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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배고팠던 60년대, 아이들 희망 지켜준 ‘라이파이’의 창조자 ‘김산호’

미국의 수퍼맨. 일본의 아톰. 그렇다면 한국엔? ‘라이파이’가 있었다. 태백산을 근거지로 가슴팍에 ‘ㄹ’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제비기(機)에서 줄을 타고 내려와, 레이저 광선총으로 악한을 무찌른 정의의 사도. 1959년 궁핍함과 상실감에 찌들었던 시절,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곧장 만화가게로 달려가는 진풍경을 낳았다. 그러곤 ‘라이파이’를 보며 과학자와 영웅의 꿈을 맘껏 키웠다. 라이파이를 창조한 김산호 화백이 어느덧 일흔 살이 됐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젊었다. 스스로를 ‘꿈꾸는 자(Dreamer)’라 불렀다. “아직 세상에 꿈을 팔고 싶다”고도 했다. ‘상상과 창조·도전’이라는 라이파이 정신을 여전히 가슴팍에 새긴 노(老)신사. 김 화백을 25일 경기도 용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만화 탓에 공부 못 했다 ? 라이파이 팬 중엔 과학자 수두룩”

글=김준술 기자 jsool@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경기도 용인 작업실의 김산호 화백.앞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라이파이모형. 뒤쪽 모니터의 화면은 환웅과 웅녀가 단군을 안고 있는 그림. 그는 최근 한민족사를 그림과 글로 정리하는 작업에 여념이 없다.







● 지금 세대는 ‘라이파이’를 잘 모릅니다. 그 시절엔 대단했다죠.



 “한국에서 5급 공무원 월급이 4000원이었어요. 그때 제가 40만원 넘게 벌었고요. 엄청난 수입이었죠. 인기가 그렇게 많았으니. 아마 그런 기록은 영원히 안 나오지 싶어요. 우리 만화 시장 규모가 크지 않잖아요.”



 ※ 라이파이는 당시 한국에서 ‘성경’보다 많이 팔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김산호 화백은 대뜸 “이거 보여줄까”하면서 책상에서 뭔가 들고 나왔다. 라이파이 등장인물을 그려 넣은 1999년도 기념 우표였다. 나라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몇년 전엔 라이파이의 59년판 3부 1권이 경매에 나왔다. 그 직전 TV 프로그램에선 300만원으로 가격을 매겼는데, 경매에 나오니 2000만원까지 뛰었다. 그만큼 애착을 가진 독자들이 많다는 얘기다. “1부의 1권이 있으면 아마 1억원을 넘을까? 사실 그 책은 나도 갖고 있지 않아요, 하하.”



● 그토록 인기 있던 라이파이도 나이로 따지면 벌써 쉰한 살입니다.



 “지금 제가 만화 쪽으로 한국에서 가장 원로 중의 한 명이 됐어요. 사실 데뷔는 빨랐죠. 라이파이가 선보인 게 59년이니. 대학교 다니면서 책을 낸 거예요. 그게 ‘인스턴트 히트(Instant hit)’를 쳤죠. 독자들은 ‘우리가 초등학교·중학교 다니면서 열광했으니 라이파이 할아버지는 늙어서 세상을 떴겠지’ 생각해요. 그러다 저를 만나면 기절하려 하죠.”



● SF 생각하기가 힘든 시절에 어떻게 라이파이 그릴 맘을 먹었습니까.



 “미국엔 나라를 지키는 만화 ‘히어로’가 있잖아요. 수퍼맨과 배트맨같이. 일본도 ‘아토무(아톰)’ 같은 게 있었고. 그런데 한국엔 아무것도 없었어요. 우리 실정으로 과학에선 질 수 있지만, 그림에선 질 게 없다고 봤죠. 그런 데서 라이파이라는 영웅을 착안한 거예요.”











● 라이파이는 한글입니까. 아니면 영어입니까.



 “그 질문을 사실 가장 많이 받아요. 라이파이가 2100년대의 얘기입니다. 이름도 지금과 다르게 부를 것이라고 상상했죠. 그런데 ‘1234’ 이렇게 숫자로 성명을 지으면 죄수 같고, 그래서 뭔가 아름다운 ‘코드화’된 기호로 사람을 부를 수 있겠다고 착안했죠. 그런 생각을 하다 ‘라이파이’라는 쉬운 발음이 떠오른 거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네, 하하. 어쨌든 컴퓨화된 그런 세상을 당시에 생각한 거죠.”



● ‘라이파이’가 사람들에게 뭘 남겨줬을까요.



