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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다큐 사진의 대가, 후배들 ‘모델’로 서다





“거참, 디카라고 막 찍지 마시오”





대부분의 사진가는 그이 앞에만 서면 덜덜덜 떨며 사진을 찍는다. ‘꼿꼿’ 강운구(69) 선생 얘기다. 사진 동네에서 ‘제 성질대로 다 살았다’고 일컬어지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강운구는 그 꼬장꼬장함으로 세상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꿋꿋’ 강 선생을 멀리하면 안 된다. 강직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따듯하게 감싸안았다. 그의 쓴소리와 단소리가 그리운 후배들이 ‘강 선배’를 찍은 사진을 모아 잔치 마당을 벌인다. 전시제목은 ‘강운구를 핑계삼다’다. 권태균·백승기부터 이창수·최재영까지, ‘강운구 사단’이라 불리는 20여 명의 사진가가 총집합했다.



글=정재숙 선임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강운구가 모르는 강운구가 있었더라고요. 곤혹스럽죠. 뭔 해괴한 사건인가 싶고. 도망갈까 하다가 참고 있어주는 게 나이 든 자의 도리인 것 같아서. 지들은 벌벌 떨며 찍었다지만 난 설설 기며 찍혔다오.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렸다니까.”



강운구 선생은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평소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해 오래 사귄 제자들은 당신 앞에서 감히 사진기도 못 들게 하던 강 선생이 자신의 사진만으로 된 전시회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언제들 그렇게 찍었을까 본인도 궁금하다고 했다.



다음달 21일부터 26일까지 서울 통의동 류가헌(02-720-2010)에서 열리는 ‘강운구를 핑계삼다’는 제목 그대로 강운구 선생을 방패막이 삼은 사진판 선후배 화합의 장이다. 구본창부터 노순택까지, 스무 명 넘는 사진가가 오로지 강운구를 모델로 한 작품을 내놓는다.



강운구가 찍은 사진 하나 없는



강운구 사진전












“참 절묘한 제목 아닙니까. 강운구를 핑계 삼다니. 올봄부터 눈치는 챘어요. 6·25 60주년 기념전 ‘경계에서’를 위한 사전 답사를 갔는데 전부들 나만 찍는 거야. 사실 오랫동안 나를 찍어온 건 1973년 편집자와 사진기자로 만났던 이기웅 열화당 대표거든. 그건 우정의 역사니까 소중하죠. 책도 곧 나올 예정이고. 그래서 내 그랬죠. 그건 이기웅 사장 아이디어를 커닝한 거니 그분도 꼭 모셔라.”



훈훈한 얘기의 시작은 연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운구 선생 작업실에서 연을 맺은 권태균·백승기·이창수 세 사진가가 머리를 맞댔다. 칠순을 맞는 스승을 잔치로 모시고 싶지만 칠순이고 팔순이고 나이 따라 뭐 하는 걸 경멸하는 강 선생 성격을 너무나 잘 아는지라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 이창수씨 재치로 실마리가 풀렸다. 강 선생 자신을 핑계 삼은 사진전을 열면 뭐라 못 하실 거라는 아이디어였다. 강운구를 피사체로 삼는 작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알기에 그만큼 소중한 자리가 될 거라는 계산도 섰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몫은 이창수씨가 맡았다. 불호령을 맞을 각오를 하고 서울 광화문 작업실로 찾아가 머리를 조아렸다. 강운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미술시장에서 각자 헤매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으로서의 대선배 강운구가 소중하다고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때 떨어진 강운구 선생의 한마디, “그러면 개막식 날 찹쌀로 된 시루떡 한 판 해라.” 오케이 한다는 승낙의 표시로 이만큼 멋진 말이 또 있을까.



 원수 아니면 동지가 된 선후배들



“전시회에 내 사진을 낸 사진가들을 보니 대부분 얼굴을 아는 이들이야. 내가 정치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선배고 후배고 느낀 그대로를 스트레이트로 표현해요. 틀릴지라도 내 생각대로 말하는 거지. 사진하는 후배들과 원수가 되기는 아주 쉽죠. 하지만 자기 작품을 본 대로 정직하게 말해주면 오히려 신뢰하는 이도 많아요. 저 양반 아니면 저런 소리 못 듣는다 하면서 말입니다. 근데 말이죠. 이제는 그들도 머리가 허얘요. 후배들이 다 늙어서 부려먹기가 힘들어.”



그는 쓴소리를 잘하는 사진가로 유명하다. 당장 자신을 찍고 있는 사진기자에게 한마디 한다.



“난사(亂寫)하지 마시오. 디지털 카메라라고 막 찍는 것 좋지 않아요. 지우는 것도 힘들고. 정제해서 찍어야죠.”



그는 디지털을 하지 않는다. 디지털엔 오리지널 개념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찍고 나서 컴퓨터로 옮기고 나면 다들 원본은 지워버리죠. 그렇다면 오리지널은 사라지고 복제품만 남는 셈 아닌가요. 거기다가 뻥뻥 튀겨서 크게만 만들어 놓으니 그게 좋은 사진일까요, 난 모르겠어요. 디지털이 콘텐트를 늘린다지만 난 그거 착각이라고 봐요. 땅값 얘기가 아니잖아요. 크다고 비싸고 많다고 좋은 건 아니죠. 큰 건 멀찍이 지나가며 훑어봐도 다 보이지만 작은 건 가까이 들여다보고 깊이 있게 쑤셔봐야 제대로 보여요. 아주 큰 차이죠.”



한번은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이렇게 물었단다. “선생님 사진은 왜 이렇게 작습니까.” 강 선생 대답은 간단했다. “돈이 없어서요.”



