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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에 아찔해지는 毒酒처럼 그에게 빠지면 피가 끓는다

청년 말러의 영혼이 지휘자 정명훈의 손끝에서 되살아났다. 3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서울시향이 들려준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은 단순히 음악이 아닌, 젊은 말러의 고뇌를 1인칭적으로 느끼게 하는 하나의 ‘체험’이었다. 어느 순간 정명훈이 혹 말러의 아바타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청중들은 1악장에서 말러와 함께 아침 들판을 거닐고, 2악장에서 오스트리아 민속춤을 추었으며, 3악장에서 죽음의 안식을 느낀 후, 4악장에서 분노를 터뜨리고 종국에 승리감의 절정을 맛보았다.싱그러운 봄을 그린 1악장에서 뉘앙스가 부족하여 아쉬움이 있었으나 2악장 이후부터는 군소리 없이 훌륭한 연주였다. ‘정명훈 말러’라는 브랜드의 개성과 충만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서울시향의 가공할 만한 응집력은 지난 8월 열렸던 말러 ‘부활’ 공연 때보다도 더욱 업그레이드돼 있었다. 정명훈의 해석은 롤러코스터를 연상케 할 정도로 템포의 운용이 변화무쌍하고 다분히 주정적이었다. 감히 번스타인의 한국적 변용이라고 평하고 싶다. 어차피 말러의 음악은 달콤한 초콜릿이 아니라 한 잔만으로도 정신이 아찔해지는 독주(毒酒)와 같은 것이다.

요즘 말러를 모르면 음악을 이야기하지 말라는데

예술의전당에 운집한 청중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모두 피끓는 젊은이가 된 기분이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라고 시작하는 ‘청춘예찬’에서 보아온 포장된 청춘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실연과 상처로 찢긴 가슴, 타협을 모르는 꼿꼿한 정기, 사춘기적 방황과 자기학대, 비루한 인생에 대한 절망과 분노로 가득한 ‘젊은 날의 초상’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곡이 끝나자 좌석에서 용수철이라도 튀어오른 양 반사적으로 기립박수가 시작되었다. 커튼콜은 흡사 록 콘서트를 방불케 했는데 이는 다른 작곡가의 교향악 연주회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진풍경이기도 하다.

교과서에서도 안 배운 생소한 말러
요즘의 ‘말러 열풍’은 확실히 유별나고 기이한 구석이 있다. 베토벤이나 차이콥스키처럼 폭넓은 대중적 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쌓아 올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름난 말러 공연의 경우 티켓 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지만 과거에는 사정이 달랐다. 공연계에서는 말러와 고음악 공연을 같은 유형으로 보아왔다. 초기 예매율은 높지만 정작 흥행상으로는 보통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이상하게도 대부분이 티켓을 꼭 솔로로 구입한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말러라는 이름부터가 벌써 생소하다. 말러는 중ㆍ고등학교 정규 교과서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 소위 ‘듣도 보도 못한’ 작곡가인 셈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말로로 착각하는 경우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맥주 브랜드 밀러와 헷갈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 점에서 우리는 말러의 음악이 평범한 다수가 아닌 강력한 소수를 만족시키는 음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말러 음악의 부흥은 미세한 진동이 종국에는 거대한 폭풍우를 형성하는 ‘나비효과’에 다름 아니다.

어떻게 하여 말러가 붐을 이루게 된 것일까? 해외에서는 1960년대에 이루어진 번스타인의 말러 전곡 녹음이,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에 이루어진 부천필 말러 전곡 사이클이 중요한 기점으로 꼽히고 있다. 물론 말러 열풍의 이러한 기폭제가 우연히 발발한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브루노 발터, 클렘페러, 멩겔베르크 등 말러와 교분을 나누었던 지휘자들이 꾸준히 말러를 다루었고, 미국에서는 스토콥스키와 미트로풀러스가 말러 연주의 포석을 깔고 있었다.

