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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키우는 방과후 교육, 아이들이 ‘진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청산도 청산중학교 사진반 아이들이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유명한 돌담 길 언덕에 올라 당리 해변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있다. 청산도=신동연 기자
전남 완도에서 배로 50분가량 가야 하는 청산도. 17일 오후 8시 청산도의 관문인 도청항 옆의 청산초등학교 강당 무대에 중학생 6명으로 구성된 밴드 ‘신드롬’이 등장했다. 보컬인 최현철(13·청산중 1)이 노래를 시작했다. 미국 네오 펑크록 밴드 그린데이의 ‘바스켓 케이스’였다. 노래 뒤로 깔리던 임다빈(15·청산중 3)·정도년(15·청산중 3)·김유정(15·청산중 3)의 전자기타와 베이스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재호(15·청산중 3)의 드럼이 폭발한다. 관중석 왼쪽의 학생 수십 명이 의자 위로 올라가 두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어색해하던 학부모와 주민 150여 명도 음악에 몸을 맡겼다. 올해 신드롬의 멤버가 된 현철은 둘째 곡에서는 베이스 기타를 잡았다. 신드롬은 소녀시대의 ‘힘내’를 끝으로 다섯 곡의 공연을 마무리했다.

전교생 37명, 완도군 섬마을 학교 청산중의 ‘재미있는 학교’ 만들기

신드롬의 공연은 청산중 학예회인 ‘푸르뫼 축제’의 3부 행사였다. 섬마을 유일의 중학교지만 전교생이 37명밖에 안 돼 교내에 강당이 없는 까닭에 근처에 있는 청산초등학교 시설을 빌렸다. 청산중과 자매결연을 한 ‘대도시’ 광주 효광중 학생 38명도 축제를 즐겼다. 1박2일 일정으로 청산도를 찾은 효광중 학생은 이날 밤 청산중 친구들의 집으로 흩어져 다음 날을 기다렸다.

학예회는 청산중에서도 진행됐다. 이날 낮에 가본 청산중 1층 복도에는 사진반과 미술반 등 방과 후 활동을 한 아이들의 작품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었다. 학교 건물 뒤 옹벽은 온통 태극기·스폰지밥·미키마우스·꽃·얼굴 등 조그만 그림으로 덮여 있었다. 미술반 아이들이 아크릴 물감으로 각자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놓은 것이다.

청산도 아이들의 꿈이 변하고 있다. 꿈은 상상하는 크기만큼만 그릴 수 있다. 과거 청산도 아이들의 꿈은 흑백에 가까웠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완도나 해남에 있는 고등학교 진학이 꿈의 전부였다. 청산도엔 눈부시게 아름다운 바다와 섬·하늘이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볼 줄 몰랐다. 지금 청산도 아이들의 꿈은 무지개색이다. 섬 안 곳곳을 누비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른다. 여행작가와 디자이너·사진가…. 꿈도 다양해졌다. 청산도가 좋아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방과 후 활동의 결실이다. 청산중 정연국(56) 교장은 “아이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세 가지, 자신감과 적극성·긍정적 태도”라고 말했다.

여행사진 작가 꿈꾸는 은영
청산도의 서쪽 지리해수욕장 끝자락에 14살 김은영(청산중 2)이 산다. 해질 녘이면 그림 같은 섬들이 점점이 떠 있는 바다 위로 붉은 노을이 물드는 곳이다. 뭍사람은 청산도 하면 영화 서편제의 촬영 장소, 슬로 시티(Slow City)를 떠올린다. 하지만, 은영에게 ‘청산도’는 ‘고립’ ‘답답함’과 같은 말이었다. 섬에는 피아노 학원도, PC방도, 쇼핑센터도 없다. 언젠가는 이 섬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은영에게 요즘 꿈이 생겼다. 세상을 돌아다니며 그 경험을 글로 풀어내는 여행작가다. 평소 글짓기 시간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은영이다.
“여행작가를 하려면 글뿐 아니라 사진도 잘 찍어야 한대요.”

