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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권 예약한 시진핑, 덩샤오핑의 절친 시중쉰의 아들

중국의 차기 내정자인 시진핑(習近平·57) 국가부주석. 그를 중심으로 한 5세대 지도부는 2012년부터 10여 년간 중국을 통치하게 된다. 5세대 지도부의 핵심은 당·정·군 원로들의 자녀 그룹을 일컫는 태자당이다. 여기에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배출한 공청단(共靑團),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정점으로 한 상하이방이 서로 협력하고 견제하는 구도로 전개될 전망이다.태자당의 면모는 막강하다. 선두 주자인 시진핑을 정점으로 리위안차오(李源潮·60) ·왕치산(王岐山·62)·보시라이(薄熙來·61)·위정성이 뒤를 받치고 있다. 군부에서는 류샤오치 전 주석의 아들 류위안(劉源·59) 상장(대장 격)이 두각을 나타낸다. 여성으로는 정치국 위원(25명) 중 홍일점인 류옌둥 국무위원(부총리 격)이 돋보인다.

당·정·군에 포진한 태자당의 간판 스타들

시 부주석의 정치적 성장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하나는 부친의 음덕, 하나는 어느 계파든 받아들일 만한 본인의 포용력이다. 그는 지난 10월 중국공산당 17기 3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움켜쥐고 차기 대권을 확고히 다졌다.시 부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1913~ 2002)은 당 선전부장과 국무원 부총리, 전인대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시중쉰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뿐 아니라 개혁개방 30년의 초석을 다진 덩샤오핑(鄧小平)의 절친한 친구였다. 후진타오 주석이나 원자바오 총리도 시중쉰의 음덕을 입었다고 한다.하지만 시진핑의 유소년기는 질곡의 연속이었다. 제1야전사령 출신인 시중쉰은 펑더화이(彭德懷) 계열로 분류돼 1962년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반(反)혁명분자’로 몰렸다.

시중쉰은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기 전까지 16년간 구금됐다. 문화혁명 때 시진핑은 산시(陝西)성 오지인 량자허로 쫓겨나 7년간이나 죽을 고생을 했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생존하는 ‘융화’의 원리를 터득했다. 부친 시중쉰은 중앙무대에 복귀한 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광둥성 서기로 재직하던 79년 특구 개발 아이디어를 내놓고 선전·주하이 등 4개 특구 건설을 주도했다.79년 칭화대를 졸업한 시진핑은 당시 부총리였던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중앙군사위 비서장까지 겸직한 겅뱌오의 곁에서 시진핑은 군부 인사들과 교류할 기회를 잡았다. 다른 태자당 인사들과 차별화되는 포인트다.

쩡찡홍 스스로 물러나며 시진핑에 길 터줘
더욱이 시진핑의 지방행정 경험은 누구보다 풍부하다. 샤먼시 부시장을 거쳐 2002년 푸젠성 성장을 마치기까지 17년 넘는 세월을 대만과 마주보는 푸젠성에서 생활했다. 당시 그의 상사들은 자칭린 정협 주석, 허궈창 중앙기율위 서기였다. 푸젠에서의 치적은 탁월한 편이 아니지만 상하 관계가 두루 좋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성과보다 인화를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시진핑은 저장(浙江)성 서기, 상하이시 서기(2007년)로 도약해 ‘차기 지도자감’으로 주목받았다.시진핑의 후견인은 쩡칭훙 전 부주석이다. 쩡은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측근으로 90년대 중국 정계를 좌지우지했다. 쩡칭훙은 2007년 중공 16기 당대회를 앞두고 용퇴하면서 자기 자리를 시진핑이 물려받도록 구도를 짰다는 게 홍콩 정치 분석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쩡칭훙과 시진핑은 집안끼리 왕래하며 형제처럼 지내온 사이였다. 홍콩에서 발간되는 월간 ‘둬웨이(多維)’는 “후진타오 주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쩡 부주석이 물러나면서 지도부의 연령 제한을 확립했다고 지적했다. 그 덕에 시진핑은 후 주석의 후계자로 간주됐던 리커창 부총리를 추월해 차기 대권에 다가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리위안차오 당 조직부장, 왕치산 부총리, 보시라이 충칭시 당서기는 태자당의 ‘빅3’로 일컬어진다. 이들은 2012년 18기 당 대회에서 선출될 최고지도부, 즉 정치국 상무위원(9명)에 진입할 가능성이 크다. 정치국 상무위원 중 태자당 몫은 3~5석으로 전망된다. 그만큼 걸출한 경력을 쌓아온 태자당 인사들이 많기 때문이다.가장 유력한 후보는 리위안차오다. 리 부장의 부친은 문혁 직전 상하이시 부서기를 지낸 리간청(李幹成)이다. 리위안차오의 어릴 적 이름은 ‘리위안차오(李援朝)’인데 거기에는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역사가 숨어있다. 부친은 50년 10월 리 부장이 태어나자 ‘항미원조(抗美援朝)’에서 마지막 두 글자를 따 이름을 지었다. 훗날 중국어 발음이 똑같은 ‘위안차오(源潮)’로 바꿨다.