국내의 경우 부천필이 말러 붐을 일으켰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음악칼럼니스트 황장원씨는 “부천필 말러 전곡 사이클의 엄청난 성공에는 음악잡지 ‘객석’‘음악동아’‘레코드 포럼’을 보며 말러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해온 국내 음악 애호가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국내를 휩쓴 인터넷 열풍이 말러 매니어의 결속에 도화선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들은 자신과 유사한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을 알게 되면 “너도 환자구나” 하며 측은해 하며 동시에 신기해 한다. 온라인 활동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오프라인 감상회와 술자리를 통해 모종의 동지 의식을 느끼게 된다.

2003년 5월 31일 열린 부천필의 말러 교향곡 8번 공연은 하나의 경악할 만한 ‘사건’이 되었다. 말러 공연이 전석 매진을 달성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엄청난 물량과 예산이 소요돼 매진되어도 어차피 적자를 면하기 어려운 8번이지만, 이는 단순한 셈의 논리를 떠나 국내 음악계를 흔들어 놓을 정도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말러가 여심(女心)을 흔드는 잇백(it bag)처럼 애호가를 설레게 하는 ‘잇’ 작곡가가 되는 순간이다.

특유의 발상과 포스트 모던의 만남
말러 붐의 요인으로 여러 가설이 있다. 고독한 현대인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음악어법, 하이파이 오디오의 발달, 말러 음악의 세례를 받은 할리우드 영화음악의 대중화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것에서부터, 유대인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했다는 터무니없는 음모론까지 다양하다. 사견으로는 숭고한 찬송가 풍의 악상에서 조야한 거리음악까지 마구 혼합하는 말러 특유의 발상이 현대의 포스트모던 예술사조와 맞아떨어지는 면도 있다고 본다. 지금의 시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베토벤 같은 천재 혹은 영웅 예술가가 더 이상 나올 수 없는 시대다. 걸작이 무한복제돼 발에 채이는 이 시대에 말러의 선구적인 다(多)문화가 묘한 쾌감을 안겨주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가설들은 하나의 현상을 놓고 역으로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분명한 것은 말러 음악의 시대정신이 작곡가 당대의 사람들이 아닌 현대인을 위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인은 너무나 바쁘다. 듣기 좋지 않은데 굳이 이유를 갖다 붙인다고 들을 리 만무하다. 말러 붐의 원인은 실지로는 그냥 ‘듣기 좋아서’ 때문이 아닐까.말러의 교향곡은 모차르트처럼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종류의 음악이 아니다. 음악이 귀에 감길 때까지 무작정 반복 청취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된다면 당장 서점에 들를 것을 권한다. 말러의 전기로는 대략 4000 쪽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로 명성이 자자한 앙리 루이 들라 그랑주의 저작이, 교향곡 분석서로는 콘스탄틴 플로러스의 통찰력 있는 저서가 권위 있지만 아직 번역서가 나오지 않았다.

현재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말러 서적으로는 애제자 발터가 쓴 회고록 『구스타프 말러』(김병화 역, 마티), 난해하면서도 철학적인 통찰력이 돋보이는 아도르노의 『말러-음악적 인상학』(이정하 역, 책세상), 촌철살인과 독설이 특징인 노먼 레브레히트의 『왜 말러인가?』(이석호 역, 모요사) 등이 있다. 그리고 2004년부터 1년 간격으로 발간되었던 필자의 종합 해설서 『구스타프 말러』(밀물) 3부작이 최근 합본되어 『김문경의 구스타프 말러』라는 타이틀의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되었다.올해가 말러 탄생 150주년이고 내년이 서거 100주년이다 보니 볼 만한 공연도 차고 넘친다. 올해 가장 기대되는 공연은 12월 30일 열리는 서울시향의 말러 3번 공연이다.