은영은 올 4월부터 학교 방과후 수업으로 사진반 활동을 하고 있다. 그가 쓰는 카메라는 ‘니콘 FM2’, 요즘 보기 힘든 전문가용 필름 카메라다. 사용하는 필름도 비싸고 구하기 힘든 슬라이드다. 은영과 사진반 친구 8명은 같은 장비를 가지고 일주일에 두 번 사진 이론 수업을 듣고, 한 달에 한 번은 청산도 구석구석으로 출사도 나간다.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니, 막 찍을 수가 없고 어려워요. 그래도 재밌어요. 사진이 찍히는 원리도 알 수 있고요.”
사진반은 인천에서 온 홍진선(45) 목사가 지도하고 있다. 홍 목사는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사진의 힘으로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사진을 찍는 국제단체 VWI(Visual Worship Institute)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는 회원들과 함께 슬로 시티로 지정된 청산도를 찾아 사진을 찍다, 청산도에 푹 빠져버렸다. 그리고 청산도 아이들을 만났다.
홍 목사는 “청산도는 젊은이들이 뭍으로 빠져나가 노인만 늘어나는 섬”이라며 “내가 가진 재능인 사진으로 아이들과 섬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VWI와 주변 지인들로부터 1800만원을 지원받고, 청산중에서 낸 600만원을 보태 사진반을 꾸려가고 있다. 카메라는 VWI 회원들의 것을 빌리고, 삼각대·필름 등을 구입했다. 요즘 같은 때에 필름 카메라에 슬라이드 필름을 선택한 것은 아이들이 사진의 원리를 이해하고, 사물을 진지하게 관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진반 학생 8명은 12~14일 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병국) 초청으로 서울에 가 사진전도 관람하고 고궁에서 촬영을 하는 시간도 보냈다. 인천에 가족을 두고 온 홍 목사는 한 달을 절반으로 나눠 인천과 청산도를 오가며 지내고 있다. 큰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는 2년 뒤엔 아예 아내와 둘째를 데리고 청산도로 이사할 계획이다. 홍 목사는 무보수 강사다. 청산중에서 강사료를 주겠다고 했지만, “강사료를 학교 운영에 써달라”며 사양했다. 생활비는 홍 목사와 뜻을 같이하는 후원자들이 보내주는 돈으로 해결해오고 있다. 홍 목사는 “아이들이 내년 4월 이곳에서 열리는 슬로 시티 축제를 목표로 실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말했다.

게임광에서 드러머로 변신한 재호
15살 재호는 한때 청산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게임광이었다. 시간만 나면 집안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열중했다. 청산도 토박이면서 건축일을 하는 아버지 이경희(47)씨는 아들의 그런 모습에 답답해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해를 한다. 자신도 눈을 뜨면 하늘과 바다뿐인 섬이 지겨워 중학교를 마친 뒤 뭍으로 뛰쳐나갔던 젊은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재호가 달라졌다. 학교 방과후 시간에 밴드부에서 드럼을 맡고부터다. 밥그릇이든 필통이든 눈 앞에 있는 모든 게 ‘북’으로 보인다. 틈만 나면 무엇이든 들고 두드린다.
“드럼을 두드리는 게 너무 신나요. 연주가 끝나면 가슴속에 막혀있던 뭔가가 뻥하고 뚫리는 느낌이에요.”

이경희씨는 시도 때도 없이 두드려 대는 아들 모습이 싫지 않다.
“섬에 뭐가 있습니까. 아이들이 새로운 것에 몰두하고 취미가 생기니 좋습니다.”
청산중의 방과후 활동 중 하나인 밴드부 신드롬의 멤버는 모두 17명. 전교생의 절반에 가깝다. 아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는 얘기다. 사람이 많다 보니 실력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초급반과 중급반으로 팀을 나눴다. 밴드는 드럼과 신시사이저, 전자기타, 베이스 기타, 보컬로 제대로 구색을 갖췄다.

강사는 한국교원대 음악교육과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한 이준택(28)씨다. 올봄 대학을 졸업한 이씨는 임용고시를 준비하다 청산중학교와 인연이 있는 스승의 권유로 올 3월 청산도로 내려왔다.
“교수님이 ‘청산도에서 내려가서 임용고시 공부도 하고, 틈틈이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밴드부를 지도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셔서 두말 않고 짐을 쌌습니다.”

이씨는 클래식 기타가 전공이지만, 학창 시절부터 10년간 밴드를 해온 ‘현역 선수’다. 중2 때부터 만진 기타는 물론, 드럼과 신시사이저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이씨는 학교 음악실에서 청산중 밴드부 학생들과 매주 토·일 하루 8시간씩 맹연습을 해왔다고 했다. “주말에 하루 8시간씩 연습하면 부모들이 싫어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씨는 “밴드부에 들지 못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우리 아이도 끼워달라’고 난리를 칠 정도”라고 대답했다. 지난여름엔 청산중 밴드부의 모습을 본 학부모들이 성인 밴드를 결성하기까지 했다.

