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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비사-김대중 ①] '호남사투리 고치라고요? 그건 내 정체성인데… 싫소'

김대중은 어떤 인물이었나?

국가 ‘환란’에서 구하고 IT강국 초석… ‘비주류 정치’ 성공시대 열어

월간중앙 이 사회에는 중심부(center)에 속한 사람들(주류의 주류)이 있는가 하면 중심부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주류의 비주류)이 있고, 중심부에 속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비주류의 주류)이 있는가 하면 먹고살기 바빠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는 사람들(비주류의 비주류)도 있다. 후광(後廣) 김대중(金大中)은 출생·성분·학벌·인맥·지역 등에서 비주류의 주류 정도에 해당하는 주변부(periphery)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중심부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주변부 또는 변두리 출신은 개인적으로 흔히 사법고시나 사업 등을 통해 중심부에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놀랍게도 자신이 속한 주변부 자체를 중심부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해방 후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몇 번인가 낙선한 끝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적어도 3공 중반이 될 때까지는 그런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목적이 이끄는 삶이 분명해지면서 그는 나라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자면 최고 권력이 필요했다. 그의 대통령 꿈이 태동된 배경이다. 하지만 그 꿈이 밖으로 표출된 순간부터 그는 십자포화를 받기 시작했다. 혁명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진보적 정책을 들고 대통령에 출마해서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과격 인물로 몰렸고 용공으로 낙인 찍혔다.

지난날 이승만(李承晩)의 위협적인 선거 상대였던 조봉암(曺奉岩)이 간첩죄로 몰렸던 것처럼 그 또한 현상(status quo)을 뒤흔든 괘씸죄로 몰렸다. 이후 구속 당시에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국외로 쫓겨나기도 했으나 오히려 망명생활을 통해 국제적 거물이 되어 돌아왔다. 고난을 축복으로 바꾼 그의 의지가 놀라웠다. 그는 색깔론 이외에도 ‘거짓말쟁이’ ‘권모술수의 대가’ ‘지역감정 이용자’ ‘대통령병 환자’ 등 온갖 야유와 정치적 냉소 또는 혐오를 받으면서도 대선 4수 만에 대통령이 되었다. 소수 정권이었다. 그 때문에 IMF 환란을 수습하고 IT산업을 일으켰으며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성과를 보였음에도 집권 내내 다수파에게 휘둘려야 했다. 지지 기반인 진보세력의 뿌리가 깊지 못했기 때문이다. 두 차례 군사정권을 거치면서 생성·증식된 진보세력은 소리만 요란했지 실제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여기에 호남세력을 덧붙인 것이 그의 지지 기반이었다. 충분하지 못했다. 그래서 주변부를 중심부로 만드는 일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지지 기반을 바탕으로 제2기 진보정권이 탄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다. 분열과 불협화음 속에서도 진보진영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대중과 4대 콤플렉스

흔히 김영삼(金泳三)을 김대중의 라이벌이라고 한다. 일단은 그렇다. 그러나 자료를 좀 더 섭렵해보면 그는 두번째 라이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라이벌은 박정희(朴正熙)였다. 재미있는 것은 박정희의 마음의 라이벌이 김대중이 아니라 김일성(金日成)이었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라이벌이 있었다. 이 세 번째 라이벌은 주변부를 중심부로 만들고 싶은 그 자신의 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난이 박정희에게 그런 역할을 했던 것처럼 성취 동기 면에서 그에게 영향을 준 4대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출생 콤플렉스였다.

1923년 전남 하의도에서 아버지 김운식(金云式)과 어머니 장수금(張守錦←張鹵島)의 4남3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는 것이 공식기록이지만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의 기록에는 그 출생 내막이 좀 더 복잡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다 무시한다 하더라도 그가 서자였던 점은 그 자신이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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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추협 공동의장 시절인 1987년 서울 동교동 자택에 연금된 김대중 씨가 담장에 기댄 채 외신기자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두 번째 콤플렉스는 학력이다. 마을 서당에 다닐 때부터 장원을 했었다는 그는 하의보통학교→목포제일보통학교를 거쳐 목포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재학 시절 작문과 역사를 좋아했던 그는 1943년 “만주의 건국대학에 진학할 예정이었으나 일제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NHK 구성<金大中自敍傳>, 1999) , 곧 전남기선주식회사 경리담당 사원으로 취직했다.

그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이 얼마나 컸던지 20대로 다시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하고 싶으냐는 한 TV 사회자의 질문에 그는 “정상적으로 대학생활을 해보지 못했던 게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정도다.(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1997)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탁마했다. 부인 이희호(李姬鎬)의 회고에 따르면 결혼 전의 “그때에도 촌음을 아껴가며 많은 독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이희호, <나의 사랑 나의 조국>, 1992) 훗날 도합 14개의 (명예)박사학위를 따게 된 것도 학력 콤플렉스와 무관하지 않다.

