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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 불가능한 돌대가리들을 격렬하게 응징했다”

2010년 3월 30일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의 그레티스게이타 거리. 북대서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곳에 아침부터 차가운 갯바람이 몰아쳤다. 거리는 조용했다. 그 침묵 속으로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오래된 하얀 집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후 집주인인 듯한 사람이 나와 그들을 맞았다. 그들은 “기자”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화산 기사를 쓰려고 왔습니다.” 키가 크고 유난히 얼굴이 흰 사내가 주인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집 주인은 은회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에게서 에이야프얄라요쿨 화산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회색 방한복으로 덮은 몸 속에서 불꽃같은 기운이 눈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주인이 집 열쇠를 건네자 눈처럼 흰 손이 그것을 받아 쥐었다. 그 손이 바로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를 움직이는 손이었다.

폭로 전문 인터넷 사이트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

일행은 집에 들어가자마자 재빨리 커튼을 치고 문을 걸어 잠갔다. 그 후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다. 그 집은 그 순간부터 ‘워룸(War Room)’으로 변했다. 그들은 ‘벙커’라고 불렀다. 대여섯 대의 컴퓨터가 설치됐고, 곧이어 아이슬란드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합류했다.

뉴요커 인터뷰서 “해킹은 피해자 없는 범죄”
작업이 시작됐다. 모두 위키리크스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39·사진)의 지시를 따랐다. 그들이 수행하는 임무는 ‘프로젝트B’. 2007년 이라크 상공에서 미군 아파치 헬기가 조종실에서 찍은 38분짜리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기 위해 편집하는 일이었다. 비디오에는 미군이 최소한 10여 명을 사살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잡혀 있었다. 희생자 중에는 로이터통신 기자도 두 명 포함돼 있었다. 군사기밀인 이 비디오 내용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세상에 공개돼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주요 주간지 ‘뉴요커’는 올 6월 7일자에서 ‘비밀은 없다(No Secrets)’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통해 어산지에 대한 인물탐구 기사를 실었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위키리크스가 미군의 이라크 민간인 사살 동영상을 인터넷에 폭로한 전후 상황을 재구성해 보도했다. ‘완벽한 투명성을 위한 줄리안 어산지의 임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기사는 어산지의 개인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뉴요커 외에 BBC·르몽드·가디언 등 최근의 위키리크스 관련 보도를 토대로 어산지의 삶과 인생관을 추적해 봤다.

어산지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아웃사이더(외부인)’다. 그의 조상은 외부에서 호주로 들어온 이민자로 추정된다. 본인은 어릴 적부터 학교와 사회의 바깥을 맴돌았다. 가장 좋아하는 컴퓨터도 외부에서 침입하는 해킹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성인이 돼서는 권력의 바깥에서 권력의 내부를 폭로하는 일을 하고 있다. 본인도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자기 자신이 아웃사이더로 삶을 대하고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우리(어산지와 친구)들은 영리하고 예민한 어린이였다. 어떤 사회 안의 특정 그룹이 갖는 지배적 문화에 우리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제 불가능한 돌대가리처럼 행동한 이들을 격렬하게 응징했다.” 그가 설립한 위키리크스
도 어산지의 이런 관점에서 탄생한 것이다.

어산지(Assange)라는 이름은 그의 몸 속에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아상(Ah Sang) 또는 미스터 상(Mr. Sang)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이 이름은 19세기 호주 퀸즐랜드주 북쪽에 있는 서스데이섬(Thursday Island)에 몰려와 정착했던 중국인 이민자들이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스데이섬에 이주 온 중국 이민자들의 후손은 호주 본토로 옮겨왔다. 어산지의 모계 조상은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호주로 이주해 왔다. 어산지는 반(半)농담으로 자신의 방랑 기질이 유전자에 들어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의 전화번호와 e-메일 주소는 늘 바뀐다. 그는 또한 ‘잠수 타기’를 좋아하고 자신의 삶과 관련된 사항들을 숨기는 성향 때문에 종종 주위 사람들을 미치게 만들곤 한다.

어산지는 1971년 호주 북부 퀸즐랜드주 타운스빌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은 평탄치 않았다. 유랑극단을 운영하는 부모 때문에 어산지 역시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어산지의 어머니는 ‘정식 교육은 어산지에게 권력에 대한 건전하지 못한 존경심을 가르칠 것’이라고 믿었다. “자녀들의 영혼이 부서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도 말했다. 이사를 자주 다닌 것도 어산지로 하여금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어산지 스스로 “톰 소여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했다. “뗏목과 말을 갖고 있었고, 낚시를 하거나 탄광 갱도 속에서 놀았다”는 것이다.

