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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碑石)따라 떠나는 서울역사기행

서울길을 걷다보면, 가끔 눈에 보이는 비석들. 서울의 비석은 단순히 사료적인 가치 외에도 당시의 시대상과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서울의 비석을 찾아 그 역사적 가치를 되짚어 본다.



아들의 한이 서린 ‘이윤탁 한글영비’











서울 노원구 하계동 서라벌고교 맞은 편 길을 걷다보면, 높은 콘크리트 옹벽 위 “신령한 비라 쓰러뜨리는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라는 섬뜩한 한글 글귀를 볼 수 있다. 서울에 나타난 투탕카멘의 저주인가 하지만, 이것은 조선 중종 31년(1536년) 문신(文臣) 이문건(1494~1567년)이 부친의 묘 앞에 세워 2007년 서울시 문화재 보물 제1524호로 지정된 ‘이윤탁 한글영비’이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한글 비석이다. 이 비석은 한글로 세워진 4개의 비석 중 유일하게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중세 국어의 서체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주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이 비석에는 당시의 묘비명과 일대기 등이 적혀 있다.



‘묘비를 훼손하지 말라’는 글귀는 기실 사연이 있다. 이 묘비는 당초 양주에 있었지만, 문정왕후의 능 조성 예정부지로 강제수용돼 아들 이문건이 서울로 이전하며 다시는 묘비가 훼손되지 말라는 심정에서 한글로 경고의 글을 적어 놨다. 하지만 ‘이윤탁 한글영비’는 인근의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으로 인해 1999년 원래 자리에서 15m 뒤쪽으로 옮겨지는 아픔을 또 한번 겪기도 했다. 이장하던 날 문중 어른들이 묘역 앞에서 제를 지내며 조상의 넋을 달랜 덕분인지, 이장 후 묘비에서 예고한 것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치욕의 역사와 함께 한 비석

치욕의 병자호란과 삼전도비(三田渡碑)












송파구 석촌호수에는 병자호란시 청에 패배해 한강변 삼전도에서 인조가 항복한 시련의 역사를 되새기는 사적 제101호의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있다. 당시 굴욕적인 강화협정 이후 청태종은 그의 공덕을 자랑하고자 삼전도비를 세우도록 했다. 1639년 남한산성에 포위되어 45일만에 항복한 인조가 청태종 앞에서 세 번 무릎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전도 굴욕의 가슴 아픈 역사만큼이나 비석의 역사도 시련으로 얼룩져 있다. 삼전도비는 국치라 여겨져 1895년(고종32년) 매몰되었다가 일제강점기 다시 세워지고, 광복 후 1956년 주민들이 이를 치욕으로 여겨 다시 땅속에 묻었다가 1963년 홍수로 재발견되었으며, 2007년의 비석 훼손사건 이후 371년만인 올해 4월에야 지금의 자리에 안식을 취하게 됐다. 삼전도비는 비석의 앞면 왼쪽에는 몽골어, 오른쪽은 만주어, 뒷면에는 한자, 3개 언어가 하나의 비석에 동시에 새겨진 유례없는 비석으로도 의미가 크다.















임진왜란, 그리고 중국 장수를 기린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



서대문구 명지대학교 학생회관 뒷동산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1호 양호거사비(楊鎬去思碑)가 있다. 양호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장군이다. 양호를 기리기 위한 비는 모두 4기인데, 헌종 1년에 세워진 것은 서울 대신고등학교에서 발견되었으며, 나머지 3기는 선조31년(1598)~영조40년(1764) 때 만들어졌다.



시대상과 문화를 보여줬던 비석

인사이동, 진급을 알 수 있었던 하마비(下馬碑)














종로구 훈정동 종묘 입구에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 즉 ‘모두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글이 적혀있는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당시에는 관리들이 궁궐, 궁집, 문묘 등 국가 주요시설을 지나갈 때 경의의 표시로 하마비 앞에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걸어서 일을 보러 갔다. 주인이 일을 보러 간 사이 마부들끼리 무료함을 달래느라 잡담을 나누곤 했다. 이때 그들이 모시는 상전이나 주인 등의 인사이동·진급 등에 관한 얘기도 곧잘 나왔기 때문에, 이런 얘기를 가리켜 ‘하마평’이라 했다. 이 단어는 오늘날에도 일상용어로 굳어져 관리의 이동이나 임명 등에 관한 풍설을 의미하고 있다.



조선초기양식의 특징을 보여주는 ‘인조별서유기비’











은평구 구산역 인근에 있는 보물 제1462호 인조별서유기비(仁祖別墅遺基碑)는 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무른 별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은 서인(西人) 일파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인조를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려준다. 이 비석은 숙종이 직접 글씨를 써 세웠으며, 조선 초기양식 전통과 후기 석비양식의 특징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임금, 공신의 업적이 담긴 ‘신도비’(神道碑), 병자호란 때의 영의정에 오르고 임명된 지 열 흘 만에 세상을 떠난 신경진을 기리고자 숙종 9년(1683년)에 세운 ‘신경진신도비’(申景禛神道碑), 명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우의정과 영중추부사를 지낸 ‘정정공강사상묘역’(貞靖公 姜士尙 墓域), 조선 영조 때 오위도총부를 지낸 화산군의 생애와 공적을 기리는 ‘화산군이연신도비’(花山君 李渷 神道碑), 조선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를 회상하며 세운 ‘금암기적비’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 표창하는 ‘선정비’, 을미사변 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장충단비’, 대한제국 나라이름 사용 기념 의미인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 6.25전쟁 중 개화산전투에서 산화한 1,100명 전사자 위로하는 ‘위령비’ 등 수십여 개의 비석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백호 서울시 행정과장은 “관광지나 박물관에 있어 일부러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문화재가 아니라, 우리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비석만 관심 있게 보아도 색다른 역사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디지털뉴스룸=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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