그러니까 이들의 늙음은 꼭 재즈를 닮았다. ‘블루노트(재즈 음계)’의 무한운동을 하나의 음악으로 묶어내듯, 일흔에 이른 삶의 애환을 음악으로 녹여내고 있다. 이들에게, 늙음이란 그저 녹여냄의 다른 말인 모양이다. 백발의 재즈 뮤지션들은 “죽을 때까지 함께 음악을 하겠다”고 했다. 브라보, 재즈 라이프!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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