밥 사진론 펼친 『강운구 사진론』



그는 지난 10월 펴낸 『강운구 사진론』(열화당)에서 ‘밥 사진론’을 펼쳐 화제가 됐다. 사진의 본령은 사실적 기록에 있는 것인데 지금은 모두들 엉뚱한 음식만 만들고 있다는 질타였다. 쌀(사진)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요리는 밥(기록)인데 이 땅에서는 ‘회화로서의 사진’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새로운 사진으로 퍼졌다는 것이다. 쌀로 밥을 지어보지도 않은 채 술을 빚고 떡을 만드니 밥그릇에 담겼다고 해서 무엇이나 다 밥은 아닌 것처럼, 본디 사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지적은 예리했다.



“요즘 미술시장에 사람이 몰린다고 들었습니다. 사진을 많이 팔아주는 건 고마운데 왜 그림 같은 사진만 사지요? 말랑말랑하고 예쁘장하며 가벼운 사진들 말입니다. 사진 같은 사진을 사야지.”



40년 넘게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어온 그는 “왜 사진에서 리얼리티가 깨지는가. 왜 리얼리티가 없다고 보는가”하며 안타까워했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그 바뀐 세상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도 있지만, 끝까지 양보할 수 없는 진실의 리얼리티를 그는 진득하게 붙잡고 세상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



 인생은 왜 60부터일까요



그는 2008년 9월 서울 방이동 한미사진미술관에서 연 7년 만의 개인전 제목을 ‘저녁에’라 붙였다. ‘저녁’이 아니라 ‘저녁에’였다. 전시 개막식 인사말에서 그는 ‘저녁에’에 대한 소회를 털어놨다.



“아침은 아침이고, 점심은 점심이고, 저녁은 저녁이고, 밤은 밤입니다. 인생은 60부터라는 말도 있지만, 그건 억울합니다. 인생이 60부터라면 그 전까지는 뭘 하고 60부터라고 하는 겁니까. 사실 제 인생이 한밤중인 것 같은데 조금 에누리해서 ‘저녁에’로 했습니다. 이제 슬슬 사진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니 조금 더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글을 무섭게 잘 쓰는 사진가로 이름 났지만 글 다루기 못지않게 말 다루기도 차지다. 때로 “난 한쪽 구석에서 얌전하게, 숨도 살살 쉬며, 제 일이나 겨우 하고 있는 작가야”라고 말할 때 웃음이 인다. 자신을 ‘하여튼 사진가’라 표현할 때도 폭소가 터진다. “내가 내수용 사진가야”라고 할 때는 뼈가 있는 말이라 새겨들어야 한다. 이 땅의 촉촉한 정서와 진한 서사를 담은 사진을 외국인이 제대로 이해하겠느냐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거나, 확신 못하는 것을 작품이라고 내놓는 사람들을 좋아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라며 그는 한숨처럼 덧붙였다. “저녁이니…조용해야겠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사진가



 강운구 선생을 아는 이들은 그와 맺었던 인연 속에서 신기했던 일들을 잘 끄집어낸다. ‘사진으로 쓴 민족서사시’라는 찬탄을 들었던 『경주 남산』 작업을 할 때도 그랬다. 그와 동행했던 편집 디자이너 정병규(64)씨는 “시간을 기다리고, 정석대로 찍었기에 강 선생의 사진은 지금 봐도 신선하다”며 “강 선생과 책을 만들며 디자이너가 숨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강운구 선생은 스스로를 “공격하지 않는 사진가”라고 말한다. 사진가는 단 한 줄기 햇빛을 기다리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그는 경주 남산에서 햇빛을 기다리며 무엇을 했을까.



“삼각대를 세워놓고 배회했죠. 어슬렁어슬렁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땅을 몸으로 느꼈어요. 사진을 좀 찍는다는 스님 한 분이 묻더라고요. 해가 좀처럼 들지 않아 깜깜한 감실 속 부처는 언제 찍어야 나오느냐고. 그래서 내가 그랬죠. 동지(冬至)에 한번 가보시오. 그날 잠깐 눈 깜짝할 사이쯤 볕이 듭니다.”



‘강운구를 핑계삼다’ 전시회를 소개하며 이창수씨는 “강운구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젊은이들이 각자의 길을 가며 허연 머리로 이 자리에 있게 된 건 갈래갈래 이어진 길마다 세워진 이정표에 강운구가 오롯이 있어왔기 때문”이라고 인사했다. 그러면서 부탁했다. “우리는 과거의 강운구가 아니라 내일의 강운구를 더 절실히 필요로 합니다.”



강운구 선생에게 인생은 70부터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강운구는



강운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빌린 카메라로 처음 사진을 찍은 이래 50년을 사진가로 살아왔다. 일간지 사진기자 시절 ‘사진작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진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수많은 이론서와 사진역사책을 독파한 뒤 사진의 큰 틀과 가야만 할 길을 스스로 찾았다. 그는 ‘외국 사진이론의 잣대를 걷어내고 우리의 시각언어로 포토저널리즘과 작가주의 영상을 개척한 우리 시대의 빼어난 다큐멘터리 사진가’란 평을 듣는다. 1941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북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일했고 중앙대와 숙명여대 등에서 사진을 가르쳤다. 『경주 남산』 『우연 또는 필연』 『모든 앙금』 『강운구 마을 삼부작-황골 용대리 수분리』 『저녁에』 등의 사진집과 사진산문집 『시간의 빛』 『자연기행』을 펴냈고 최근 『강운구 사진론』을 상재했다. 94년 ‘우연 또는 필연’을 시작으로 모두 네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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