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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문화인물]16세기 동아시아 언어학의 대가 최세진

잠깐 다녀가는 뜬구름 같은 인생 70 노인이(逆旅浮生七十翁)
/ 친한 이 모두 사라진 채 혼자 남아 있구나(親知凋落奇孤躬)
/ 과거급제해 이름을 올린 지도 40년, 그동안 변을 당한 이 몇이던가(登名四紀機更變)
/ 셋 남은 동기 중 또 그대를 잃었으니(餘榜三人又失功)
/ 이제 사대외교 문서를 지을 때 누구와 토론하리오(爲命自今誰共討)
/ 책을 지은 그대는 후세에 도움 줄 공(功)
을 남겼구려(輯書裨後世推功)
/ 슬프구나, 나는 죽은 뒤 아무런 이익을 남기지 않았다(嗟吾後死終無益)
/ 눈물을 동풍에 뿌리며 소리내어 울기를 그칠 수 없구나(淚泗東風慟不窮)


중종 37년인 1542년 최세진(崔世珍)
의 영전 앞에 김안국(金安國)
이 올린 7언율시(七言律詩)
의 만사(挽詞)
‘최동지세진만’(崔同知世珍挽)
은 시작(詩作)
으로 보기에 그다지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다. 고인을 기리는 애절한 마음이 알알이 배어나지도 않고 작자인 김안국 자신의 신세타령이 더 많이 느껴진다. 마지막 구절 ‘눈물을 동풍에 뿌리며 소리내어 울기를 그칠 수 없다’는 대목은 친한 벗을 잃어 눈물을 그칠 수 없다는 것인지, 자신이 쌓아 놓은 업적이 적어 돌이켜보면 슬프다는 것인지 모호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이 작품은 후세 학자들, 특히 국문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한시가 틀림없다. 이 시구 안에 아주 중요한 한 인물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중인(中人)
출신의 언어학자 최세진에 대한 많은 정보가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사대부로부터 천대받던 중인이어서 이렇다 할 기록이 없는 이 16세기 언어학자에 대해 알려는 노력은 이 시 한 수에 매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생에서 살아 온 삶에 이르기까지 현대 학자들은 마치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려는 듯 이 시 한 수에 매달려 있다.

특히 다음 세개의 문구에 주목해 보자. 그렇다면 최세진을 알 수 있는 주요 정보를 접하게 된다. 첫째가 ‘과거 급제해 이름을 올린 지 40년, 그동안 변을 당한 이 몇이던가’라는 대목이다. 그가 변고가 많은 시대를 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천수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이제 사대외교 문서를 지을 때 누구와 토론하리오’라는 대목도 중요하다. 그가 했던 일이 주로 중국에 보내던 외교 문서를 작성했던 사람이며 그렇다면 그의 직업이 역관(譯官)
임을 알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그가 ‘중인’(中人)
신분임을 알게 해 준다.

마지막으로 ‘책을 지은 그대는 후세에 도움 줄 공(功)
을 남겼구려’라는 대목을 보자. 그의 학문적 업적이 빼어남을 당대 사람들도 인정했으며 후세에까지 길이길이 연구될 가치가 있는 연구실적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만사를 통해 알 수 있는 최세진은 중인 출신의 역관으로, 중국과의 외교에서 통역과 번역을 담당했으며, 온갖 정치적 역경 속에서도 괄목할 만한 학문적 업적을 이룩한 인물이다.

중인 출신… 기록 부족으로 후세 학자들 애태워

그의 삶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중인’이라는 신분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대부인 점과 비교하면 특이하다. 조선시대 전체를 통해 최세진만큼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는 중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조선은 양반과 상민, 양인과 천인이라는 양상(兩常)
·양천(良賤)
의 신분구조가 철저하게 지켜졌던 신분제 사회. 중인 출신인 그가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됐다는 것 자체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게다가 그의 관직 생활은 연산군과 중종대인 당쟁과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뤄졌다. 사대부들의 전유물이었던 당쟁·사화의 격랑에 일개 중인이 포함됐다는 것도 관심을 끌지만 힘없는 중인 출신의 관료가 그 격랑을 이겨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만큼 그의 재주가 탁월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가 남겨 놓은 학문적 업적이 더욱 눈길을 끄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최세진이 중인 출신이라는 사실이 일단 후세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한다. 출신이 미천해 출생은 물론 행적에 관한 기록도 거의 남겨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호가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사당도 영정도 묘소도 찾을 길이 없다. 괴산 최씨의 시조라고는 하지만 국내에 괴산 최씨는 기껏 1백50명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중조차 없는 셈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중종실록”이나 야사에 언급된 것이 고작. 행장(行狀·사람이 죽은 뒤 그 일생을 기록한 글)
도 비문(碑文)
도 문집도 없다. 출생연도부터 이론(異論)
이 많은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의 출생과 약력을 보자. 몇가지 이설(異說)
이 있지만, 일단 최세진은 세조 11년인 1465년 역관 최발의 아들로 태어났다. 21세 때인 성종 17년 사역원(司譯院)
역과(譯科)
에 합격했고 38세 때인 연산군 10년 세자 책봉을 기념했던 특별 시험인 봉세자별시(封世子別試)
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왕위를 계승한 다음해인 1507년 중종이 명에 보냈던 사신들과 중국을 다녀온 후 중종의 신임을 얻게 됐다. 10년 후인 1517년 중국어 교과서인 “사성통해”(四聲通解)
를 완성했으며 또 10년 후인 1527년 그를 조선 최고의 어학자 반열에 올려 놓은 “훈몽자회”(訓蒙字會)
를 편찬했다.