알토 독창, 여성합창단, 소년합창단에다 100여 명의 ‘풀 옵션’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요구하는 작품으로 한 곡의 연주시간이 무려 100분에 달한다. “교향곡은 세계를 품어야 한다”는 말러의 음악관이 가장 잘 구현된 이 곡을 정명훈이 과연 어떻게 요리할지 궁금하기만 하다. 2011년 12월 22일 예정되어 서울시향의 2010~11년 말러 사이클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말러 8번 공연도 주목할 만하다. 8번은 엄청난 물량 때문에 공연 성립이 애초에 드물고 말러 애호가로서도 일생에 실황으로 몇 번 못 보는 레퍼토리에 속한다.

말러의 묘미는 ‘어떻게 듣는가’
이제는 ‘왜 말러인가?(Why Mahler?)’의 치열한 담론보다는 ‘어떻게 말러를 듣는가?(How Mahler?)’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음악을 즐기는 수단이 단지 오디오로 제한되어 있던 과거에 비해 감상의 방법론이 놀랄 만큼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DVD 혹은 블루레이가 보편화되면서 말러를 고품질의 영상으로 즐기는 AV파가 급속히 늘고 있다. 한편 클래식 음반 전문매장 풍월당이나 각종 공연 아트센터에서 개설되어 있는 말러 강의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자세한 해설과 영상물 감상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 때문에 초심자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콘서트 고어(concert goer)들은 말러 음악의 감동과 매력을 공연장에서 가장 크게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내 수준의 연주로 만족하지 못하는 애호가는 유럽으로 떠나기 위해 급기야 인천공항을 밟고야 만다. 말러가 살았던 유럽의 공기를 마시며 유럽의 콘서트홀에서 유럽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는 것은 확실히 남다르리라. 그러다 보면 베를린, 빈, 암스테르담, 라이프치히, 루체른으로 날아가 말러의 사도가 되고 만다. 어느새 말러의 역사적 명소를 찾아 헤매고, 말러의 악보를 수집하며, 급기야 ‘부활’만 지휘하는 억만장자 카플란처럼 말러를 직접 지휘할 날을 꿈꾸기도 한다. 바그너는 감상자에게 온전한 복종을 요구하지만 말러는 감상자가 평론가나 해석가의 경지까지 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준다. 말러 음악을 즐기는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작곡가의 언급은 현재 신묘(神妙)한 예언처럼 맞아 들어가고 있다.


당신의 취향은 독한 말러? 순한 말러?
말러 교향곡 해석 경향은 크게 ‘독한 말러’와 ‘순한 말러’로 나뉜다. ‘독한 말러’는 말러 음악의 고통과 열락을 철저히 자기화하여 다루는 경향을 가리키며, 번스타인이나 텐슈테트의 해석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번스타인의 1980년대 신녹음 전집(도이체그라모폰)은 해석의 호불호를 떠나 말러를 가장 말러답게 들려준 위대한 시금석(試金石)이다. 단연 말러리안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에 속한다. 조울의 골이 깊었던 텐슈테트는 컨디션에 따라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스튜디오 녹음보다는 라이브 음원이나 해적음반에서 온전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순한 말러’는 말러의 격렬한 감정선이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조절하는 유형으로, 이러한 해석의 대가로는 도회적이고 세련된 아바도, 온화한 카리스마의 샤이, ‘중용의 미학’ 하이팅크 등이 있다. 특히 아바도의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영상물(유로아츠)은 뛰어난 화질과 지휘자의 절차탁마(切磋琢磨)를 느낄 수 있는 수준 높은 연주로 인기가 높다. 말러 음악을 3인칭화하여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해석하는 지휘자도 있다. 지휘자의 영향력이나 함수를 완전히 제거하려는 불레즈,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는 스마일 정신의 틸슨 토머스, 말러를 흡사 20세기 음악처럼 해석하는 길렌, 시대악기 연주 코스튬플레이(costume play)에 몰두하는 노링턴이 바로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말러의 음악을 해석하는 방법론은 십인십색이라 할 정도로 개별적이고 다양하다. 또한 이들 이질적인 해석이 모두 나름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음악 해설을 할 때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음악 칼럼니스트. 서울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제학을 전공,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현직 특허청 약무사무관이기도 하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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