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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실점 15득점, 아시안게임 꼴찌였지만 희망을 건졌다

지난달 21일 중국 광저우 유니버시티타운 메인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여자럭비 조별 리그 경기에서 한국의 정하니(가운데)가 중국의 수비에 가로막혀 저지당하고 있다. 여자 럭비대표팀은 이 경기에서 0-51로 참패했다. 아시안게임 6경기에서 15점을 얻는 동안 239점을 내줬다. [광저우=연합뉴스]
지난달 27일 끝난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금메달 76개로 종합 2위에 올랐다. 외국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땄다.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새로운 이정표였다. 금메달 하나하나가 다 사연이 담뿍 담긴 감동의 연속이었다. 연일 쏟아지는 휴먼스토리에 팬들은 울고 웃었다.

왕초보들의 아름다운 도전, 여자럭비대표팀

하지만 금메달 세상의 밖에도 아름다운 도전이 있었다. 여자 럭비대표팀이 그랬다. 대표팀이 구성된 지 반 년도 되지 않았지만 선수들은 겁 없이 광저우 무대에 올라섰다. 그리고 무참히 무너졌다. 조별 리그 3경기와 8강전에서 187점을 내주는 동안 1점도 얻지 못했다.

그나마 순위결정전에서 싱가포르와 인도를 만나 15점을 낸 게 성과였다. 물론 52실점으로 두 경기 모두 졌다. 참가 8개 팀 중 최하위가 한국 여자 럭비대표팀의 성적표였다. 막상 도전해 보니 ‘1승’이라는 목표는 처음부터 이루기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은 웃었다. 럭비가 좋아, 태극기가 자랑스러워 시작한 그들의 도전은 처음부터 유쾌했다.

여자 럭비대표팀은 지난 6월 급조됐다. 대한럭비협회가 내건 대표팀 선발 테스트 공고에 전국의 터프걸들이 모였다. 하지만 문영찬 여자 럭비대표팀 감독의 성에 차는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체육전공 여대생이었고 개중에는 방송국 PD와 펜싱선수도 있었다. 엘리트 스포츠 레벨에서 경쟁할 수 있는 체격과 운동능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영찬 감독
대한럭비협회는 대표팀 선발을 위해 1년간 준비했다. 문 감독은 다른 종목 선수를 빼오기 위해 이 단체 저 학교를 오가며 굽신거렸다. 럭비협회는 한국 여자 스포츠의 간판인 핸드볼 선수를 탐냈다. 박태웅 대한럭비협회 사무국장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종목인 7인제 럭비는 순발력과 스피드가 생명이다. 축구장만 한 운동장에서 7명이 뛴다. 15인제처럼 수비라인이 겹겹이 포진해 있는 게 아니다. 좌우로 페인팅 모션을 쓰며 돌파를 하면 곧바로 트라이까지 연결된다. 핸드볼의 움직임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럭비 대표선수가 된다고 특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는 대학교는 없다. 실업팀은 언제 생길지 모른다. 누구 한 명 여자럭비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문 감독은 고등학교 체육교사인 대학선배를 졸라 육상선수 한 명을 확보했다. 1년간에 걸친 노력의 유일한 성과였다. 하지만 그 선수도 대표팀 소집 직전 취업이 돼 다른 길로 가버렸다. 문 감독은 “미래를 보장해줄 수 없어 붙잡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한국 여자 럭비대표팀은 이렇게 시작됐다. 대학생 9명, 직장인 2명, 그리고 고등학생 1명. 이전에 럭비를 해본 선수는 2명뿐이었다. 태릉선수촌 입촌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럭비 룰도, 스크럼 짜는 방법도 모르는 ‘럭비 초짜’들은 6월부터 인천과 부산을 오가며 강훈련을 했다. 매일
숨은 턱까지 차 올랐고 온몸에 멍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럭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팀의 막내 채성은(17·인천가림고)에겐 럭비가 욕구의 분출구였다. 채성은은 중학생이 되자 부모님의 반대로 초등학생 때부터 해오던 축구를 관뒀다. 한참 축구의 재미에 빠져있을 때였다. 부모님은 그에게 실내스포츠인 펜싱을 권했다. 지난해까지 펜싱선수로 뛰었지만 좀처럼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이를 딱하게 여긴 부모님은 어느 날 채성은에게 럭비대표팀 소집 사실을 알려줬다. 그 길로 테스트에 등록해 태극마크를 달았다. 멋모르고 시작했지만 이제 재미가 붙었다. 처음으로 돌파에 성공했을 때를 잊을 수 없다. “페인팅 동작을 써가며 상대를 제치는 재미는 안 해본 사람은 모른다”고 말했다. 깜찍한 외모의 채성은은 이미 네티즌들로부터 ‘럭비 얼짱’이란 별명을 얻었다.

