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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27) 경무대의 초조감





다음날도 아이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 경무대는 참담했다



1956년 경무대의 모습이다. 적군의 공습을 피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 위 위장망이 특이하다. 당시 경무대는 장소가 비좁아 여러 사람이 함께 식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52년 12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인들은 이곳 응접실에서 방한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경무대 방문을 하루 종일 기다렸다.





당시의 경무대는 지금의 청와대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정문을 들어선 뒤 경무대 현관으로 들어가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 외빈을 접견하는 응접실이었다. 그 응접실 또한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런 작은 경무대 응접실에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백두진 국무총리와 정부 각료, 나를 비롯한 3군 참모총장이 다시 모였다. 비서와 그 수행원들까지 합치면 50명 정도가 응접실에 가득 모여 있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한국을 떠난다고 알려진 12월 4일의 오전이었다. 정확한 시간은 지금 기억에 없다. 여하튼 우리는 그렇게 오전에 경무대의 응접실에 모여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이야 당시에도 세계적인 국가였지만 대한민국은 그렇질 못했다. 아이젠하워의 동정을 겨우 얻어 들을 수 있는 곳이 한국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관이었고, 그 외에는 미 8군이 전부였다. 그러나 미 대사관을 통한 교섭은 계속 순조롭지 못한 분위기였다. 하루 전에 있었던 중앙청 앞 광장의 ‘사건’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는 한 번 경무대를 방문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강했다. 점심 무렵에 접어들 때까지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당시 경무대에서 식사를 하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에서 외빈과 함께 식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있다고 하더라도 극히 소수의 손님만을 초대해 간단하게 식사하는 정도였다. 경무대를 방문한 사람의 숫자가 많을 경우에는 그런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장소가 좁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2월 4일 오전에 경무대 응접실에 모여 있던 우리는 삼삼오오 흩어져 정문 밖으로 나가 점심을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경무대를 방문할 경우에 대비해 육군 군악대를 미리 대기시켜 두고 있었다. 그러나 나도 점심때가 되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응접실에 같이 기다리고 있던 일행 몇 사람과 밖으로 나가 점심 식사를 했던 것 같다. 다시 경무대로 돌아왔지만 미국 측으로부터는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이러다가 어제의 사태가 다시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반나절 이상을 기다리던 다른 요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으로부터 반가운 기별이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런 상태로 계속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일종의 고역(苦役)이었다. 마음속으로도 미국에 대한 원망, 아직 보잘것없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떠올릴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백두진 국무총리가 침묵을 깼다. 오후 3시를 넘어선 시각이었다. 백 총리의 목소리가 응접실의 그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울렸다. “김 시장, 당신이 다시 한번 가서 알아보는 게 좋겠어.”



 호명된 사람은 김태선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미국에 유학을 했던 사람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문 학력이어서 정부 내에서는 ‘미국통’으로 통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영어도 잘하고, 미 대사관 사람들과도 깊은 교분이 있었던 그에게 아이젠하워의 경무대 방문을 이뤄내라는 중책(重責)이 떨어진 것이다.



 그는 백 총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무대 응접실 문을 나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머물고 있던 동숭동의 미 8군 사령부를 찾아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일이 성사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다시 응접실 밖에서 준비 중인 의장대 상황을 점검했다. 다시 응접실로 돌아와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에 김태선 시장이 돌아왔다. 그러나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미 헌병들이 동숭동 사령부 정문에도 들여보내지를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풀이 죽어 있었다. 표정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맡은 임무를 시도해 보기도 전에 문전박대(門前薄待)를 당하고 온 셈이니 그의 표정이 침통하지 않으면 더욱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응접실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짓을 하면서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없었던 당시 대한민국의 처지를 생각하는 눈치들이었다. 암울한 침묵이 응접실을 누비고 다녔다. 한동안 그런 분위기가 이어졌다. 다들 뾰족한 수가 없어 답답해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그런 침묵을 갈랐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이 대통령은 일어나서 아주 어두운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백 총장, 자네가 한번 다녀오게”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이 내게 쏠렸다. 아무래도 당시는 전시(戰時)였다. 다른 모든 경로에 비해 전시 중에는 군의 채널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대한민국의 체면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각하, 알겠습니다. 제가 다녀 오겠습니다”라고 말을 한 뒤 응접실 문을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 지프에 올라탔다. 나는 운전병에게 “동숭동 8군 사령부로 가라”고 지시했다. 지프가 경무대 정문을 빠져나왔다. 경무대에서 동숭동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지프 앞자리에 탄 내 생각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무슨 말로 설득을 해야 아이젠하워가 경무대를 방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대한민국의 체면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솔직히 답이 잘 떠오르지를 않았다. 미국은 우리를 지원하는 나라였고, 대한민국은 그 힘에 의지해 가까스로 적군을 막아내고 있던 처지였다. 그래도 명분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명분을 들이대야 아이젠하워를 설득할 수 있을까를 마음속 깊숙이 고민하고 있었다. 지프는 어느덧 동숭동 사령부의 정문에 다가서고 있었다. 오후 4시를 조금 넘어서였다. 정문을 지키던 헌병들이 문 앞으로 다가서는 내 지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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