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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여인' 매주 토요일 인터넷연재







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100만권 넘게 팔린 창작소설만 다섯인 이문열 작가. 한국 문학계의 최고 거장인 그가 ‘문학 귀향’을 선언하며 오랜만에 선보인 로맨스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을 중앙일보 인터넷신문(joongang.co.kr)에서도 매주 토요일 만날 수 있게 됐다. 이 소설은 토요일마다 발간되는 중앙일보 ‘사람섹션 j’에 지난 7월10일부터 지금까지 13회째 연재되고 있다. 소설이 입소문을 타고 인기몰이에 나서면서, 보다 많은 독자들이 이문열 작가의 글을 접할 수 있도록 30일부터 『j Novel』코너에서 연재된다.



소설은 이문열 작가가 정말 오랜만에 선보이는 아련하고 별난 사랑 이야기라는 점에서 연재 전부터 비상한 관심을 끌어 왔다. 최근엔 네티즌 사이에서 소설 주인공 혜련(헬렌)의 모델이 카리스마 넘치는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씨가 아니냐고 논박이 생기면서 더욱 화제가 되고 있다.



1주일에 한번씩 1년간 연재될 예정인 소설은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자란 어머니를 둔 ‘다국적 정체성’의 여인이 주인공이다. 기본적으로 유별나고 애틋한 사랑을 담아 내면서, 더 이상 ‘피와 땅’이 개인의 정체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21세기 현실을 의미있게 들려줄 예정이다.



◇13회까지의 줄거리

‘나’는 아파트 이사로 짐을 정리하다 사진 한장을 접하게 된다. 십자가들의 언덕을 찍은 사진. 그 사진을 설명하던 목소리의 임자, 나는 갈색 눈에 금발머리를 땋아 내린 이국 소녀를 떠올리게 된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70년대 중반. 부산에서 재수생 시절을 보내던 ‘나’. 서양인이 사는 집에 관심을 갖게 된다. 금발머리가 진한 소녀는 부산 사투리에 또래들과 고무줄 놀이까지 즐겼다. 어느날, 소꿉놀이를 하던 소녀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코쟁이 가시나, 이제 고마 너 나라 돌아가라”고. ‘혜련’이라는 한국 이름의 소녀와 가족은 그 뒤로 보이지 않았다. 나에겐 음악 책에 나오는 금발의 제니였던 그 소녀….



나는 재수 끝에 연극영화과를 나오고 부산의 작은 극단에서 무보수 조연출로 일하고 있었다. 선배가 ‘리투아니아 남자들’이란 연극을 기획했다. 음악스태프를 뽑는데 이력서에 김혜련이라고 적은 여인이 나타난다. 헬렌, 나의 제니였다. 그 뒤 우연히 서울 대학로에서 만난 혜련은 나에게 러시아 학살에 두려움을 느껴 미국으로 피난 온 리투아니아의 외할머니와 어머니, 고향에 남겨졌다 모친을 찾아 결국 미국까지 왔던 두 이모의 서글픈 가족사를 들려준다. 이후 서울 대학로에서 객원 연출을 맡았던 나는 혜련을 떠 올리고 일을 도와달라고 한다. 서른다섯의 노총각과 스물일곱의 성숙한 여성으로 둘은 만난다. 그러나 나는 혜련과 같이 있던, 그녀가 좋아한다는 남자에게 묘한 적의를 품게 된다. 연극은 크게 성공한다. 혜련의 다른 가족사도 듣게 된다. 어머니가 아리랑을 너무 좋아했고, 야외무대에서 그 노래를 뽑아 제쳤는데 나무 그늘 아래서 동양인이 눈물 흘리더라는. 그 남자는 입양돼서 미국으로 갔던 혜련의 아버지였다는….



◇리투아니아











유럽 대륙에서 배꼽에 해당하는,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한 나라다. 동유럽의 발트해 연안에 붙어 있고, 14세기엔 영토를 남쪽의 흑해까지 넓히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수도는 빌뉴스, 인구는 350만 명, 면적은 한반도의 25%다.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겪었다. 소련(1940년)→독일(41년)→소련(44년)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1990년 3월 독립을 선언했다. 발트 3국(에스토니아 ㆍ라트비아 ㆍ리투아니아) 중에서 가장 낙후됐고 농업의 비중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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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3-2

‘금기 어기고 … 여주인공과 결혼까지’



고독은 공간을 인식 수단으로 삼는 추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밀도와 관련이 깊은 어떤 물질이다. 그것은 우주 속 물질 백에 아흔아홉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암흑물질처럼 볼 수 없거나 느끼지 못할 때도 끊임없이 우리 삶에 중력을 행사한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가 고독을 느낄 때를 우리가 공간과 관련된 갈망이나 결핍의 감정에 빠져 있을 때라고 단정한다. 곧 홀로임 또는 다른 존재들로부터의 단절이나 소외감에 빠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고독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물질의 그것처럼 고독의 중력도 항시적이고 불변이다. 우리가 감지하거나 인식하지 못할 때도 고독의 중력은 여전히 우리 삶을 짓누른다.



