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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위기에서 발휘된 최명길의 진정성



최명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神道碑).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애썼던 최명길은 실제 전쟁이 터지자 목숨을 걸고 적진에 나아가 담판을 벌인다. 그 과정에서 ‘간신’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그는 진정으로 종사를 걱정했던 탁월한 리더였다. 충북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53-3. [문화재청 홈페이지]

1636년(인조 14) 2월 청나라 사신 용골대 일행이 의주에 도착했다. 자신들의 칸(汗) 홍타이지(皇太極)가 제위(帝位)에 오른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도 홍타이지를 황제로 추대하는 데 동참할 것을 요청하려는 목적이었다. 용골대의 입국 목적이 알려지자 조정 신료들은 격앙되었다.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오랑캐가 황제를 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사신 일행을 입경시키지 말라고 강조했다. 일부 신료는 용골대의 목을 베어 명나라로 보내 대의를 밝히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청과 맺은 형제관계도 파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험악한 분위기에 놀란 용골대는 말을 훔쳐 타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가 달아나자 조야의 민심은 흉흉해졌다. 청과의 관계가 끝장났으니 곧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 이어지던 같은 해 9월 대청(對淸) 정책을 둘러싼 논란은 극에 이르렀다. 주화파 최명길(1586~1647)은 청에 사신을 보내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동태부터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척화파들은 반발했다. ‘오랑캐에게 사신을 보내는 것 자체가 명나라를 배신하고 백성들을 기만하는 행위’라며 최명길을 ‘간신’이라고 매도했다.

 기존의 관계를 끊고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척화파의 주장이 거세지자 최명길은 ‘초강수’를 꺼낸다. 청과 싸우겠다는 결심이 진정으로 확고하다면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까지 나아가자고 촉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사의 운명을 걸고 청군과 한판 승부를 벌이자고 했다. 당시 인조를 비롯한 대다수 신료들은 전쟁이 터지면 강화도로 들어간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상 서울 이북의 방어를 포기하는 소극적이고 수세적인 방책이었다.

 이윽고 12월 14일 청군의 선봉이 무악재 너머까지 들이닥쳤다. 인조가 강화도로 가려고 창경궁을 나와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청군이 한 달음만 더 달려오면 포로가 될 수도 있는 위기에서 인조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강경책을 주문했던 신료들도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 최명길이 나섰다. 자신이 청군 진영에 가서 침략해 온 까닭을 따지면서 시간을 끌어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애초 전쟁을 막으려고 시도하면서 ‘간신’이 되어버린 그가 실제 전쟁이 터지자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가장 먼저 나선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망국의 위기에 몰렸던 조선이 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최명길 같은 진정한 충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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