이후 중종 31년인 1536년 들어서는 70이 넘은 나이여서 병환이 짙어 관직을 영유하지 못했으면서도 꾸준히 연구업적을 내놓았다. “운회옥편”(韻會玉篇)
“소학편몽”(小學便蒙)
“대유대주의”(大儒大奏議)
등은 그가 70을 넘긴 후 내놓은 저작들이다. 그의 마지막 연구서는 남경의 지도인 “경성지”(京城志)
와 “여효경”(女孝經)
. 그의 나이 76세 때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책을 내고 다음해 2월 유명을 달리했으니, 비록 선비나 유생은 아니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학문에 충실했던, 말 그대로 ‘학자’였다. 조선 연간 ‘최고의 언어학자’로 꼽히고 있으니 ‘대학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의 마지막 관직은 원로들이 정책을 논의하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
.

‘중인’ 신분 넘어선 학자의 세계 펼쳐

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그의 출신 배경이었던 ‘중인’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중인은 말 그대로 양천과 반상의 신분구조에서 중간을 차지하는 신분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의 생업은 주로 기술직이지만 하나의 신분계급으로 묶기에는 한계가 있다. 상급 기술관으로 분류할 수 있는 역관, 의관, 천문관, 지관 등이 있는가 하면 그림과 음악에 종사하던 악생(樂生)
이나 화사(畵史)
등은 천민계급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양반 계급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받았다. 유교적 입장이어서 기술에 대한 차별의식도 강했지만 유한한 관직과 토지를 분점하자니 신분을 계승해 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 양반들은 다양한 차별 장치를 마련해 뒀다. 기술관을 선발하는 ‘잡과’는 문무 관료를 선발하는 문과나 무과에 비해 격이 크게 낮았으며 관직 없이 월급만 주거나 월급 없는 관직을 주는 등 ‘체아직’(遞兒職)
이 고작이었다. 토지를 받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또 한품거관(限品去官)
이라 하여 승진에 한계를 분명하게 명시했고 어느 직급에 오르면 거직(去職)
당해야 했다. 이를테면 직급정년이 있었던 셈. 이들은 직급을 세습했고 결혼도 같은 중인층끼리 해야만 했다.

통역·번역을 담당하는 역관은 비교적 상층부 중인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중인의 한계인 당하관(堂下官)
을 넘어 당상관(堂上官)
의 관직을 얻을 수도 있었다. 당시 당상관에게 부여하는 특전은 상당했다.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심지어 증조 할아버지에게도 벼슬을 추증(追贈)
할 수 있었고 적지만 땅도 얻을 수 있었다. 역관은 의관과 아울러 이처럼 당상관으로의 승진이 가장 쉬웠던 직종이다. 중국 연경(燕京·현 베이징)
을 찾는 사절단인 부연사(赴燕使)
에 합류하려면 당상관 이상의 관직을 가져야 했기 때문에 역관에게는 당상관으로 승진할 기회가 적지 않았다. 능력이 있다면 역관도, 비록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의 출세 요건을 갖췄던 셈이다.