그는 “올 3월 청산도에 내려와 청산중 밴드부를 보니 기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며 “하지만 이제는 전남도 내 최고 수준의 중학교 밴드가 됐다”고 말했다.
‘밴드부가 아이들의 학업과 생활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기본적인 음악교육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아이들이 합주를 통해 책임감과 자신감을 배울 수 있다”며 “아이들이 밝게 웃으면서 즐겁게 합주할 때면 가르치는 보람을 짜릿하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난 특별한 존재” 유준
도청항 앞마을에 사는 13살 양유준(청산중 2)은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게 즐겁다. 아침밥을 서둘러 챙겨 먹고 학교로 뛰어 가고 싶어한다. 방과후 활동인 미술반과 사진반을 할 수 있어서다. 특히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미술 선생님을 따라 화판과 물감을 들고 인근 도청항이나 산으로 사생을 나가는 것이 너무 즐겁다. 요즘 유준이에게 고민거리가 있다면 ‘커서 사진작가를 할까, 아니면 화가가 될까’ 하는 것이다. 1학년 때는 목포대가 주최한 전국미술대회 수채화 부문에 나가 특선을, 올해는 입선을 했다.

유준이 어머니 김미경(46)씨는 “초등학교에 다닐 땐 미술로 상 한 번 못 타본 아이였는데, 미술반에 들어간 뒤로 전국대회에서 상을 연거푸 타면서 모든 일에 자신감이 붙고 성격도 한층 더 쾌활해졌다” 고 말했다.

미술반을 지도하는 김상일(55) 화백은 “유준이가 어느 날 ‘골목길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요’라고 말하기에 깜짝 놀랐다”며 “처음엔 무척 산만했는데, 그림과 사진을 배우면서 차분해지고 관찰력과 사고력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김 화백은 전남 순천에서 활동해온 현역 화가다. 그는 현재 청산도에서 중학교 방과 후 미술반뿐 아니라 정규 미술수업과 인근 청산초등학교 미술교사도 맡고 있다. 조선대 미대에서 교직 과목을 이수한 뒤 97년까지 20년간 중학교 미술교사를 지낸 경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교사 시절 전남 지역에서 인연을 맺은 정연국 청산중 교장의 부탁으로 지난해 3월 청산도로 내려왔다. 그리곤 1년도 못 돼 청산도의 유명 인사가 됐다. 초·중학교 미술교사 외에도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수채화반도 운영하고, 섬마을 버스정류장 등 곳곳에 주민들과 함께하는 벽화 그리기도 진행하고 있다. 청산도 주민들로 구성된 생태문화관광 해설가 모임인 ‘청산愛’의 회원이기도 하다.

김 화백은 “얼마 전 아이들이 ‘선생님, 청산도를 떠나시면 안 돼요. 나중에 돌아가시면 저희가 초분을 해드릴게요’라고 말해 눈물이 핑 돌았다” 며 “외지인에게 초분을 해준다는 말은 최고의 찬사”라고 말했다. 초분(草墳)은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시신 또는 관을 땅 위에 올려 놓은 뒤 이엉 등으로 덮어두었다가 2~3년 뒤 뼈를 골라 땅에 묻는 남도의 전통 장례 풍습이다.

“학교가 재미있어야 공부도 잘된다”
방과후 활동을 지도하는 ‘외인구단’을 청산도로 불러들인 사람은 정연국 교장이다. 그는 2007년 9월 공모제 교장 1기로 임기 4년의 청산중 교장이 됐다. 그 전까지만 해도 청산중 교장은 스쳐 지나가는 자리였다. 오지인 데다 해가 갈수록 학생 수까지 줄어들다 보니 1년 이상 재임한 교장이 없을 정도였다.

정 교장은 “3년 전 청산중에 와보니 도서관이나 과학실 같은 교육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고 모든 게 낙후됐었다”며 “환경이 열악하면 좋은 교사가 찾아오지 않고, 결국 그 손해는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교육청에 요청해 교사들을 위한 관사를 새로 짓고, 교육시설을 보강했다. 학생들의 방과후 활동으로 예능 특기교육에 힘썼다. 필요한 예산은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과 전남도교육청의 ‘연중돌봄학교’ 프로그램에 지원해 해결했다.
정 교장은 “교육 효과를 높이려면 우선 학생들이 학교에 재미를 느껴야 한다”며 “밴드와 사진 등 청산도 아이들이 그간 누릴 수 없었던 특기활동을 만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말했다.

정 교장은 전교조 전남지부장을 지냈다. 전교조 활동을 하다가 해직된 경험도 있다. 청산중을 이끄는 정 교장에게 진보와 보수의 편가름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는 “학교경영을 하는 입장에서는 진보 하나로만은 되지 않는다”며 “참교육과 실사구시 차원에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조화를 이뤄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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