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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착지근 쫄깃쫄깃…입에 착착 감기는 가을의 맛

한 달 전쯤인가 가끔 즐겨 찾던 충무로 낙지 전문 음식점에 들어서서 잘 계셨느냐고 안부를 물으니, 주인 아주머니가 대뜸 걸진 욕부터 해댔다. 올가을을 강타한 ‘중금속 낙지’ 파동 탓이었다. 오래간만에 얼굴 아는 단골을 만나니 화끈하게 욕을 하고 싶어진 게다. 한 번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자리를 잡고 앉는데 또 한 번, 음식을 내오면서 다시 한 번, 계속 업그레이드된 욕이 이어졌다. 한창 낙지를 팔아야 할 가을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으니, 낙지 전문점 주인이 왜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35> 맑고 시원한 연포탕

계절이 바뀌는 가을의 대표적인 해산물이 한두 가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낙지를 빼놓으면 섭섭하다. 주꾸미는 봄이 제철이어서 봄에 먹어야 밥알같이 하얀 주꾸미 알까지 제대로 먹어볼 수 있으며, 오징어는 여름부터 가을까지가 제철이어서 오징어축제들은 모두 여름에 몰려 있다. 그리고 가을에 들어서면 드디어 낙지가 달고 맛있어지는 제철을 맞는 것이다.

낙지는 두족류(頭足類) 중에서 맛이 가장 달고 차지고 잡냄새도 없다. 그래서 젓갈로도 가장 맛있는 것이 낙지다. 다소 질기게 느껴지는 오징어젓, 꼴뚜기젓과는 비교할 수 없게, 낙지젓은 오돌오돌 씹히는 식감이 그야말로 환상이다. 잡냄새가 없어서 김장할 때 넣어도 신선하면서 맛있다.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것이 오징어인데 오징어는 냄새가 강하다. 그러니 김장철이 되면, 금값이 되어 있는 생태를 한두 마리 사고 난 후, 낙지와 오징어를 놓고 주머니 속 잔액을 계산하느라 머릿속이 번잡하다.

워낙 맛있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는 식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보기에 끔찍해 보이는 산낙지를 먹을 수 있었던 것도, 그 탁월한 맛 때문이었다. ‘서울 촌년’이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산낙지회 같은 것은 구경도 해보지 못했다. 깔끔한 개성 입맛의 우리집 밥상에는 회가 거의 올라와 본 적이 없고, 학교 앞 리어카에서 파는 멍게와 해삼 역시 내가 사먹을 음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나고회를 처음 먹어본 것도 대학에 들어간 이후였고, 생선초밥을 먹어본 것은 결혼 이후였다. 그러니 산낙지란, 그저 소문으로만 들은 ‘몬도가네 음식’ 정도로 생각했을 뿐이다.

이러던 내가 처음으로 산낙지를 먹어본 것은 남편과 연애를 하면서다. 이제 막 제대로 연애를 해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늠하던 때였는데, 이 남자가 어느 바닷가에서 산낙지를 먹자고 했다. 모양이 끔찍한 것은 어찌 말로 다하랴. 사실 그 음식을 먹는 모습이란 산 벌레를 먹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꿈틀거리는 그것을 소금 섞은 참기름에 찍어 입에 넣었더니, 의외로 맛이 있었다. 그러고는 이후로는 산낙지 먹는 자리에서는 표정관리가 안 될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남자는 무슨 생각으로 스물세 살 어린애에게 산낙지를 먹자고 했을까. 혹시 이렇게 왕성하게 맛있는 것을 함께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려고 했던 것일까,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산낙지를 회로 먹든, 갈비와 섞어 끓인 갈낙탕을 해먹든, 최고로 치는 것은 전남의 세발낙지다. 가느다란 발과 작은 사이즈의 연한 낙지는 어떻게 먹어도 맛이 있다. 하지만 값이 비싸서 누가 사줄 때나 먹어보는 것이지 내 손으로 함부로 사먹기가 힘들다. 결국 주부가 된 후 즐겨 사게 되는 식재료는 세발낙지가 아닌 보통 낙지, 그것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기절낙지’다.

원래 기절낙지란 말은 산낙지 먹기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낙지를 다듬으면서 반쯤 죽여서 내놓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방금 전에 죽은 싱싱한 낙지라는 의미로 쓴다. 해산물 맛의 관건은 신선도이니, 신선한 낙지를 찾는 손님을 위해 이런 말을 쓴 것이다.

아예 중국산 낙지를 사면 더 싸지 않으냐고?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냉동된 중국산 낙지 값은 국산과 비교하면 정말 싸다. 하지만 맛이 전혀 다르다. 낙지의 매력은 달착지근한 육질 맛인데, 중국산은 국산에 비하자면 거의 맹탕이라 할 만하다. 이것은 주머니가 비었으나 정말 간절하게 낙지볶음이 먹고 싶을 때에, 뻘겋게 범벅이 된 고춧가루 양념 맛으로 먹으려고 작정을 했을 경우에나 사는 것이다.

제철 맞은 가을 낙지로 양념 맛이 강한 낙지볶음을 하기에는 좀 미안하다. 그것보다는 맑은 연포탕이 제격이다. 낙지는 그 자체가 워낙 맛있는 재료이므로, 낙지만 오래 끓이면 국물도 맛있다. 하지만 그렇게 끓여버리면 낙지 건더기가 질겨지고 맛이 없어진다. 이것이 늘 해산물탕의 딜레마다. 선택은 두 가지. 낙지 국물을 먼저 내고 거기에 새로운 낙지를 넣어 살짝 익혀 먹거나, 아니면 국물을 다른 재료로 내거나 하는 것이다.

값비싼 세발낙지를 국물용으로 쓰는 통 큰 사람은 거의 없으므로, 일반적인 방법은 바지락이나 모시조개, 다시마, 무 등을 미리 끓여 국물을 내는 방법을 쓴다. 멸치 비린내가 거의 나지 않는 죽방멸치가 있다면 그것을 조금 섞어 넣어도 된다. 하여튼 어떤 재료라도 너무 많이 들어가면 그 맛이 강해져서 맑고 시원한 낙지 맛이 묻혀버릴 우려가 있으니, 국물 재료는 그야말로 감칠맛을 위한 베이스라는 태도로만 써야 한다.

준비해 둔 국물이 팔팔 끓으면 마늘 등으로 양념을 하고, 여기에 깨끗이 씻어놓은 낙지를 넣는다. 낙지는 빨판에 개펄의 흙이 있을 수 있으므로 세심하게 준비해야 한다. 배추 썬 것, 미나리, 쑥갓 등 여러 야채를 함께 넣어 아예 전골처럼 끓이는 방법도 있으나, 나는 오로지 낙지만 넣은 깨끗한 연포탕을 더 좋아한다. 낙지를 넣을 때에 대파를 조금 넣는 것으로 족하다. 간은 소금으로 하는 사람도 많은데, 내 취향은 역시 조선 간장이다.

맑고 시원한 국물 맛은 정말 품격이 있다. 뜨거운 국물에 들어가자마자 익어버린 낙지를 건져 양념간장에 찍어 먹으면 그 쫄깃한 맛은 또 어떤가. 주꾸미의 탱탱함이나 오징어의 말랑함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낙지만의 질감이 매력적이다. 훌훌 마시듯 국물을 떠먹으면, 어느 해장국보다도 속이 편하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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