사대부들, 재능 특출한 中人들 경계

사대부들이 특출난 재능을 가진 중인들을 경계했음은 물론이다. 신분적으로 아래인 중인들의 출세를 곱게 보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자칫 중인들의 상층 관직 침투는 선례를 남길 우려도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한정된 땅과 관직을 중인들과 나눠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잘 나가는 중인들이 정(丁)
을 맞았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 당하관의 자리에 눌러 둘 필요가 있었고 당상관으로 나갈 만한 인물이면 일찌감치 파면해야 할 경계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사화가 극심했던 조선 중기 사화는 좋은 해코지의 기회가 됐으며 사화가 아니면 온갖 빌미를 잡아서라도 관계에서 축출하려 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최세진은 시작부터 당파싸움의 희생물이었다. 그가 봉세자별시에서 합격하고 1년이 지난 1504년은 연산군 10년으로 그해 9월 유명한 갑자사화(甲子士禍)
가 있던 해였다. 합격 발표가 있었던 것이 8월이니 합격한 지 2개월도 채 안된 시점에서 조정은 피바람에 휩싸인 것이다. 갑자사화는 잘 알려진 대로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가 발단이 되어 윤씨 살해사건 연루자와 복위 반대자들을 처형한 사건이었다.

물론 이 사건이 막 과거에 급제한 최세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화에 연루됐던 예조판서 이세좌(李世佐)
가 그 특별시험을 주관했으며 최세진을 그가 직접 추천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시험은 “문관이 많이 비었으니 특별시험을 통해 사람을 뽑는 것이 좋겠다”는 이세좌의 건의에 따라 치러져 사화 직후 연산군 일파는 “간신이 자기 사람을 뽑기 위해 시험을 치렀다”며 시험을 무효 처리하고 만다. 최세진의 합격도 무효가 됐음은 물론이다.

과거의 무효 처리, 즉 파방(罷榜)
과 합격증인 홍패(紅稗)
의 몰수는 당시 사대부 뿐 아니라 시험을 치른 중인 기술자들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줬다. 합격 취소 자체도 문제였지만 파방은 향후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까지 몰수됨을 의미했다. 젊은이들의 일생을 단칼에 베어버린 것이다. 이같은 처리는 분명 지나쳤다. 합격자 중에는 대비의 혈족도 있어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조정이 점차 합격자들을 구제하기로 한 것도 한편으로 이해되는 일. 우선 김안국·신상·이완 등 대비나 중궁의 친족들에게 1차적으로 홍패를 돌려줌으로써 세도가들의 반발을 막았다.

하지만 대비의 친족은커녕 미천한 중인 출신이었던 최세진에게 홍패를 돌려줬을 리 만무하다. 등용의 필요성이 있는 합격자들에게는 점차 기회를 준다고 했고 또 몇몇 사람들은 수개월만에 혜택을 받기도 했다. 최세진도 기회를 기다렸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3년이나 기다렸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연산군 13년인 1507년 조정을 비난하는 익명의 서한의 주인공으로 최세진이 지목됐던 것이다. 중형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자칫 피어 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할지도 몰랐다. 이때의 은인이 승지 권균(權鈞)
. 최세진은 투서와 무관하다며 보고서에서 그의 이름을 빼준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역사에 묻혀버릴지도 모를 절대절명의 위기였다.

능력으로 재기한 4전5기의 오뚝이 인생

위기 다음은 기회라 했던가. 투서 사건에 연루될 뻔했던 그는 2개월 후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연산군 13년 명의 사신이 와서 왕을 뵙겠다고 했지만 마땅한 통역관이 없자 최세진을 찾았던 것이다. 중국어인 한문으로 책을 읽고 시를 짓던 사대부들이었다지만 정작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이는 드물었다. 특히 중국 사신의 통역이라면 나라의 명운이 갈릴 수도 있는 중요한 자리. 적절하게 통역 하나 제대로 할 만한 인물이 없었다. 최세진은 어쩔 수 없이 선택된 대타였지만 훌륭하게 통역을 해냈고 결국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것도 임금 앞에서였다. 홍패를 돌려받은 것은 물론이요, 향후 당대 유일의 통역관으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탁월한 언어 능력은 “중종실록”에 그대로 드러난다.
‘영의정 유순(柳洵)
이 가로되 신은 지금 문신 중에서 이문(吏文)
과 한음(漢音)
에 밝은 자는 최세진 한사람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아니면 … 중국에 응답하는 문서를 혼자 처리할 사람이 없으니 심히 염려되는 바입니다. … 원컨대 문신 중 나이가 적고 성격이 차분하여 성품과 도량이 이 일에 잘 맞는 사람을 대여섯명이 넘지 않게 선별하여 최세진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십시오. 수삼년을 기한으로 성과가 있으면 스승과 학생 모두에게 상을 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 책임을 물어 벌주어 권면하고 징계하는 방편으로 삼으십시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쓸 만한 인재가 두세사람 나오지 않겠습니까?’