 “그걸 읽고 상상력을 기른 아이들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박사도 되고 그랬어요. 3년 전에 라이파이의 팬클럽 정회원 700여 명을 분석해 봤죠. 과학자·교사·변호사·의사·사업가들이 많아요. 물론 성공한 사람들이 여유가 있으니 팬클럽에도 들어오고 했겠지만…. 만화 나쁘다고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 당시 만화를 좋지 않게 여겼나 보죠?



 “그렇죠. 하지만 만화 때문에 공부 못한다는 건 아동문학가들의 모략이었다고 생각해요. 가장 타격받는 층이었거든. 그런데 만화 보고 망한다는 아이들이 지금 이렇게 성공한 겁니다. 세상에 잉카 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때, 라이파이엔 중미 안데스 산맥의 ‘인카 제국’ 얘기가 나오잖아요. 굉장히 업그레이드된 스토리였죠.”



● 그런 다채로운 상상력의 세계를 구현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상상력이란 게 그런 겁니다. 우선 하나를 생각하면, 거기서 뿌리가 나와 둘이 되고, 그게 다시 넷이 되고…. 예컨대 수퍼맨은 하늘을 날지만, 라이파이는 제비기를 타고, 그 제비기를 부르려면 삐삐 같은 발신기가 필요하고, 이런 겁니다.”



 ※ 창조력을 내뿜으려면 일단 뛰어드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김 화백에게도 모든 게 술술 풀린 건 아니었다. ‘인민해방군’이라는 적의 옷에 ‘붉은 별’을 그려 넣었는데, 그와 싸울 때 라이파이가 고전했다. 그것이 북한 인공기에 지는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그는 66년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도 받았다.











● 미국으로 건너간 건 그런 창작의 고초 때문이었나요.



 “원래는 좀 더 큰 세계를 보려고 간 겁니다. 처음엔 일본에 가서 만화를 그리려 했죠. 하지만 이왕에 가려면 미국이라고 생각했어요. 만화의 원조인데 말이죠. 스카우트된 것도 아니고 훌훌 날아가 만화회사를 찾아가 인터뷰도 하고 계약하고 그랬어요. 미국에서 그린 제 책에도 어김없이 한글이 나오고, 거북선이 나옵니다.”



 ※ 미국에서 75년 그린 ‘약속(The promise)’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恨)을 품은 여자 귀신이 등장하는 지극히 한국적 정서의 작품이다. 모든 내용을 한글로 표기하고 밑에 영어 번역을 넣었다. 그런 작품에 현지인들이 반응을 보였느냐고 묻자 김 화백은 “인기가 굉장히 많았다. 팬레터도 많이 왔다”고 답했다.



● 80년대 뒤론 한민족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죠? 정통회화 기법으로 그린 ‘대조선제국사(大朝鮮帝國史)’도 내놨는데요.



 “사실 요즘에도 만화가라기보단 역사가라는 사명감을 갖고 일합니다. 친구들 만나면 손 떨고 지팡이 짚고 난리예요. 원래는 80세 지나서 유고 작품을 만들려고 했는데 얼마 전부터 시작했어요. 한민족 역사를 총정리해서 1500쪽에 걸쳐 회화와 글로 엮어내는 작업이죠. 특히 한반도에 갇힌 반도사(史)가 아니라, 키르기스스탄부터 바이칼호·몽골·만주를 거쳐 일본까지 이르는 한민족의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할 겁니다. 자랑스러운 ‘한민족 벨트’를 풀어내는 일이죠. 답답하게 한국에선 이런 걸 안 가르치니 저 같은 사람이라도 나서야죠.”



● 역사학자도 아닌데 왜 그런 작업에 힘을 쏟습니까.



 “한국을 떠난 게 벌써 45년 전이에요. 인생에서 미국 생활이 더 길었죠. 해외 나가서 10년 있으면 애국자가 된다잖아요. 저 같은 사람은 ‘환쟁이’(※ 화가를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미국 패스포트로 온갖 세상을 돌아다녀 보니 우리 민족사를 그림으로 되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죠. 미국 전역엔 도서관이 4만6000개 있어요. 그런데 K자 목록에만 가면 책이 없어요. 한국 관련서가 드물다는 거죠. 특히 역사책요. 제가 만든 책을 그 도서관에 전부 최소 한 권씩 넣을 겁니다. 사가게 만들든지, 독지가 도움을 받든지 말이에요.”



● 밥 굶기 딱 좋은 일인데요.



 “저는 복 받았어요. 일찍 미국에 진출해 성공했고 돈에 구애받지 않고 살았어요. 그러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역사화라는 게 배고픈 일이죠. 저기 놓인 제 그림을 보세요. 화폭에 3명이 있죠? 만주군관학교에서의 박정희 대통령, 초창기 자동차를 만지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유격 활동을 하는 김일성이잖아요. 그런데 박정희의 일본군 데쓰가부도(철모)만 해도 모양새를 고증해서 그려야 돼요. 망원경도 일본식이 따로 있고요. 이걸 그리려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해야 할까요. 그래서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안 되면 못해요. 저처럼 있는 재산 다 팔아서 마누라에게 구박받으면 모를까, 하하.”