세 번째 콤플렉스는 출신 지방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그의 마음은 박정희와 부딪힌다. 대통령 박정희가 “영남민에게 우월감을 부추기고 호남민에게는 열등감을 조장함으로써” “호남사람은 마치 천형의 죄인같이 기피당하고 차별되었다”는 것이다.(김대중,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 자유당 때만 하더라도 경상도 사람이 전라도에서, 전라도 사람이 경상도에서 당선되는 사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1971년 대선을 치르고 난 직후 한 유력 신문은 “이번 대통령 선거에 있어 지역감정이 현저히 드러나 경상도는 박정희 후보에 거의 몰표를 던졌고, 호남은 김대중 후보에 다수 표를 던진 것은 우려할 만한 경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지역감정은 5·16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다”는 사설을 싣고 있다.(<동아일보>,1971년 4월 28일)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에는 지역감정 문제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 글을 통해 보면 김대중 역시 지역감정의 수혜자였음을 알 수 있다. 호남으로부터 다수 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집권층은 역으로 그를 지역 감정의 유발자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호남의 몰표를 받는 대가로 타 지역의 표를 받지 못하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는 역시 지역감정의 피해자였다. 대선 때마다 호남 고립화로 발목이 잡힌 그는 호남 사투리를 교정해보라는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한두 번 시도해보았으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투리도 쓰지 말라면 내 정체성을 부정하라는 것입니다” 하고 거절한 일이 있다.(이희호, <동행>, 2008) 그만큼 지역감정은 그의 마음의 상처였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나는 목포에서 태어나 강원도에서 국회의원이 됐고, 이북 출신 며느리를 맞이했다. 또 내가 김해 김씨 후손이니 나야말로 경상도 사람이다”라고 언급한 일도 있다.(<월간조선>, 1980년 6월호)

네 번째는 그를 더욱 곤경으로 몰고 간 레드 콤플렉스다.

김대중과 레드 콤플렉스
“일본놈들이 우리 독립운동가를 뭐라 그랬습니까?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후테이센징이란 개망나니란 뜻 아닙니까?”(<월간조선>, 1985년 4월호) 하고 자신에 대한 용공 낙인을 ‘후테이센징(못된 조선인)’ 에 대비시킨 김대중의 울분을 읽다 보니 일본의 혐한 네티즌이 떠오른다.

일본의 2ch 사이트에 혐한들이 올린 글을 읽어보면 그야말로 날씨만 나빠도 ‘춍’(한국인) 탓이라는 식인데, 이와 비슷하게 무슨 일을 하기만 하면 욕을 먹던 김대중을 지금도 ‘빨갱이’로 매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럼 그런 구석이 전혀 없는데 그랬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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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목포상고 시절 학예회에서의 김대중(아랫줄 왼쪽에서 세 번째)

‘새 나라에 대한 희망과 내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그는 장로교 목사 이남규(李南圭)가 1945년 8월 20일 건립한 목포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 후 건준 조직이 인민위원회로 탈바꿈하자 이남규는 순수한 뜻이 훼손되었다며 조직을 탈퇴했지만 김대중은 그대로 남았고, 다음해 2월 출범한 신민당(당수 백남운)의 목포지부 조직부장 일을 보다가 1946년 말 그들과 결별했다.

기간은 2년 미만이었지만 이 짧은 좌익활동이 평생 그의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색깔론의 표적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71년 대선 때부터였다. “그때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을 맹공하며 현란한 웅변으로 선거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이에 놀란 박정희 진영은 색깔론으로 김대중 바람을 잠재우려 했다. ‘김대중이 피리를 불면 김일성이 춤을 추고, 김일성이 북을 치면 김대중이 장단을 맞춘다’면서 김대중을 좌경으로 몰고 갔다.”(김호진, <대통령과 리더십>, 2006)

이때 덧씌워진 용공 혐의는 유신정권이 끝나도 벗겨지지 않았다. 1979년 11월 28일, 계엄사령관 정승화(鄭昇和)는 “김대중은 사상이 좋지 않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고, 그와의 힘겨루기에서 승리한 전두환(全斗煥)의 신군부도 그를 용공분자로 몰아 사형을 선고받게 했다.
그러나 이는 견강부회(far-fetched)였다면서 “80년대 말 미 CIA 출신의 제임스 릴리 주한미대사는 각종 비밀보고서와 경찰자료를 포함한 김대중 관련 기록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후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특파원은 기록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코리아>, 1998) 그럼에도 그의 용공 혐의는 벗겨지지 않았다. 1989년 문익환(文益煥)·서경원(徐敬元) 등의 방북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자 그를 배후인물로 지목하고 용공친북으로 몰아 붙인 것인데 “이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안기부와 검찰이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김호진)

1992년 대선 때는 이선실(李善實) 간첩사건을 터뜨려 김대중 부부와 연관을 짓고 “평양방송이 김영삼을 낙선시키고 김대중을 당선시키라는 대남방송을 하고 있다”는 식으로 도하 신문에 대서특필케 했다. 그러나 대선 후 사실 여부를 따진 남궁진(南宮鎭) 의원의 질의에 안기부장은 “북한방송이 선거기간 중 그런 보도를 한 사실은 없다”고 답했다.(<金大中自敍傳>)

1997년 대선 때는 다시 오익제(吳益濟) 사건을 터뜨려 김대중을 용공으로 몰았다. 이때는 북풍이 먹혀들지 않았으나 그는 툭 하면 용공으로 모는 일에 “수없이 분노하고 좌절했다”면서 “국민들이 김대중이는 과격하다, 용공이다하고 오해할 때는 피눈물이 났습니다”라고 술회했다.(조갑제, <김대중의 정체>, 2006) 용공으로 낙인 찍히는 일이 얼마나 뼈아픈지에 대해 그의 큰아들은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 ‘빨갱이 새끼’라는 말이 가장 울화가 치밀게 했다”고 회고한 일이 있다.(김홍일, <나는 천천히 그러나 쉬지 않는다>, 2001)







▶[정치비사-김대중 ②] 박정희 "DJ만 막으면 여당후보 열 명 떨어져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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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FTU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 동아일보> <뉴욕 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 <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김우중의 대도전> <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 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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