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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그 집 앞









정광수(丁珖秀·1909~2003) 명창. 조선의 마지막 해인 1909년에 국창 정창업의 손자로 태어나 국창 김창환에게 배웠고, 이후 유성준·정응민·이동백 등 일세의 명인을 만나 탁마했다. 20세기를 송두리째 다 바쳐 얻은 소리를 2003년 10월까지 후학에게 인계했고, 동년 11월 3일 향년 95세로 타계했다.



 유족들은 음력으로 제사를 지내겠지만, 나는 홀로 양력으로 기일을 기억한다. 종로3가 국악2길을 배회하다 예전 ‘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 자리에서 잠시 멈춰서는 것이 내 의례의 전부다. “여기가 거기였소.” 전날 선생이 초라한 국밥집 앞에서 말했을 때, 동공에 다큐멘터리의 CG처럼 화려한 옛 풍경이 그려졌다. 누각이 치솟았고, 날씬한 처마는 수꿩이 “파다닥!” 나는 듯 단청이 화려했다. 세상에 그렇게 그리운 눈빛이 또 있을까 싶었다.



 한때 판소리는 왕후장상을 사로잡았고, 소리꾼은 벼슬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자 장바닥을 전전했다. 1934년, 떠돌던 소리꾼들이 한자리에 모여 위대한 꿈을 꾸었다. 이동백·송만갑·정정렬·김창룡 등 전설적 명창이 주축이 되고 당대의 명창과 명고수, 가야금병창, 산조명인 등 130여 명이 참여한 조선성악연구회다.



 “왜놈들 기세가 서슬퍼런데 ‘조선’이란 말을 썼단 말이오.” 선생에게 조선은 이상향이었다. 신의주에서 해방을 맞았는데, 하루 종일 “조선 만세!”를 부르고 다녀 갓에 먼지가 허옇게 쌓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그리던 조선은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벼슬을 주고 국창으로 대우받던 그 나라가 사라진 것이다. 다행이 대한민국에서 1964년 문화재제도가 생겨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선생의 말년에 지정되기 시작한 세계무형유산걸작은 마지막 희망이었다. 마치 벼슬을 하사하던 조선을 대신해 세계가 소리꾼에게 교지(敎旨)를 내리는 것으로 생각했다. 타계 일주일 전, 지정한다던 판소리가 어찌되었는지 전화로 물었다. 2002년 유네스코의 ‘세계무형유산걸작 선정위원회’에 제출할 판소리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여했기에 일 년 내내 받은 전화였는데, 마땅한 소식을 전하지 못한 그 통화가 마지막이 되었다.



 출상 후 ‘11월 7일 오후2시 (프랑스 현지시간) 제2차 세계무형유산걸작에 판소리가 선정되었다’는 기사가 인터넷에 떠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기뻐했을 그분을 잃은 슬픔이 몰려왔다. 선생이 판소리의 성지로 생각했던 조선성악연구회 자리를 찾아 소주 한 병을 부었다. 그때 초라한 국밥집은 변변치 않은 횟집으로 변해 있었다.



 7년이 지난 지금 그 집 앞에 서니, 이제는 생고기전문점이 돼 있다. 모래 11월 7일이면 판소리 세계무형유산걸작 지정 7돌이 된다. 이 나라의 전통예술을 넘어 인류가 이룩한 ‘또 하나의 음악’으로 인정하고 지정한 것이다. 그런데 웬일인가. 그 위대한 소리를 품어낸 그 집이 고깃집인 것이다. 국밥집이던 시절 “이 자리가 이러고 있을 자리가 아닌데”하던 선생의 말이 귓전을 맴도는데 종로구 익선동 159번지 그 집은 여태 그러고 있는 것이다.



진옥섭 한국문화의집 코우스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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