● 책을 냈는데 안 팔리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학교를 직접 세울 작정입니다. 한국에서 도움 줄 사람을 찾았는데 잘 안 돼서, 내년까지 LA에 대학원 중심의 대학을 만들 생각입니다. 다행히 뜻 있는 재미동포들이 나서고 있어요. 책이 안 팔려도 거기서 한민족사를 가르칠 수 있는 거죠.”



● 건강이 허락합니까. 함께 활동하신 고우영·신동우 화백 등은 모두 작고하셨습니다.



 “제가 건강은 좋아요. ‘관리사’(※ 부인을 지칭)가 잘 해줘. 특별히 운동하는 건 없지만. 앞으로 민족사 책 만드는 일에 1년간 매달릴거야. 두문불출하고 말이야. 죽기살기로. 1년간 김산호는 없어져. 그런 각오로 해야 돼요.”



● 한국의 만화 솜씨도 평판이 좋습니다. 후배들을 어떻게 봅니까.



 “실력 좋아졌어요. 그런데 기본적으로 ‘미술적 소양’을 더 갖췄으면 좋겠어요. ‘만화가’ 이전에 ‘화가’가 돼야죠. 미대도 나오고, 기본기를 철저히 익혀야…. 피카소도 추상화 그리기 전에 ‘청색시대’를 보면 완벽한 실력을 갖췄잖아요. 요즘 만화가들은 기본 전에 과장법부터 심취하는 것 같아요. 이번에 미국에서 가져온 책을 봐요. 누드 하나를 그려도 거의 회화 수준이잖아? 또 한국은 지나치게 일본식을 따라가요.”



● 집 대문 위에 만몽재(卍夢齋)라는 현판이 있던데요.



 “제 호가 만몽입니다. 한글 발음으로 보면 ‘만 가지 꿈’을 가졌다는 소리죠. 아임 드리밍 올 더 타임(I’m dreaming all the time). 제가 꿈을 팔고, 또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잖아요. 꿈이 없으면 전 죽잖아요. 라이파이도 그런 거죠. 소중한 추억과 꿈을 공유하게 해준. 개인적으로 그 세대를 ‘라이파이 노스탤지어 세대’라고 부릅니다. 참담하고 굶주렸을 때 희망을 줬으니 미국의 수퍼맨 부럽지 않죠.”



● 만화와 인생, 만화와 세상은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있습니까.



 “만화가적 상상력이 없으면 세상은 많이 달라졌을걸요. 그림 그리는 소양이 있으면 세상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요. 만화가들의 특징은 마음을 열고 세상을 크게 본다는 거죠. 그러면 크리에이트 드림(Create dream)! 이게 됩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걸 만들어 내는 거죠. 마치 라이파이가 그랬던 것처럼요.”
















j 칵테일 >> 임화수 "이 돈으로 콘사이스 사라”











● 그림은 어디서 배웠나요.



 “원래 선비 집안인데, 아버지가 그림을 잘 그리셨어요. 일종의 유전 같아요. 저뿐 아니라 형님도 그림을 잘 그립니다. 저만 그걸 직업으로 선택한 거죠.”



● 극장에서 간판 그림도 그렸다면서요.



 “처음엔 돈 벌자는 생각이 앞섰어요. 제가 1940년생인데 한국전쟁 뒤에 학교를 제대로 못 다녔어요. 극장에서 그림도 그렸고, 중학교는 검정고시로 나왔죠.”



 김산호 화백은 “서울의 문화극장·을지극장·봉래극장을 거쳤다”고 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그런 걸 고생이라고 생각 안 해요. 가수들이 노래 부르면 행복한 것처럼 말이죠. 예술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죠, 뭐.”



 이 대목에서 그는 당대의 주먹 ‘임화수’(사진)씨와의 일화를 처음 공개했다. “그런 극장들이 다 임씨의 테리토리(영역)였거든. 그땐 극장이 만원이면 돈봉투를 만들어 임화수씨가 모든 직원에게 나눠줬어요.” 출근 안 한 직원이 있으면 남은 봉투를 모아 김 화백에게 건넸다고 한다. 그러곤 꼭 하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너, 이 돈으로 콘사이스(영어사전) 사라.” 유명한 주먹도 그를 특별히 아꼈다는 얘기다. 이미 그때부터 남들 눈에도 ‘라이파이의 싹’이 내비쳤던 것일까. 간판일을 그만두면서 임화수씨와의 인연도 끝났지만, 어려웠던 그 시절의 소회는 아직도 김 화백의 가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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