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배명복의 세상읽기] 유연한 탈북자 정책이 아쉽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얼마 전 부서 회식 때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대화 중 외래어를 쓸 때마다 벌금을 무는 신종 게임을 했다. “자, 지금부터 시작!” “오케이….” 시작과 동시에 몇 명이 걸려들었고, 멍청한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엘리베이터를 ‘승강기’, 핸드폰을 ‘휴대전화’, 택시를 ‘영업용 승용차’라고 하기 위해서는 적잖은 주의력과 조어(造語)적 순발력이 요구됐다. 평소보다 대화의 활기가 현저히 떨어졌음에도 한 시간 만에 제법 돈이 쌓였다. 벌금의 단위를 높였더라면 2차 회식 비용까지 충분할 뻔했다.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면서 가장 힘들어 하는 것 중 하나가 언어 문제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외래어 구사가 특히 어렵다고 한다. 남한 사람들 입에서, 또 남한 매스컴에서 걸핏하면 튀어나오는 외래어를 따라잡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외래어 탓에 정상적인 의사소통에 지장을 받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다못해 집을 옮기고, 직장을 옮겨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법이거늘 전혀 다른 체제와 환경 에서 생활하다 온 탈북자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언어적 고충은 사실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최근 탈북자 20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한 임을출 경남대 교수(북한학)에 따르면 탈북자들이 느끼는 가장 큰 고충은 ‘정체성 위기’라고 한다. 남한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탈북자들의 경우 대부분 뚜렷한 직장이 없다 보니 남한 사회에 대한 소속감이나 귀속감을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떠도 갈 데가 없다”고 하소연하는 탈북자가 많다고 한다. 정착한 지 2~3년이 지나면 어느 정도 남한 사회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차츰 정서적 안정을 찾기도 하지만 전체 탈북자의 55%가 여전히 일자리 없이 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외로움과 죄책감도 탈북자들을 짓누르는 고충이다. 가족과 함께 온 사람들도 있지만 혼자 온 탈북자들의 경우 처음 한동안 극도의 고독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북한에 남은 가족이 당할지 모르는 불이익은 죄책감의 근원이다. 그러다 보니 죽기살기로 돈에 목숨을 거는 탈북자가 많다.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브로커를 사서 가족을 데려오거나, 그게 안 되면 가족에게 용돈이라도 전해주는 것이 고독감이나 죄책감을 더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는 것이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하나원에서 남한 사회 적응 교육을 받고 있는 탈북 여성들이 투표 체험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가 이달로 2만 명을 넘었다. 어떻게든 남한 사회에 적응해 뿌리를 내리려고 애쓰는 탈북자도 많지만 적응을 못해 방황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 결과 각종 사회문제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탈북자 P씨는 “탈북자 사회의 도덕적 타락이 위험 수위”라고 개탄한다. 범죄에 연루되거나 음성적인 돈벌이에 가담하고 있는 탈북자들이 걱정스러운 숫자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보험 사기 사건이나 조직적 성매매 등 최근 보도된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미국과 유럽을 떠돌며 위장 망명을 시도하는 탈북자들은 새로운 골칫거리다.



 남한 사회에 정착하는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한국행을 선택한 탈북자들 자신의 몫이다. 그 다음은 이들의 적응과 정착을 도와줄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의 몫이다. 둘은 별개가 아니다. 밀접히 연관돼 있다. 탈북자 스스로의 노력과 정부와 사회의 지원이 유기적으로 맞물려 선순환 구조를 이뤄야 한다. 이 대목에서 아쉬움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많다.



 P씨는 “심하게 말해 현재의 탈북자 지원정책은 돈 들여 적(敵)을 만드는 꼴”이라고 말한다. 탈북자 개개인의 특성과 자질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다 보니 불필요한 부적응자를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5년 시한에 맞춰진 인센티브식 정착금 지원제도를 그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다. 현행 규정에 따르면 입국 5년 내에 직업훈련과 자격증 취득을 마치고, 3년 이상 취업 상태를 유지해야 정부가 정한 정착 지원금 전액(최대 3040만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는 탈북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하나원을 나와 어영부영 5년을 보내고 나면 사실상 모든 지원금이 끊겨 최하층 극빈자 신세로 몰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각종 범죄와 부정이 빈발하고 있는 데는 현실을 무시한 제도 탓도 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임 교수도 비슷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정부의 입장은 이해되지만, 지원제도를 너무 경직되게 운영하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가슴으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떤 제도도 성공하기 어렵다”며 “탈북자들의 진솔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답은 나오게 돼 있다”고 말한다. 책상머리에서 만든 지원정책으로는 문제 해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탈북자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냉대는 더 큰 문제다. 스스로를 동남아 출신 이주 노동자보다 못한 ‘3등 시민’이라고 여기는 탈북자들의 자조(自嘲)를 우리 사회가 보듬지 못한다면 그들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북한 주민에게 전하는 남한 사회에 대한 평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국면이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다. 그때 그들 입에서 어떤 얘기가 나오느냐에 따라 탈북자들을 위해 쓰는 세금은 독이 될 수도 있고, 약이 될 수도 있다. “국경의 남쪽은 그래도 살 만한 곳이다”라는 소리가 나오도록 하려면 탈북자 지원제도의 유연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다양한 지원방안을 제시하고 탈북자 스스로 선택하게 한 뒤 각자 책임지도록 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