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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채소와 넉넉한 해물, 간만 맞춰도 입에 착착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38> 겨울의 맛 김장김치





드디어 김장을 끝냈다. 김장이 끝나고 나면 정말 걱정이 없다는 뿌듯함이 든다. 예전에 엄마와 할머니가, 겨울에 연탄 들이고 김장하고 나면 세상에 걱정이 없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젠 연탄 때는 때도 아니고 김장도 따뜻한 실내에서 하니 예전처럼 힘들지 않은데도, 여전히 김장은 겨울맞이 대행사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연탄 배달과 김장은 모두, 한겨울 난방비와 부식비를 한꺼번에 쓰는 큰 지출이었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연탄 배달을 끝내면 더러워진 한옥 전체를 물청소해야 하니, 낮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전에 끝내야 하는 일이다. 김장도 마찬가지였다. 추운 초겨울 날씨에 바깥에서 이삼 일을 고생해야 하는 일인 데다가, 땅이 얼기 전에 김장독을 파묻어야 하니 초겨울에 날을 잘 잡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대행사이니 김장을 잘 끝내놓고 나면 배가 절로 부르다는 말이 나오는 게 과장이 아니다.



올해 김장부터 나도 절인 배추를 샀다. 어쩔 수 없는 나이 탓이다. 배추를 뽀개는 일, 절이는 과정에서 배추의 위치를 바꾸어주며 소금물에 고루 적셔지도록 하는 일, 모두 꽤 힘이 드는 일이다. 찬 소금물에 손을 담그고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절인 배추를 사니, 이제 김장은 딱 하루면 끝나는 일이 되었다. 정말 거저먹기다.



헤아려 보니 나 혼자 김장을 한 지도 벌써 올해로 25년째다. 승용차도 없던 때였는데, 겨우내 친정집에 김치통 들고 오가는 일이 너무 귀찮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첫해에는 딱 다섯 포기만 했는데, 의외로 별로 힘들지도 않았고 맛도 괜찮았다. 따뜻한 아파트 실내에서 하는 김장을 마다하고, 엄마가 추운 한옥 마당에서 애써서 담근 김치를 구태여 갖다 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해부터 이제 나는 엄마의 김치로부터 독립했다.



김장의 매력은 엔간히 해도 맛있다는 점이다. 이런 말을 들은 내 후배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하고 잘난 척하는 것 같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그건 김장을 안 해봤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정말 김장은 무엇보다 보통 때 담그는 김치에 비해 훨씬 맛내기가 쉽다. 그러니 겁먹지 말고 시도해 보기를 적극 권하고 싶다.



보통 때의 김치에 비해 김장이 맛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료가 좋기 때문이다. 늦여름에 심어 가을 내내 성장하는 배추와 무는 날이 점점 추워지면서 겨울을 나기 위한 영양분을 자신의 몸속에 잔뜩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이 계절의 배추와 무가 가장 달착지근하고 맛있는 것이다. 이 맛있는 재료로 한꺼번에 일 년치 김치를 해놓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다. 배추 맛이 맹탕이 되는 여름에, 그것도 날이 더우면 잘 자라지 않아 고랭지에서 억지로 키워낸 통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김장이 맛있는 이유는 또 있다. 보통 때 김치에는 잘 쓰지 않는 해물을 넉넉히 넣기 때문이다. 감칠맛이란 동물성 단백질의 맛이니, 젓갈과 해물을 많이 넣으면 김치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북 지방의 시원하고 깔끔한 김치에는, 맑은 맛의 새우젓을 기본으로 하고, 멸치젓이나 황석어젓을 달여 맑은 국물만 낸 액젓을 사용한다. 해물도 생새우와 명태가 중심을 이룬다. 특히 달착지근한 맛은 생새우의 양이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비해 호남과 경남의 걸지고 진한 김치 맛을 내려면, 멸치젓이나 갈치젓 같은 걸지고 진한 맛의 젓갈을 탁한 국물과 건더기까지 모두 뒤섞어 넣는다. 어느 해인가 먹다 남은 제주도 자리젓이 있어서 김장에 그걸 털어 넣은 적이 있었는데, 그해 김치 맛은 유난히 화려했다. 해물도 갈치처럼 걸지고 진한 맛의 생선을 넣으면 좋다. 가을에 갈치는 제철을 맞아 아주 맛있는데, 구워먹기에는 지나치게 가늘다 싶은 저렴한 갈치를 잘게 썰어 김치 속에 함께 넣으면 아주 맛있다. 물론 달착지근한 맛을 즐기는 나는, 남도식 김치를 할 때에도 생새우를 넉넉히 넣는다. 그뿐인가. 파·쪽파·갓·생강 등 향을 내는 모든 향신 채소가 모두 제철이다. 그래서 김장은 간만 맞출 줄 알면 된다.



나는 늘 세 가지 김치를 한다. 가장 먼저 두어 포기를 백김치로 담근다. 고춧가루를 전혀 넣지 않고, 무와 배를 채 썰어 파·마늘·생강 등 양념과 버무려 속으로 넣는다. 해물도 넣지 않고, 젓갈은 까나리나 멸치로 만든 맑은 액젓을 쓰면서 소금으로 보충 간을 한다. 젓갈이 전혀 들어가지 않으면 감칠맛이 떨어지지만, 빨간 김치처럼 젓갈로만 간을 하면 백김치의 시원하고 맑은 맛을 낼 수가 없다. 이 백김치는 오래 두면 빨리 무르므로, 소량만 해서 봄이 되기 전에 먹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고춧가루를 적게 넣은 이북식 시원한 김치인데, 개성식으로 키워진 내 입맛에 맞는다. 고춧가루를 적게, 새우젓과 생새우·명태 등을 섞어 슴슴하게 담근다. 버무릴 때에도 양념을 배춧잎의 끝까지 바르지 않고 속 깊이 살짝살짝 넣는다. 고춧가루를 적게 넣었기 때문에, 이 김치는 익으면서 맑은 국물이 시원하게 배어 나온다. 잘 익은 김치의 하얀 줄기는 아삭하여 샐러드가 부럽지 않고, 시원한 국물도 일품이다. 평안도에서는 국물 맛을 내기 위해 쇠고기를 고아 기름을 걷어내고 김장독에 부어 맑고 감칠맛 나는 김치국물을 많이 만든다고 한다. 이것이 한겨울 냉면의 주재료가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남쪽 방식의 걸진 김치를 담근다. 부산 출신인 남편 입맛에 맞춘 것이다. 시어머님 하시는 대로, 무를 채 썰지 않고 갈아 넣고 멸치젓과 갈치·생새우를 넣는다. 여기에 고춧가루를 뻑뻑할 정도로 들어부어 진득한 양념을 만들어 배추에 듬뿍 발라 짭짤하게 버무린다. 이 김치는 익어도 빨간 고춧가루 양념과 배추가 함께 어우러져 맛이 아주 화려하고 진하다.



젊었을 때는 내가 보고 자란 대로 내 입맛의 김장을 했는데, 어느 해인가 남편용 김치를 따로 하기 시작했다. 이 김치를 먹으면서는 남편이 “그래 이 맛이야”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그래도 내 입맛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렇게 가지가지 김치를 하게 되었다. 음식 만들기는 남편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내가 즐겁게 먹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장은 즐겁다.



이영미 ymlee0216@hanmail.net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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