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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에 구운 호박고구마, 노오란 속살이 말캉

가을을 정리하는 일손이 바빠지는 계절이다. 밭의 한쪽에서는 통배추와 무, 갓, 대파 같은 김장거리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겠지만, 여름작물이 자라고 있던 밭들은 첫 서리가 내린 이후로 급격히 정리 모드로 들어섰을 것이다. 그 장하던 호박잎은 언제 그랬냐 싶게 다 사라져 버리고, 둥글고 누런 늙은 호박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을 것이다. 땅속에 묻혀 있어서 아직 서리의 피해를 보지 않은 고구마도 더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캐야 한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 <34> 달콤하고 포근한 햇고구마

시장에 햇고구마가 한창이니, 이 맛있는 것을 어찌 거부할 수 있으랴. 고구마는 바로 이 계절에 가장 맛있고 값도 싸다. 집에 무언가를 보관할 여유가 있다면 이런 때에 아예 한 상자 사 놓는 것이 좋다. 인터넷으로 농장과 직거래해도 되고, 트럭에 싣고 와서 동네방네 돌아다니는 상인에게 사는 방법도 있다.

트럭 행상을 이용할 때에는 딱 한두 가지만 파는 사람에게 사는 것이 현명하다. 온갖 반찬거리를 다 가지고 오는 행상의 경우, 도매에서 떼어오는 물건이니 보통의 시장 물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딱 한두 품목만 산더미처럼 싣고 오는 행상은, 산지에서 직접 싣고 오는 상인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가격이 저렴하고 신선도도 비교적 좋다.

요즘 고구마는 어릴 적에 먹던 그 품종은 아닌 듯하다. 나는 어릴 적에 밤고구마를 좋아했다. 전라도 출신들은, 한겨울 아랫목에 묻어놓고 먹던 말캉한 ‘물감자’(전라도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하므로 이는 ‘물고구마’를 의미한다)를 고향의 맛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고구마에 어찌나 물이 많은지, 껍질을 깐다기보다는 마치 연시처럼 속의 육질을 쭉 빨아먹는 느낌이 들 정도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 달고 따뜻한 물고구마가 긴 겨울밤의 허기를 달래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 같은 서울내기는 밤처럼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훨씬 좋아했고, 이런 아이들을 위해 엄마는 늘 가게 앞에서 고구마를 만지작거리며 밤고구마일까 물고구마일까를 망설였다.

이런 도시인의 입맛 때문일까. 물기 적고 당도가 높은 새로운 품종의 고구마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부터는 “이거 밤고구마예요?”라고 묻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모든 고구마가 그냥 달고 포근포근한 밤고구마였다. 그러던 것이 색깔 있는 채소의 효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육질이 주황색인 호박고구마, 껍질은 물론이고 속까지 보라색인 자색고구마까지 인기를 얻고 있다.

내 입맛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쪄 먹기에는 밤고구마 맛이 윗길이다. 아무래도 수분을 공급하면서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호박고구마는 상대적으로 물기가 많아 예전의 물고구마에 가깝다. 따라서 생식을 할 때나 구워 먹을 때에는 호박고구마가 훨씬 맛있다. 물기가 많고 육질이 연한 물고구마는 날 것으로 먹어도 뻑뻑한 느낌이 작다. 간식으로 먹거나 얇게 썰어 샐러드 등에 넣을 때에 적합하다.

고구마는 구워먹는 것이 가장 맛있고, 그중 장작불 곁에서 굽는 게 최고다. 장작불을 때고 난 후 아궁이에 남은 뜨거운 재, 혹은 장작난로 밑에 떨어지는 뜨끈한 재에 묻어놓는 것이다. 재 속에 파묻힌 고구마는 금세 익는다. 이렇게 익힌 군고구마의 구수하고 은근한 맛을 그 어디에 비할 수 있으랴. 밤고구마도 맛있지만, 특히 물기가 많은 호박고구마를 구우면 노랗게 익은 속살이 촉촉하고 말캉한 것이 그야말로 환상이다.