중종 연간에 대(對)
중국 외교를 거의 혼자 떠맡다시피 했다는 얘기다. 그의 능력이 워낙 출중했던 것도 있겠지만 통역으로 그만을 쓰다 보니 사람을 키우지 못했다는 얘기도 될 수 있다. 영의정 유순은 혹 그에게 병이라도 난다면 중국과의 외교에 심대한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데 우려를 표명한 것이다. 거의 독보적인 수준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중종실록”의 다른 곳에서는 ‘이문(吏文)
을 능히 풀 수 있는 자는 최세진 뿐’이라거나 ‘임금이 가로되… 사대지사(事大之事)
가 매우 중요한데 단지 최세진 한 사람만 있다는 것은 심히 불가하다’는 기록도 있다.

그가 중종의 총애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중종은 잘 알려진대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의해 왕위에 오른 임금이다. 연산군의 폐정으로 명분이야 분명했지만 반정은 어쨌거나 불법. 왕으로서의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의 태도가 중요했다. 만일 명이 책봉을 거절하기라도 한다면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종 초 명으로 가는 사신이 각별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연산군의 사위(辭位)
를 알리는 사신과 중종의 승계를 알리는 승습(承襲)
사신을 보낸 것이 반정 직후인 1507년. 최세진은 중국과의 외교적인 질문과 답변을 얻어 오는 중차대한 임무를 띤 질정관(質正官)
의 임무를 맡고 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명을 찾았다. 그가 성공했던 것은 물론이다.

명저 “훈몽자회”와 “사성통해”는 아직도 연구 주제

질정관은 당상관에 해당하는 품계였다. 당상관이란 이른바 고위 관직의 출발점. 사대부라면 모를까 중인으로서는 분에 넘치는 벼슬이었다. 사대부들의 시기와 질투가 일었음은 당연했다. 그는 이후 모두 다섯차례나 탄핵받는다. 이유도 가지가지다. 1509년 그는 모친상을 당한 후 3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첩을 뒀다 해서 탄핵받았고 1517년에는 그의 수하에 있던 한 여종이 쌀을 갖고 나갔다 하여 탄핵받았다. 당시 그는 여러 궁전에 술을 대고 일본인이나 여진족에게 식물과 직포를 내주는 일을 맡았던 내섬시(內贍寺)
책임자. 1521년 중국에 다녀온 후에도 사대부들은 탄핵의 칼날을 그에게 들이댔다. ‘명이 조선의 처녀를 원한다’는 그의 정보가 삽시간에 조선 전체를 휩쓸었다는 것이다. 기회만 닿으면 그를 몰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실제로 많은 불이익을 당했다. 1509년 첫 탄핵됐을 때는 관직을 내놓아야 했으며 1517년에는 좌천당했다. 나머지 세차례 탄핵은 다른 사람의 간언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그가 다시 일어섰다는 점이다. 죽지 않았고 영구적으로 관직을 박탈당하지도 않았다.

1517∼18년에는 관직 등용 이후 다시 당상관인 질정관이 되어 중국을 왕래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관직을 탐했다거나 다시 일어서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한마디로 조정이 그를 원했다. 파직에 면직에 좌천을 수없이 시켰어도 때가 되면 조정은 그를 다시 부른 것이다.

결국 중인 출신의 학자 최세진이 온갖 시기와 모함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았던 이유는 오직 그의 능력 하나 뿐이었다. 후세 학자들은, 비록 기록에는 없지만, 그가 중인으로서의 한계와 사대부들의 모함을 겪으며 얻게 된 고통을 학문으로 승화시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다른 한편 성군(聖君)
이랄 수 있다. 학자로서의 자질 하나로 온갖 시련을 극복해 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그가 단순히 능력 있는 중인 외교·통역관으로 인생을 마감했다면 아직까지 그를 연구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를 그답게 만든 것은 바로 학문적 업적, 그것도 지금까지 후학들이 연구할 수밖에 없는 숱한 업적을 쌓아 놓은 것이다.

그의 재능이 십분 발휘된 분야는 언어학이다. 이숭녕은 그를 운서(韻書)
연구의 대가로 추앙하고 중국어학에 큰 업적을 남긴 학자로 평가했다. 한 일본인 중국어학자는 그에게 ‘천재적’이라는 수식어를 쓰기도 했다. 조선조 언어 연구에 그만큼 빼어난 업적을 쌓은 학자도 없을 것이다.