공부는 학교 대신 집에서 부모한테 교육을 받는 홈스쿨링(재택 교육)으로 대신 했다. 이따금씩 통신수업(correspondence classes)을 받았고, 대학교수들로부터 비공식적으로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스스로 책을 탐독해 지식을 얻었다. 특히 과학에 빠졌다. “제목만 들어본 책들 속에 파묻혀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게 그의 회상이다. 그러면서 책에서 본 많은 단어를 외웠다. 그런 단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게 된 것은 나중 일이었다. 한 마디로 체계도 순서도 없는 교육이었다.

성장환경도 안정되지 못했다. 8세가 되던 해 엄마는 남편을 떠나 음악가와 만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산지의 이부(異父)동생이 태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했고 동생의 양육권을 놓고 법정다툼이 벌어졌다. 엄마는 아이를 빼앗길까봐 어산지에게 “숨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11세 때부터 6년 동안 어산지의 ‘도피생활’이 계속됐다. 음악가 아버지에 대해 어산지는 그가 ‘패밀리’라고 불리는 강력한 이교도집단 소속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단체의 몇몇 소속원들은 의사였는데, 엄마에게 찾아와 ‘어산지를 포함한 자녀들을 종교집단의 지도자에게 넘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집단은 정부 내 든든한 방호막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산지는 누가 엄마의 소재에 대한 단서를 ‘음악가 아버지’에게 제공해주는지 의심스러웠다.

중국인 이민자의 후손일 가능성
도피생활 중 전자제품 가게 근처에 집을 마련한 적이 있다. 어산지는 시간 날 때마다 그곳에 들러 ‘코모도(Commodore) 64’(1982년 출시된 초기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다. 엄마는 주택 임대료가 싼 동네로 이사하면서 아들에게 그 컴퓨터를 선물했다. 어산지의 컴퓨터 재능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발휘되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프로그램을 짜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어산지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는 모뎀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의 컴퓨터는 ‘포털’로 변신했다. 당시만 해도 웹사이트가 존재하지 않던 87년이었다. 하지만 컴퓨터 네트워크와 통신시스템이 충분히 연계돼 숨겨진 ‘전자 세상’을 만드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컴퓨터에 빠진 10대들은 나름대로 요령을 터득하고 전자세상을 들락거릴 수 있었다. 어산지는 자신을 ‘멘닥스(Mendax)’라고 칭했다. 이는 그의 해킹아이디가 됐다. 이후 가장 튼튼한 네트워크에까지 침투하는 능력 있는 프로그래머로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두 명의 해커와 함께 ‘국제 파괴분자’로 알려진 해커 그룹을 만들었다. 그들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있는 컴퓨터 시스템에 본격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미 국방부와 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에도 들어갔다. 어산지는 자신이 쓴 지하운동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해커조직의 문화가 갖고 있는 초기 황금률을 소개했다. 그것은 “침투하는 컴퓨터 시스템에 해를 끼치지는 마라. 시스템 안에 있는 정보를 바꾸지 마라. 정보를 공유하라.” 세 가지다.

그 무렵 어산지는 16세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와 동거하기 위해 엄마와 살던 집에서 나온다. 동거녀가 임신했고 다시 엄마를 찾아갔다. 어산지가 18세가 됐을 때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고 아들을 얻었다.

해킹은 이제 자기 삶의 스릴이 되었다. 디지털 세계를 파고들면서 관련 지식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당국도 그가 만든 해커 그룹 ‘국제 파괴분자’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호주연방경찰은 이 단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해킹 ID ‘멘닥스’로 이름 날려
91년 어산지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캐나다 통신회사 노텔의 주터미널에 침투했다. 결국 어산지는 31건의 해킹 관련 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와중에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그를 떠났다. 그의 집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그를 찾아왔다. 재판을 기다리는 도중 그는 우울증에 걸려 병원을 찾기도 했다.

징역형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어산지는 솔제니친의 소설 제1 원(The First Circle)을 세 번이나 읽었다.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이야기다. 훗날 어산지는 “내가 겪고 있는 상황과 정말 비슷하다”고 술회했다. 어산지는 해킹은 ‘피해자가 없는 범죄(victimless crime)’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운 좋게도 그는 약간의 벌금만 물고 풀려났다.

