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배에서 본 초라한 북한땅, 청진은 지옥의 입구였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50년 전 북송선 탔던 재일동포의 ‘쇼생크 탈출’

한국은 탈북자 2만 명 시대를 맞고 있다. 탈북 흐름 한편엔 재일동포 출신 탈북자가 있다. 지금 200여 명이 일본에 있다. 이들을 지원하는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에 탈북자 취재 지원을 요청, 이상봉(가명·65)씨를 18일 도쿄에서 만났다. 그는 47년간 탈출을 궁리하고 준비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뛰어넘는 인내였다. 탈북 이유는 여느 탈북자와는 달랐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자유를 되찾으러 왔다”고 했다. 고생이 난도질한 그의 얼굴은 깊고 얕은 주름투성이였다. “북에 남은 가족이 걱정된다”며 가명을 요청했다.









북송 교포들이 떠나기 전 집결했던 일본 니가타(新潟)센터. 18일 만난 이상봉(가명)씨는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다’고 표현했다. [사진=민단 제공]



1960년 5월, 일본의 후쿠이 현. 두 명의 조총련 간부가 이상봉(당시 16세·고1)의 집에 왔다. 그들은 가족을 모아놓고 한바탕 장밋빛 선전을 늘어놨다.



“아이는 많은데 부모가 늙어 교육비 내는 게 힘들다. 김일성이 영도하는 북반부로 가라. 귀국하면 노인은 일을 않는다. 냉장고를 열면 고기와 야채가 쏟아진다. 병원서도 돈을 안 받는다. 교육비는 무료이고, 잘하면 유럽으로 유학도 보내준다.”



당시 65세의 나이에 막노동자로 힘겹게 살던 아버지는 솔깃했다. 쪽방 두 개에 세 든 신세. 한 방은 결혼한 이씨의 형(당시 27세)이 쓰고 나머지 4평 방에서 부모님과 2남2녀 형제, 모두 6명이 포개 살았다. 19세 누나는 방직공장에 다니고, 어머니(당시 49세)는 리어카를 끌며 폐지를 주웠다. 재혼한 어머니가 데리고 온 이씨의 형은 신발공장 직원이었다. 그래도 가난한 일본 사람들이 다 먹는 ‘삼시 세 끼 쌀밥’을 꿈도 못 꾸고 고구마를 먹었다. 양철 지붕은 비가 새고 바람이 심하면 날아갔다.



어머니는 북송에 결사 반대였다. “조선전쟁 끝난 지 7년 만에 무슨 지상낙원 같은 어리석은 소리냐. 당분간 남이고 북이고 안 가는 게 좋다”며 아버지에게 “이 사람들 쫓아내라”고 했다. 부모님은 매일 싸웠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손찌검도 했다. 조총련의 집중 공략에 넘어간 아버지는 7월 ‘귀국 희망 신청서’에 도장을 찍었지만 “혼자 가라”고 대드는 어머니에게 밀렸다. 다시 두 달 뒤 조총련이 “그러면 아내는 떨구고 애들만 데리고 가라”고 하자 어머니는 손을 들었다.



9월 17일 오전 10시, 이씨 가족 6명은 형만 남기고 떠났다. 짐은 없었다. 전별금 5만 엔과 타고 다니던 자전거 두 대가 전부. 외가 친척 30여 명이 여전히 “가지 말라”고 했다. 북송교포 열차에 실려 집결지인 니가타(新潟)항구로 향하는데 300여 명의 민단 사람들이 기차를 막아 육탄전도 벌어졌다. 북송 교포는 니가타센터에 모여 닷새를 지냈다. 일본인 부인들이 자식을 놔두고 도망가는 일이 속출했다. 그때마다 난리가 났다. 이윽고 1800명과 함께 소련 선박 ‘클라리온’을 탄 지 2박3일 만에 청진 앞바다에 도착했다.



오전 11시, 청진항은 초라했다. 어머니가 “그것 보라”고 타박해도 아버지는 입을 못 열었다. 종이꽃을 흔드는 학생들의 찢어진 신발 사이로 발가락이 튀어나왔다. “잘못 왔다. 도망가야겠다”는 생각이 시작됐다.



이씨 가족은 탄광행이었다. 탄광엔 ‘불순분자’, 월남 가족, 국군 포로들이 있었다. 배치 과정에서 산간벽지로 쫓겨나게 된 가나가와 출신 청년 네 명이 간부들과 치고받고 싸웠다. 다음 날 이들은 사라졌다. 가족의 꿈은 박살 났다. 속이 상해 학교도 안 나가다 한 달 뒤 갔는데 ‘김일성’이란 말을 너무 많이 들었다.



사형장서 6세 꼬마 참혹한 죽음 목격

두 달 뒤 11월, 기막힌 일을 겪었다. ‘일제 때 잘 먹고 잘 산 걸 숨겼다’는 죄목으로 집단 총살되는 현장을 봤다. 피가 안 튀게 입을 틀어막고, 몸엔 두툼한 솜동복을 입혔다. 눈도 가렸다. 그리고 한 명에게 9발씩 쐈다. 숨이 막혔다.



교육이 무료라고? 등록금은 없었지만 애국 헌납금이니 기부금이니 해서 허리가 휘었다. 어머니는 나물을 뜯어다 팔았다. 보고를 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다니지도 못했다. 일본에선 가난했지만 구속은 안 받았는데… 답답하고 억울했다. 자나깨나 도망갈 궁리만 했다.