중국어 연구와 교습에 평생 바쳐

그는 평생을 중국어 연구와 교육에 바쳤다. 사역원의 회화 강독 교재인 “노걸대”(老乞大)
와 ‘박통사’를 번역하고 이들의 주석서인 “노박집람”(老朴集覽)
을 저술했다. 한자 하나 하나에 훈민정음으로 발음을 표기했고 좌우에 운서음과 실제 발음을 기록하는 집요함을 보였다. 1517년 저술한 “사성통해”는 “노걸대”와 “박통사”에 잘못된 부분이 많다며 이를 교정하고 신숙주가 한자 교습서로 만든 “사성통고”를 보완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것. 글 뜻을 붙이고 음을 추가해 한층 완결성을 높였다. 최근에는 6백년 전의 “노걸대” 원본이 발견됐다 해서 화제를 불러 모으며 “노박집람”이 다시 한번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것은 “훈몽자회”다. 최세진이 어린 아이들의 한자 학습을 위해 지은 이 책은 그 실용성 면이나 독창성 면에서 한자 학습서의 으뜸으로 친다. 한자 학습서로 널리 알려진 ‘천자문’이나 ‘유합’(類合)
은 실제로 내용이 일상생활과 거리가 멀고 학습하기에 불편했다는 것이 중론.

“훈몽자회”는 대표적인 두 학습서의 단점을 보완해 학습 효과를 높이기 위해 만든 것이다. 구체적인 사물을 뜻하는 3천3백60자의 한자를 통해 한자의 음과 뜻을 쉽게 익히고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됐다. 한번쯤 이 유명한 중국어 학습서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무려 4백년 동안 10여 차례나 간행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1527년 첫판 간행 후 1913년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에 의해 다시 간행됨으로써 10판을 넘겼다. 조선광문회 역시 이 책을 중국어 학습서로 썼다 하니 그 생명력이 놀랍기만 하다.

이 책이 특히 주목되는 이유는 단순히 잘 만들어진 한자책에서 그치지 않는다. 글자 하나 하나의 음과 뜻을 한글로 적어 놓았다는 점에서 이 책은 중세 국어사 연구에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훈몽자회” 서문에서 한글 자·모음을 삽입해 한자보다 한글을 먼저 깨우치라고 강조했다. ‘아직 시골에 한글을 모르는 이가 많으므로 이 범례에 따라 먼저 한글을 깨치고 한자를 배워야 한다. 한글은 하루 아침에 이해할 것이니 한글만 알면 스승이 없어도 한자를 능히 배울 수 있다’고 써놓았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의 이념을 가장 잘 살렸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당시는 실용성을 강조했던 것이겠지만 지금 시점에서라면 국어학사에 이보다 더 중요한 사료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문(吏文)
을 총정리한 “이문속집집람”(吏文續集輯覽)
도 그의 특출난 업적 중 하나. 명과 교환하던 특수한 관용공문(官用公文)
한자인 이문은 명대 들어 본격적으로 사용되던 특수한 외교문자였다.

이를테면 통역과는 다른,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만 사용됐던 문자였다. 명이 등장하며 갑자기 사용된 것이어서 조선 전·중기 때만 해도 조선 왕실은 이문에 이만저만 신경썼던 것이 아니다. 자칫 외교문서를 잘못 해석이라도 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종 때부터 이문을 중시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을 정도다. 이문 해독자 전문 코스가 있었을 정도다. 이문의 해석과 활용을 두고 설왕설래할 때 혜성 같이 등장한 최세진은 전무후무한 활약을 펼치며 이문을 총정리했다.
결국 그는 정치 변혁, 권력 향배에 아랑곳하지 않고 중인으로서의 신분을 지키며 몸을 낮추고 오직 연구와 교수에만 집중했던 인물이었다. 그 결과 그는 온갖 모함과 탄핵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남았고 후세 학자들에게 중요한 연구 과제를 주는 동시에 학문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중인 학자로서의 삶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성통해” 서문의 글이다.

‘학식도 별로 없고 문벌(門閥)
도 한미(寒微)
한 내가 이 사회에 도움되는 일은 조금도 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번역학을 가업으로 이어받은 나는 그 유업의 뜻을 독실히 하여 게을리하지 않고 힘썼다. 이제 이 ‘통해’를 만들고 보니 분수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는(以管窺天)
좁은 소견에 거칠고 어수선한 면이 많겠지만 이 몸이 유자(儒者)
의 과업(科業)
에는 들지 못하고 다만 번역학을 교시(敎施)
하는 신분밖에 되지 못함으로써 이 실용 위주의 도서를 편찬한 것이다. 또한 대중의 요구에 못이겨 만드는 척했으나 너무나 많이 고쳐 혹시 전횡과 독선이 두려울 따름이다.’

이재광 이코노미스트 기자·사회학 박사
월간중앙(http://win.joongang.co.kr) 제 287호 1999.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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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오영환 부소장 : oh.younghwan@joongang.co.kr (02-751-5515)
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