 <크루서블>에 이어 턱없이 심각한 몇 개의 현대 번역극 흥행에 성공하는 사이에 80년대가 가고 90년대가 열렸다. 그사이 나는 ‘역량 있는 신진’에서 ‘중견’의 호칭까지 넘보는 연출가가 되었고, 그런 변화에 따라 그때까지 나를 몰아댔던 갈망이나 결핍의 감정에서도 어느 정도는 놓여났다. 비록 연극계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언제나 다른 존재와 관계 속에 있었으며, 깨어 있는 많은 시간 여러 사람과 공간을 함께하였다. 그런데도 그사이 눈앞으로 바짝 다가든 마흔이란 나이가 무의식의 바닥 가까이 밀려나 있던 고독의 중력을 느닷없이 절감케 하고 가중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한심한 것은 속되기 짝이 없는 그 대응이었다. 나는 그 시대의 상식에 충실하게도 여자와의 결혼을 그 엄청난 중력을 해소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으로 삼았다. 아마도 칠순을 넘긴 홀어머니의 당부나 30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한층 빠르게 누적된 사회적 압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까짓것, 정히 그렇다면 아이 두엇 딸린 여자하고 결혼하면 될 거 아냐?”



 어머니나 일찍 결혼한 친구들이 자식 늦어지는 것을 구실로 나를 몰아대면 그런 우스갯소리로 받아쳐 왔지만, 서른아홉 고개에 접어드니 그런 여유도 사라졌다. 거기다가 그새 두 해째로 접어든 혜련의 결혼도 은근한 자극이 되었다.



 혜련은 80년대를 넘기지 않고 내가 본 그 키 큰 음악가와 결혼했다. 그가 작곡한 창작 뮤지컬 <지하철 연가>는 그 이듬해 여름 어떤 실험극 극단이 무대에 올렸지만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씩씩하게 다음 뮤지컬을 작곡하고 있었고, <크루서블> 이후 나와 한두 작품 더 하는 동안에 음악감독으로 어느 정도 인정받은 혜련도 별로 궁색한 기색 없이 무대음악에 관여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사심 없이 혜련의 결혼을 축복하고 두 사람이 행복하기를 빌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마음 한구석으로 나는 그들의 앞날에 불행한 상상을 품고 있었다. 외모의 인종적 특성으로 더욱 강조되게 되어 있는 문화의 차이, 다른 성장환경이 그들의 개성에 남긴 여러 상처 같은 흔적, 시대의 주류에서는 벗어나 있는 그들의 직종과 그들에게 그리 우호적일 것 같지 않은 사회적 분위기 같은 것이 그런 상상의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저주와도 같은 기대가 나도 모르게 작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1년이 넘어도 들리는 것은 그들이 아주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는 말뿐이었다. 그들이 내 가까이 있을 때는 나 자신도 그들을 보고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한번은 혜련과 며칠 극단의 지방공연을 따라간 적이 있다. 두 도시에서 그곳 예술회관을 빌려 사흘씩 공연했는데, 두 곳 모두 그리 크지는 않아도 꽤나 유서 깊은 도시라 공연이 없는 낮시간의 관광 재미는 제법 쏠쏠했다. 게다가 관객 동원도 기대 이상이라 작은 잔치와도 같은 한 주일을 보내고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혜련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소지품 가방을 승합차 뒤에 실은 뒤 내 곁 좌석에 털썩 앉으며 제 나이보다 이십 년은 더 늙은 아주머니처럼 말했다.



 “에휴, 이제 우리 영감한테 가나 보다. 뭐니 뭐니 해도 영감 그늘이 제일이지.”



 우리 식의 우스갯소리나 속담을 인용할 때 잘 그러는 과장된 어법이었으나, 내게는 왠지 진정 섞인 말처럼 들렸다.



 “이번 한 주일이 그런 거였어? 나는 꽤나 즐기는 줄 알았는데.”



 약간 뜻밖이라 내가 그렇게 받자 그녀가 전혀 과장이나 농담기가 없는 말로 받았다.



 “일주일이나 되잖아요. 아무리 한평생 같이 살 사람이라지만, 돌아가려고 보니 너무 오래 떠나 있었던 것 같네요.”



 아마도 내가 그때까지의 상상에 자신을 잃고 알 수 없는 부끄러움까지 느끼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나만 늦도록 홀아비로 남아 갈수록 비뚤어지고 있는 듯한 자괴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 때맞추어 아내가 왔다. 일생에 단 한 번 내 호적에 아내로 올랐던 여자가. 그리워할 것도 애써 잊어버릴 것도 없지만 아직도 그녀를 만난 날짜와 장소가 선명하게 기억난다. 91년 12월 19일 남산 중턱에 있는 한 호텔의 전망 좋은 라운지에서였다.



 그 무렵 현대 실험극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내 정서는 난데없는 고전 취향으로 돌아가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제대로 한번 연출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해 가을부터 가만히 그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데, 눈치 빠른 후배 하나가 찾아와 권했다.