채성은은 광저우에서 영광의 상처를 안고 돌아왔다. 태국과의 경기에서 갈비뼈가 부러져 입원
중이다. 하지만 아시안게임으로 럭비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졌다. “이번 대회로 확신이 생겼다. 럭비는 정말 멋있는 스포츠다. 병원에 있으니 너무 답답하다. 빨리 퇴원해 럭비공을 만지고 싶다”는 그는 “얼짱 칭호는 과분하다. 어쨌든 여자 럭비가 많이 알려지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팀의 맏언니 민경진(26)은 어릴 때 이민을 간 미국에서 럭비를 해봤다. 활동적인 그는 격투기 여러 종목을 전전하다 럭비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2008년 교통방송(TBS)의 영어방송(eFM) 개국 멤버로 PD 생활을 하느라 한동안 럭비와 멀어졌다. 지난해 직장을 그만둔 그는 대표선발 테스트 공고를 보자 프리랜서 일을 접고 대표팀에 들어갔다.

주장 이민희(23)는 럭비가 좋아 해외연수까지 다녀왔다. 지난해 8월 한양대 체육과를 졸업한 그는 9월부터 두 달간 홍콩 여자럭비리그에서 뛰었다. 2007년 국내 외국인 여자럭비클럽 ‘서울시스터즈’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읽고 무작정 그 팀을 찾아가 함께 뛰기 시작했다. 그 인연으로 럭비대표팀 초대 주장까지 맡게 됐다. 이민희는 현재 채성은과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 중국과의 경기에서 오른쪽 발목 인대가 파열돼 최근 수술을 받았다.

‘진짜’ 럭비선수가 되기엔 6개월은 턱없이 짧았다. 문영찬 감독은 “태클을 하려면 최소한 1년간 달려오는 사람과 부딪쳐야 한다. 건장한 선수가 풀 스피드로 달려올 때 겁먹지 않고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문 감독은 호통을 치지 않았다.
고려대에서 소문난 호랑이 감독이었지만 럭비 초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이 흐뭇했던 그였다. 문 감독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녁에 숙소 뒤편 주차장에서 따로 훈련을 하더라. 하나라도 더 배우려는 열의가 느껴졌다 ”고 했다.

여자 럭비대표팀은 성적의 아쉬움보다 더 큰 희망을 안고 귀국했다. 아시안게임을 통해 여자 럭비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이들의 좌충우돌 도전기는 여러 매체를 통해 화제가 됐다. 지난 4일에는 지상파 휴먼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럭비 여전사들의 이야기를 집중 조명했다.

박태웅 사무국장은 “취직 때문에 대표팀을 떠난 육상선수가 이제 후회를 하더라. 가정형편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취직을 택했지만, 이제 다시 럭비를 할까 고민을 하고 있다 ”고 전했다.
문 감독은 “강인한 한국 여성이 도전해볼 만한 스포츠다. 여자 축구도 출발은 미약했다. 우리가 이제 여자 럭비를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크게 나쁘지 않은 경기 내용이었다. 체력 등이 강한 좋은 선수를 조금 더 보강하면 얼마든지 다른 나라와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겠다고 느꼈다. 대학<20A9>실업팀이 생겨 체계적으로 육성한다면 핸드볼이나 하키<20A9>축구 못지않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대한럭비협회는 대표팀 강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박태웅 사무국장은 “내년 봄 새롭게 대표팀 선발 테스트를 실시할 계획이다. 이번에는 엘리트 스포츠에서 통할 만한 선수들의 참여를 기대하고 있다. 다른 종목 선수들의 참여를 위해 물밑작업을 적극적으로 벌이겠다. 여자 럭비가 많이 알려져 예전보다 설득작업에 힘이 붙을 것 같다”고 기대했다.

여자 럭비는 2016년 리우데자이네루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초보 딱지를 뗀 여자 럭비대표팀의 꿈은 이제 6년 뒤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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