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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땅서만 15년 …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아요





‘해외봉사상 대통령상’ 받는 원불교 김혜심 교무



대학 교수직을 접고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15년째 의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 원불교 김혜심 교무는 “우리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들과 같이 사는 거다”라고 말했다. [조용철 기자]



25일 오후 3시 원불교 김혜심(64) 교무가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상’을 받는다. 수상을 엿새 앞둔 19일 서울 용산 하이원빌리지에서 그를 만났다. 김 교무는 15년째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고(故) 이태석 신부(1962~2010)와 비슷한 행적이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봉사를 하다 올 1월 대장암으로 숨진 이 신부의 생애는 영화 ‘울지마 톤즈’로 제작돼 사람들을 적셨다. 김 교무에게 그 얘기부터 물었다.



-혹시 영화 ‘울지마 톤즈’를 봤나.



 “영화는 안 봤지만, 공감이 가더라. 원불교인도 그 얘기 많이 하더라. 이태석 신부님도 의사였다고 들었다. 수단에서 한센인들도 돌보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헌신적인 삶을 사셨더라.”



 김 교무는 약사 출신이다. 중앙대 약학과를 1968년 졸업했다. 당시만 해도 여성 약사는 드물었다. “여성도 활동을 하려면 뭔가 자기분야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출가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그의 삶은 유복했다. 전북 익산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던 부모 덕이 컸다. “대학원 2학년생 때였다. 친구가 TV뉴스를 보다가 전화를 했다. 우리 주유소에 불이 났다는 거다. 그 사고로 오빠가 크게 화상을 입었다. 치료를 했으나 결국 숨졌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김 교무는 죽음을 통해 삶을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 원불교 교무로 출가했다. 그의 집안이 원불교를 믿었다.



 -이후 소록도로 들어갔다.



 “대학원 박사과정 때였다. 신문에서 소록도에 관한 기사를 봤다. 갱생원에 의료 인력이 없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돕고 싶었다. 여름방학(76년) 때 소록도로 갔다. 당시만 해도 한센인에 대한 편견이 심할 때였다. 두 달간 있으려고 여름옷만 가져갔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까지 머물게 됐다. 그곳은 도움이 절실했다.”



 소록도에선 그를 원했다. 그런데 김 교무는 성직자라 원불교 교단에서 발령을 받아야 할 처지였다. 결국 그는 소록도를 떠났다. 그러나 가방은 두고 갔다. 김 교무는 교단을 설득했다. 우여곡절 끝에 허가를 얻었다. 그는 교당도 없는 소록도로 발령이 났다. 의료봉사를 재개했다. 그렇게 8년을 살았다. 교단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신설된 원광대 약학과 교수직을 맡아달라는 청이었다. 그는 거절했다. 하지만 간곡한 요청을 계속 거절하긴 어려웠다. 결국 교수가 됐다. 김 교무는 봉사단을 조직해 방학 때마다 소록도를 찾았다.



 “지금도 소록도가 고향 같다. 대학에 돌아와서도 더 어려운 곳이 있으면 그건 제 몫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있으면 정년까지 있을 순 있지만 기쁘지는 않더라.”



 김 교무는 95년 겨울방학 때 40일간 아프리카를 여행했다. 아프리카의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직접 보고 싶었다. “참담하더라. 그래도 아이들은 백지 상태더라. 아이들 교육을 잘 하면 아프리카가 바뀔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광대 약대 학장까지 지냈던 그는 이듬해 교수직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로 떠났다. 지금껏 남아공에서 3년, 스와질란드에서 12년째 살고 있다.



 -스와질란드는 낯선 나라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모잠비크 사이에 있는 군주제 국가다. 성인 남녀의 60% 이상이 에이즈 환자다. 일부다처제 풍습이 있어 실제 감염률은 더 높다. 13세만 되면 많은 아이가 미혼모가 된다. ‘선샤인(Sun shine)’이란 쉼터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재미있는 영화를 틀고, 간식을 주었다. 그랬더니 모이더라. 에이즈 교육은 마지막에 20~30분만 했다. 지금은 지역 주민이 집안에 좋은 일이 있어도, 나쁜 일이 있어도 제일 먼저 달려온다. 그렇게 한 식구처럼 지낸다. 얼마 전 우리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에이즈로 사망했다. 집에 갔더니 아이 엄마가 가슴을 치며 울더라. 자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감염됐다고 말이다.”



 김 교무는 해발 1100m의 산간벽지인 까풍아에 보건소도 세웠다. 매일 50~60명의 환자가 찾아온다. “길을 가던 산모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들어오기도 한다. 지금껏 받은 아이가 무려 11명이다.” 아프리카 여성의 문맹률은 높다. 까풍아도 마찬가지다. 가난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그들의 삶은 무척 고달프다. 김 교무는 여성개발센터를 지어서 그들에게 재봉을 가르쳤다.



 “교복을 만들어서 팔았다. 번 돈을 주부들에게 돌려줬다. 그때 환하게 웃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 일자리가 생기고, 희망이 생긴 거다.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던 그들의 삶이 서서히 변하는 게 요즘 눈에 보인다. 물이 없는 지역에는 식수도 개발하고, 난민촌을 돌며 의료봉사도 한다.”



 김 교무는 2006년 갑상선암, 2008년 위암 수술을 받은 바 있다. “너무 더운 지역이라 맵고 짠 음식을 먹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며 웃어넘기는 그의 얼굴에는 힘들어하는 구석이 전혀 없다. 표정도 무척 편하다.



 -아프리카에 준 것은 무엇이고, 받은 것은 무엇인가.



 “15년째 살지만 제가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준 것은 없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제 삶이 더 풍요로워졌다. 영국이나 미국에서 봉사활동차 방학 때 학생들이 더러 온다. 1~2주 후에 소감을 물으면 ‘내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다’고 하더라. 화장실도 그렇고, 잠자리도 그렇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왜 영혼이 맑아지는가 하고 물었다. 그들은 ‘경쟁 속에서 남들보다 앞서려고 살아왔다. 성공하려고, 출세하려고. 그런데 여기는 너무나 가난하고,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들이 행복해 보인다’고 답하더라.”



 김 교무는 자신이 특별한 일을 하는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저희가 가서 별일 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 사람들과 같이 사는 거다.” 어쩌면 그게 진정한 선교의 첫 단추가 아닐까. 후원 문의 ‘아프리카 어린이 돕는 모임’ 02-825-5196.



글=백성호 기자

사진=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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