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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02) 먼저 닥친 인사 문제





육참총장 지낸 정일권, 2사단장 발령 나자 “군 생활 접겠다”



1951년 6월 12일 강원도 속초의 국군 1군단 사령부를 방문한 정일권 제5대 육군참모총장(오른쪽). 백선엽 소장(왼쪽)은 당시 1군단장으로 정 총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불과 1년 뒤 백 장군이 제7대 육참총장에 오르면서 두 사람의 위상이 뒤바뀌었다. 정 장군이 백 장군보다 세 살 위다. [백선엽 장군 제공]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뒤 여러 가지 일이 함께 닥쳤다. 전선에서 일어나는 모든 전투를 매일 체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선에 나가 있는 부대를 위해 물자를 보내고 그 비축물량을 확보하는 일도 챙겼다.



 그러나 내가 처음 맞이한 중요 사안은 인사(人事) 문제였다. 육군참모총장이라는 자리는 일선 지휘관과는 매우 달랐다. 전선에 나가고, 후방으로 들어오는 지휘관의 인사 문제가 어떻게 보면 핵심 업무였다.



 내 앞의 두 전임 육군참모총장의 거취 문제가 먼저 내 책상 위에 올라왔다. 내 바로 앞에서 총장을 지낸 이종찬 중장은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는 정래혁·박병권·장도영·최영희 준장 등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돼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차일피일 미루면서 출국을 늦추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미국에 유학하기로 결정이 난 마당이어서 별로 신경을 쓸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이종찬 중장의 전임자였던 정일권 중장(후일 국무총리를 지냄)이었다. 6·25전쟁이 터진 뒤 육군참모총장에 올라 급박했던 전선 상황을 잘 관리하며 초기 대한민국 국군의 최고 기린아로 꼽히던 정 장군이었다. 그는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사건 등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미국 포트 레븐워스 지휘참모대학 유학을 마친 뒤 당시 막 귀국해 있었다.



 그에게 국군 2사단장이 맡겨졌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부산 정치 파동’이 일어난 뒤 이승만 대통령과 이종찬 육참총장, 밴플리트 장군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런 결정이 났던 것이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을 일선 사단장으로 발령을 낸 것이니 정 장군 본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정 장군은 그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2사단장으로 부임하지 않고 진해의 친구 집에 내려가 병을 핑계로 쉬겠다는 전갈만 보내왔다.



 사실 정 중장의 2사단장 발령은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이 건의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나중에 밴플리트 장군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이기도 하다. 밴플리트 장군은 정일권 중장의 경력을 생각해서 그런 건의를 했고,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받아들이는 차원에서 정리가 된 것이다.



 정일권 중장은 비록 전쟁 초기 국군의 최고사령탑에 올라 미군과의 공조 등을 원활히 수행했지만 전선 지휘를 제대로 한 경험이 매우 적었다. 정 장군은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시절 광주 4연대장을 지낸 경력을 제외하고는 일선 지휘관으로서의 경력을 제대로 쌓지 못했던 것이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런 정일권 중장에게 먼저 일선 지휘관으로서의 경험을 쌓은 뒤 더 큰 활약을 펼치라고 배려했던 것이다.



 이런 점 또한 국군과 미군의 뚜렷한 차이였다. 한국군은 동양인답게 형식적인 서열(序列)을 중시했다. 그에 비해 미군은 단순한 자리보다는 실질적으로 쌓는 경험을 중시했던 것이다. 명분이나 겉치레보다는 실질을 먼저 따지는 미군에게는 정 중장의 2사단장 발령이 큰 문제가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정 장군은 요지부동이었다. 좀체 훌훌 털어버리고 일선으로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뒤 먼저 해결해야 할 사안이 바로 정 장군의 마음을 돌리는 일이었다.



 나는 진해에 있는 그의 친구 집에 찾아가 정 장군을 만났다. 찾아온 나를 보자 정 장군은 “이제 군인 생활을 접고 다른 데 일자리를 찾겠다”고 말했다. 불만을 가득 담은 얼굴이었다. 정말 그대로 두면 사표를 내고 군문(軍門)을 떠날 듯했다.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들은 뒤 “그래도 군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게 좋지 않겠느냐. 인사 조치 배경에는 이 대통령의 다른 배려가 숨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는 내용으로 그를 설득했다. 그런 나의 말을 듣던 정 장군은 의외로 선선히 나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그의 뜻을 확인한 뒤 대구로 다시 돌아왔다. 이튿날 나는 L19 경비행기를 진해로 보냈다. 정 장군은 그 비행기에 올라타고 2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미군은 그의 능력을 결코 낮게 평가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곧 미 9군단 부군단장으로 승진했고, 다시 국군 2군단장으로 전선을 지휘했다. 휴전 뒤인 54년 1월에는 대장으로 승진해 다시 참모총장 자리에 복귀까지 했다.



 정 장군의 인사 건은 이렇게 해결했다. 그러나 내가 정작 힘을 쏟아야 할 곳은 달리 있었다. 바로 어떻게 하면 국군을 강력한 토대 위에 올려놓느냐는 점이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무기와 장비 등 외형적인 역량을 급속히 늘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의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했고, 아울러 워싱턴의 결정이 있어야 했다. 이는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었다. 나는 그 방법을 다양하게 모색했다. 우선 손쉽게 착수할 수 있는 사안부터 찾아봤다. 우선 눈에 띄었던 것은 미군과 한국 육군본부 지휘관의 소통 채널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육군본부에는 여러 병과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병과를 이끄는 병과장들의 계급은 대령에 지나지 않았다. ‘별’들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미 8군의 각 병과장들은 모두 준장 이상의 장군이었다. 육본의 일반 참모들까지는 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 각 분야의 업무를 총괄하는 병과장의 계급이 너무 낮다는 점이 문제였다. 예를 들면 군수(軍需)를 일컫는 G-4 휘하에는 공병감·병기감·병참감·통신감·수송감·의무감·정훈감 등 병과장이 있었는데, 10만에 가까운 병력을 지닌 공병감의 계급이 대령에 불과했다. 병력만으로 보면 공병에 육박하는 수준의 수송과 통신 병과의 경우도 같은 형편이었다.



 군대는 계급이 모든 것을 말하는 조직이다. 계급이 낮으면 제 아무리 많은 부하를 거느리고 있어도 다른 부대 지휘관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맺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주요 병과장 10여 명 모두에게 별을 달아주는 구상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을 먼저 설득해야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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