문혁 때 하방을 경험했던 리 부장은 대학 졸업 뒤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한 뒤 당 중앙 대외선전판공실 부주임, 국무원 신문판공실 부주임, 문화부 부부장 등 10여 년간 한직을 떠돌았다. 89년 천안문 사태 때 공청단 일부 간부들이 학생 시위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문책을 당한 것이다.하지만 2002년 후진타오 주석이 집권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 장쑤성 서기로 임명된 그는 후 주석의 국정 어젠다인 ‘조화사회론’을 정책으로 실행했다. 조화사회론의 핵심인 ‘골고루 잘사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지방정부 차원에서 성장 중시 정책을 손보았다. 장쑤성에서 낙후된 북부 쑤베이 지역을 집중 개발해 균형발전을 꾀했다. 리 부장은 공청단과 태자당으로 모두 분류된다. 공청단 경력이 8년이지만 출신성분은 태자당이기 때문이다. 또 상하이방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가 5세대 최고지도부에 무난히 진입할 것이라고 보는 배경이다.

꼼꼼한 실력을 겸한 왕치산 부총리도 급부상하고 있다. 문혁 때 산시성 옌안(延安)으로 하방된 왕치산은 부총리를 지낸 야오이린(姚依林) 일가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는 야오의 딸 야오밍산(姚明珊)과 결혼해 태자당 그룹으로 편입됐다.
시안(西安) 시베이(西北)대를 졸업한 왕은 박물관과 역사연구소에서 경력을 쌓다가 공산당의 핵심 싱크탱크인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로 옮겼다. 장인의 물밑 지원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농촌전문가로 변신한 그는 88년 다시 중국농촌신탁투자공사 총경리로 부임하면서 금융계로 뛰어든다. 이때 그의 업무능력을 높이 산 주룽지(朱鎔基) 당시 총리의 후원으로 중국인민건설은행장, 중국인민은행장을 역임했다. 2007년엔 경제담당 부총리로 승진했다. 그는 최근 원자바오 총리의 후임으로 거론될 정도로 각광받는다.

한때 시진핑, 리커창(李克强), 리위안차오와 함께 5세대의 ‘4대 천왕’으로 불렸던 보시라이 충칭시 당 서기도 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될 유력한 후보다. 보시라이의 부친 보이보(薄一波·1908~2007)와 장인 구무(谷牧)는 둘 다 부총리를 지낸 거물이었다. 82년 사회과학원 석사를 마친 보시라이는 핵심 권력기관인 중앙서기처 연구실과 중앙판공청에 곧바로 배치됐다.

군부는 류위안, 여성은 류옌둥이 선두
이후 보시라이는 다롄시에서 12년간 근무하면서 다롄을 ‘북방의 홍콩’으로 키우며 실력과 경력을 쌓았다. 랴오닝성 성장과 상무부장을 역임한 보시라이의 약점은 ‘인화’라고 지적받는다. 이 때문에 2007년 17대 당 대회에서 강등이나 다름없는 충칭시 당 서기로 배치됐다고 전해진다. 그는 충칭시 서기로 취임한 이후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부패 척결에 앞장서고 있다. 민중 사회에서는 ‘대륙의 포청천’으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중국 지도부 인사들과 원로들은 차세대 지도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평가절하한다는 소문이 들린다.

군부의 태자당 중 한 명인 류위안 상장은 류샤오치(劉少奇) 전 주석의 아들이다. 류사오치는 문혁 전까지 마오쩌둥(毛澤東)의 후계자로 각광받다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덩샤오핑과 함께 숙청당했다. 마오쩌둥 부부와 홍위병의 탄압으로 정치적 몰락과 밑바닥 체험을 겪은 류위안은 어릴 때부터 자신을 단련시켰다는 점에서 시진핑과 동병상련의 감정을 공유하는 인물이다. 류 상장은 82년 공산당 입당 후 허난(河南)성 부성장을 지냈으며 92년 무장경찰 부대로 옮긴 뒤 군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정계에서 군부로 이동한 특이한 경력에 대해 그의 정치적 후견인 양상쿤(楊尙昆) 전 국가주석은 ‘덩샤오핑 시절 군과 지방행정 간에 밀접한 교류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난레이,'태자당 천하')

그는 덩샤오핑을 ‘삼촌’이라고 불렀고 역시 태자당 출신인 리펑(李鵬) 전 총리도 그가 늘 찾아올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군부 내 태자당으로는 이 밖에도 장하이양(張海陽·장전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아들) 청두군구 정치위원 등이 포진해 있다.정치국 상무위원회(9명)에 여성은 한 명도 없지만 25명의 정치국 위원 가운데 홍일점은 류옌둥(劉延東) 국무위원(전 통일전선부장)이다. 류옌둥은 문혁 당시 농업부 부부장을 역임한 류루이룽(劉瑞龍)의 딸이다. 후 주석과는 공청단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공청단 상무 서기(공청단 제2인자)와 전국청련(全國靑聯) 주석직을 넘겨 받았다.

쩡칭훙 전 부주석과는 집안끼리 친분이 있다. 쩡칭훙의 모친 덩류진(鄧六金)이 운영한 화둥(華東)보육원 출신이어서다. 장쩌민 전 주석의 양부가 부친의 동료였지만 류옌둥은 천안문 사태 이후 11년간이나 한직을 전전했다. 공청단의 일부 간부들이 시위대열에 합류한 데 대한 지휘책임을 물은 것이다. 재도약의 전기가 된 통전부장 승진은 후 주석이 취임하면서 이뤄졌다. 홍콩의 중국 정치 분석가들은 “정치국 내 홍일점으로서 류옌둥의 정치적 비중은 작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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