하지만 장작난로가 있었던 시골집을 떠나왔으니 이런 호사를 더 이상 누릴 수는 없다. 정 군고구마가 먹고 싶으면, 가스오븐에 굽거나 물 없이 익히는 냄비를 이용해 엇비슷한 맛을 기대할 수밖에. 이런 방식으로 물을 가하지 않고 굽듯이 익힐 때에는 호박고구마가 좋다. 수분을 많이 발산시키기 때문에 밤고구마는 매우 뻑뻑해질 수 있는 대신, 수분이 많은 호박고구마는 적당히 물기를 날려보내면서 익히기 때문에 훨씬 달고 맛있어진다.

보통의 밤고구마를 먹는 가장 일반적 방법은 기름에 지지거나 쪄먹는 것이다. 고구마를 수세미로 잘 닦고 흠에 낀 흙을 칼로 제거하고, 어슷어슷 썰어 부침옷을 입혀 기름에 지진다. 달착지근하고 포근한 고구마 맛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잘 어울린다. 게다가 수확한 지 얼마 안 되는 햇고구마는, 아직 싱싱한 향취가 그대로 살아있고 육질의 포근한 맛도 훨씬 부드럽다. 출출한 밤에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함께 먹으면 이처럼 좋은 안주가 또 없다.

찐 고구마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껍질째 전자레인지에서 익히거나 냄비에 삼발이를 넣고 증기로 익히는데, 감자보다 짧은 시간 안에 말캉하게 잘 익는다. 물에 넣으면 고구마가 싱거워질 수 있다. 특히 호박고구마를 찔 때에는 더 더욱 그러하다.
고구마를 먹을 때 꼭 필요한 것이 김치다. 이 대목에서 남편과 나의 취향이 갈린다. 남편은 빨간 배추김치를, 나는 맑은 국물이 있는 동치미를 원한다. 어릴 적 한 손엔 찐 고구마를, 다른 한 손엔 동치미 무를 들고 번갈아 베어 먹던 기억 때문일까. 다소 목이 메는 고구마는, 시원한 김칫국물과 함께 먹어야 제 맛이라고 나는 주장하는데, 남편은 마늘과 생강 냄새까지 어우러진 제대로 된 김장김치를 먹어야 제 맛이란다. 고구마를 먹을 때에 남편은 그 뻘건 김칫국물을 숟가락으로 퍼먹으며 “맛있다”를 연발한다.

고구마를 쪄 먹으면 늘 몇 개씩 남는다. 그럴 때에 나는 으깨어 샐러드를 한다. 식은 찐 감자에서 아린 맛이 나는 것에 비해 고구마는 식어도 아무 잡냄새가 없고 오히려 단맛이 강해진다. 찐 고구마를 으깨어 놓고 양파와 피망, 브로콜리 등 야채 다진 것과 마요네즈, 후추 등을 넣어 섞는다. 자연스러운 단 맛을 즐기는 내 입맛에는 매시드포테이토보다 훨씬 더 맛있다.

내친김에 남은 고구마로 크림수프를 해먹어도 좋다. 찐 고구마를 으깨어 우유와 육수(혹은 물)를 붓고, 양송이 등 건더기 재료를 넣고 끓이면 된다. 취향에 따라 으깬 고구마를 버터에 살짝 볶아 끓여도 되고, 아예 찐 고구마와 우유, 양파를 믹서에 넣고 갈아서 끓여도 된다. 수프를 끓이다가 마지막에 모차렐라치즈를 좀 넣어 함께 끓이면 약간 끈적한 느낌이 생기고 치즈의 향취가 더해진다. 간은 소금으로 하고, 먹기 전에 후추를 넣는다. 저녁때 쪄 먹고 남은 고구마를 으깨어 얼추 끓여두고, 바쁜 아침에 양송이나 브로콜리 등을 넣고 제대로 다시 끓이면 빵이나 떡 한쪽과 곁들여 훌륭한 아침식사가 된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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