 “형, 접때 말하는 거 보니 다음에 ‘벚꽃 동산’ 해볼 모양이던데, 캐스팅은 대강 끝났수?”



 “아니, 이제 시작이다. 정말 제대로 해보고 싶은데. 특히 라녭스카야는 아직 그림도 못 그리고 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런데 바로 그 라녭스카야 역(役) 말예요. 주제넘지만 내가 한 사람 추천하고 싶은데. 아니 캐스팅 정보 제공이라고 해야 하나?”



 “누구? 나도 아는 사람이야?”



 “아실지도 몰라요. 전윤하라고 우리 대학 때 몇 해 신인 스타로 잘나갔는데. 보자, 그때 형님이 서울로 옮긴 뒤였나, 아닌가?”



 “글쎄, 이름을 들은 것도 같고……. 보자, 걔 그거, ‘신의 아그네스’에서 아그네스 했던 아이 아냐? 극단 ‘전위(前衛)’에서 공연한.”



 “맞아요. 형님도 기억하고 계시네.”



 “하지만 일찍 누군가와 결혼해 외국에 나가 사는 걸로 들었는데…….”



 “그래요. 재벌 방계(傍系)가 반해 보쌈하듯 해 함께 미국으로 갔는데, 삼 년 만에 파탄 나는 바람에 유학길이 되고 말았죠. NYU에서 몇 년 연극 공부 제대로 하고 얼마 전에 귀국했어요. 남은 삶은 무대에서 떠나지 않겠다나요.”



 “너는 어떻게 그 여자를 그리 잘 알아?”



 “외가 쪽 친척 누님이세요. 정말 좋아했는데. 실은 내가 연극영화과에 가게 된 것도 그 누님 영향이 컸어요.”



 “네가 좋아했다고 라녭스카야 역까지 잘 한다는 보장 있어? 더구나 가늠해 보니 아직 서른을 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꽃이여 - 있잖아요? 아직 스물아홉이지만 나이보다는 무르익었을 거예요. 그때 신인 때도 연기 폭이 아주 넓은 분이었고…. 왠지 잘 해낼 것 같아요.”



 후배가 얼굴까지 벌겋게 상기되어 그렇게 받는 바람에 나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만날 약속을 하고 말았다.



 “하긴 연기 폭이 넓다니 라녭스카야가 안 되면 아냐로 쓸 수도 있겠지. 어쨌든 내일 남산에서 보자. 우리 세미나 있는 호텔. 거기서 세미나 앞이나 뒤에 한번 만나 차 한잔 하며 인사나 해두지 뭐.”



 나는 당연히 그날 후배가 그녀와 함께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나온 것은 그녀 혼자였다. 대인 기피증이라도 생긴 건지 얼굴을 반은 가릴 듯한 선글라스를 끼고 호텔 라운지 구석에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했다.



 돌이켜 보면, 처음 만난 그녀의 어떤 면이 나를 이끌어 마침내는 우리를 부부로 묶어놓게 되었는지 정연한 기억은 없다. 약간 쉰 듯한 목소리에 밴 나른한 허무감 같은 것이거나 마침내 선글라스를 벗었을 때 드러난 나이보다 훨씬 지쳐 보이는 얼굴 같은 것이 강한 인상으로 남은 것 같기도 하고, 짧은 시간에 드러나는 조울(躁鬱)의 기미나 태도에 밴 무장 해제된 병사의 그것 같은 망연함이 묘한 호기심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날 이후 마치 기다리던 시내버스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올라타는 것처럼 당연한 듯 사랑에 빠지고 그해가 가기 전에 아내로 맞았다. 부산 시절의 선배가 엄하게 가르쳤던 금기 - 기르는 닭은 잡아먹지 않는다 - 를 어기고 내가 연출하는 무대의 여주인공과 연애에 빠지고 결혼까지 한 것이었다. 그리고 꼭 열 달 꿈같은 밀월이 있었다.



 나중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밀월이었지만, 그 기간 아내에 대한 내 열중은 제법 대단했다. 무엇보다도 혜련에 대한 기억이 그간에는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게 그 한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돌이켜 보면 그녀에 관한 정보가 전혀 입력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나중 그 시절을 향해 품게 된 반감 때문에 인출에서 문제가 생긴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 단 하나 출력되는 것도 그 밀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날도 나는 약간 들떠 있는 듯한 기분으로 공동대표로 있는 극단 사무실로 나갔다가 오랜만에 혜련을 만나게 되었다. 늘 그랬듯 우리는 어제 만났다 헤어진 사람들이 전날 하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는 것처럼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으나 기억나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그녀의 리투아니아 얘기였다.



 “리투아니아 소식이 하나 있어요. 전에 이모네들 이야기 기억나세요? 그때 에레나 이모와 올가 이모 말고 또 한 사람 리투아니아 처녀 얘기를 한 적 있죠? 거 왜 외할머니네 고성(古城)지기 손녀- 소냐 말이에요.”



 무슨 얘기 끝에 그녀가 불쑥 물었다. 그때 극단 사무실에는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있었으나 나도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 반문했다.



 “소냐? 글쎄, 소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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