7년 뒤 23세, 대학생 때 중국으로 달아났다. 일본행을 목표로 나름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4개월에 걸쳐 창춘까지 갔는데 중국 공안에 잡혀 귀국했다. 조사를 받았지만 “구경 갔다”고 둘러댔다. 이듬해 직장암에 걸린 아버지가 “너희들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씨는 이래저래 포기하는 심정이 됐고 적응을 시작했다. 당원도 됐다. 귀국자에 대해 느슨했던 분위기는 달라져갔다. 70년대 초반 김정일이 조직담당 비서로 등장, 총화를 강화하자 귀국자 출신인 이씨는 매일 비판을 받았다. 이를 피하려고 ‘당간부 아파치의 딸’과 결혼했다. 북한 주민은 귀국 동포를 ‘재포, 귀포’로, 귀국 동포는 북한 주민을 원주민이란 뜻의 ‘아파치’로 불렀다.



배급을 받아도 늘 주렸다. 닥치는 대로 온갖 일을 했다. 제지공장ㆍ우메보시공장의 노동자, 경찰 노무자도 했다. 배급이 많이 받으려 광부가 됐다가 친구들이 생매장 되는 꼴도 봤다. ‘귀국시켜 주셔서 고맙다’는 구실로 5년마다 사금 캐기에 끌려갔다. 깊은 산속으로 각자 식량을 싸 가지고 들어가 개울에서 사금을 캤다. 중노동에 식량이 일찍 바닥나 개구리·독사를 잡아 먹고 나무껍질도 벗겨 먹었다. 귀국 10주년, 15주년, 25주년 계속됐다. 그런 와중에 일본의 형에게 연락이 닿아 송금을 받기 시작했다.



86년 2월, 양강도의 정치범수용소를 허물고 김일성ㆍ김정일 별장을 만든다고 동원됐다가 못 볼 꼴을 봤다. 늙은 아버지가 땅굴을 파 탈출하다 잡혔는데 영문 모르고 끌려온 부인·자식·손자를 다 총살시켰다. 6세 꼬마가 무섭다고 묶여 있는 엄마 다리에 매달렸는데 거기다 총을 9발이나 쐈다. 꼬마의 머리가 깨져 뇌수와 피가 튀고 눈알이 튀어나왔다.



더 참을 수 없었다. 88~96년, 중국을 다섯 번 다니며 연구했다. 귀국자에겐 출국 허가가 안 나 뇌물을 썼다. 형에게 중국으로 송금하라고 한 뒤 “돈을 찾는다”며 출국해 탈출 루트를 모색했다. 북으론 중국-러시아 접경 지역, 남으론 윈난성까지 갔다. 50만 엔 자금도 몰래 만들었다. 그러다 94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었다. 작전을 개시했다.



97년 1차로 누나를 일본으로 탈출시켰다. 남편은 ‘고난의 행군’ 때 굶어 죽었고 아들·딸 한 명이 있었다. 2002년 여동생을 내보냈다. 남편은 병사했고 아들 둘을 데리고 떠났다. 지금은 각각 영국과 한국에서 산다. 2003년 남동생 가족을 한국으로 들여보냈다. 치밀하게 했다. 목표는 처음부터 일본이었다. 그런데 중국 공안이 버티는 일본 영사관으로 갔다간 잡힌다. 일본 영사관 직원의 전화번호를 알아내 선양의 한 식당에서 전화를 했다. 약속 장소·시간을 정하면 와서 데리고 갔다. 다 성공했다.



마지막으로 이씨 차례. 문제가 생겼다. 형제가 다 사라지자 의심의 미행·감시가 붙은 것이다. 3년간 그랬다. 보위부원을 5만 엔으로 ‘녹였다’. 가족끼리 탈북 회의도 했다. 부인은 “잡히면 다 죽으니 혼자 가라. 나가서 우리를 먹여만 살려라”고 했다. 아들은 30대, 딸도 시집갔다. 애들을 다 키웠고 할 일은 다했다. 2006년 9월 어느 날 밤 강을 넘었다. 2007년 2월 선양의 일본총영사관으로 들어갔고 5월 일본으로 왔다.



딸은 감옥행 … 20만 엔 부족해 손 못 써

마침내 47년간 꿈에도 그리던 자유를 찾았다. 그러나 일이 틀어졌다. 나오면 도와주기로 했던 형이 2007년 2월 당뇨 합병증으로 그만 사망했다. 40여 년 동안 2000만 엔 넘게 도와줬는데,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이다. 민단 지원금 10만 엔을 받고, 집을 얻는 데 도움도 받았다. 생활보호자가 돼 일본 정부로부터 월 13만 엔을 받는다. 그러나 집세와 공과금을 내면 남는 돈은 4만 엔. 나이 때문에 취직도 안 된다. 그래서 가족에겐 30만 엔씩 두 번밖에 못 보냈다.



“가족과 같이 있는 게 낫지 않았겠나”라고 하자 “북에서 살아보지 못한 사람의 말”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사춘기 때 끊어진 문학과 역사에 대한 열정을 잇고 있다. “마음이 참 편하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가슴 한편엔 바위가 들어 있다. 탈출을 돕던 북의 딸이 잡혀 감옥에 있다. “50만 엔이면 풀려난다는데…” 한 푼 두 푼 몇 년 모은 돈이 지금 겨우 30만 엔이다.






재일동포 북송

1959년 이후 재일본 조선인연합회(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송환된 사업이다. 59년 12월 14일 1진 975명이 니가타(新潟)항을 떠난 이래 84년까지 186차례에 걸쳐 9만3000여 명이 북송됐다. 초기엔 러시아 선박 클라리온과 토볼스크가 동원됐다가 나중엔 재일동포 북송의 대명사가 된 만경봉호가 사용됐다.



도쿄=안성규 기자 askme@joongang.co.kr



중앙SUNDAY 무료체험구독신청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