하지만 마음고생은 심했다. 원래 암갈색이었던 그의 머리카락은 완전히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어산지는 사람들의 투쟁이 ‘좌와 우’ 또는 ‘믿음과 이성’의 투쟁이 아닌 ‘개인과 제도’의 투쟁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카프카와 솔제니친의 제자로서 어산지는 진리와 창의성, 사랑과 동정은 제도적 위계 질서에 의해 타락한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그는 정보 전쟁의 도구로서 폭로사이트를 만들 결심을 한다.

2006년 어산지는 대학가 근처에 자신의 성을 쌓고 작업에 들어갔다. 기발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벽이건 문이건 어디에나 자기가 만들 사이트의 흐름도를 그려놓았다. 잊어먹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컴퓨터 천재들을 불러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그는 도무지 잠을 자려하지 않았다.”
집안에서 그의 일을 도왔던 사람의 증언이다.

이렇게 해서 그가 만든 위키리크스는 4년 만에 ‘폭로 미디어’로 확실히 자리 잡았다. 월급을 받는 직원도 없고 책상도 사무실도 없다. 지휘자인 어산지는 집도 없다. 그는 후원자나 친구들과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다니며 떠돌이 생활을 한다. 어산지는 한때 “요즘은 공항에서 기거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위키리크스를 움직이는 인물이다. 모든 결정은 그가 내린다. 그래서 그가 있는 곳에 위키리크스가 존재한다는 말이 나온다. 동시에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위키리크스 사이트 운용을 도와주고 있다. 오로지 사이트 운용에만 매달리는 사람은 네댓 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도 ‘M’과 같이 이니셜로만 통한다. 온라인상에서 내부 사람과 연락할 때도 암호화된 채팅 서비스를 이용한다.

위키리크스는 하루 평균 30여 건의 제보를 받는다. 이 중 믿을 만하다고 판단되는 정보에 한해 가공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사이트에 올린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상황설명을 덧붙이기도 한다.

자료 안전 위해 전 세계 20여 곳에 서버
어산지는 위키리크스가 폭로하는 파일을 다른 사람들이 없애지 못하도록 만반의 대비를 해놓았다. 전 세계에 20개 이상의 서버를 운영하면서 100개 넘는 도메인으로 콘텐트를 돌리고 있다. 그래서 정부나 어떤 기업이 위키리크스에 올라가 있는 콘텐트를 없애기 원한다면, 인터넷 시스템 전체를 폭파시키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운영비는 기본적으로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위키리크스 설립 취지에 동조하는 몇몇 사람이 ‘미러 사이트(Mirror Site)’를 운영하기도 한다.

위키리크스 사이트는 애초 스웨덴의 인터넷 서비스 공급업자인 PRQ에 서버를 두었다. 이 회사는 법률적 압박과 사이버 공격을 동시에 피하기 위해 스웨덴에서 출범했다. 스웨덴 헌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서다. 이 취지를 살려 고객의 익명성도 철저히 지켜준다. 제보는 PRQ를 거쳐 벨기에에 있는 위키리크스의 서버로 들어온다. 그러고 나서 또 다른 나라로 옮겨지게 조처해 놓았다. 한 쪽에서 폭로내용이 삭제되더라도 다른 곳에서 다시 올릴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다. 서버는 ‘비밀 기술자’들이 작업한다. 이들은 위키리크스의 ‘최고 사제단(high priesthood)’이라 불린다. 암호화된 온라인 채팅으로만 인터뷰에 응한 그들 중 한 명은 어산지와 다른 위키리크스의 멤버조차도 시스템의 특정 부분에는 접속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조치들은 어산지와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접수된 제보가 처리되는 과정도 모두 암호화돼 있다. 또한 이들 제보를 보호하기 위해 위키리크스 컴퓨터는 24시간 내내 수십만 건의 가짜 제보를 컴퓨터 시스템 속으로 쏟아보낸다. 진짜 제보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어산지는 “어떤 은행 네트워크보다도 훨씬 더 안전한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외부 공격 가능성에 대비해 만반의 조치를 해놓는다”고 덧붙였다.

최근 위키리크스는 냉전 시대에 건설한 핵 벙커 안으로 서버를 옮겼다. 스웨덴 반호프사의 피오넨 데이터센터가 그것이다. 이 센터는 지하 30m에 지어진 핵 벙커 안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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