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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고장’ 중국 쓰촨성을 가다 <하> 마조 선사 출가한 나한사(羅漢寺)





‘법’묻는 제자 혼내며 마조 선사가 말하길 “네가 바로 보물창고다”



일상에서 깨달음을 길어올린 마조 선사가 출가한 사찰인 나한사의 대웅보전. 전각에 달린 많은 현판이 중국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마조 선사의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대주라는 스님이 마조(馬祖·709~788) 선사를 찾아왔다. 마조가 물었다. “무엇을 하러 왔느냐?” 대주가 답했다. “법을 얻고자 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조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 대주의 이마도 ‘쾅’하고 쥐어박았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지금 보물창고를 감춰두고, 그것도 모자라 남의 보물마저 빼앗으려 드느냐?” 당황한 대주가 물었다. “아니, 제게 무슨 보물창고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마조 선사가 답했다. “그럼, 네놈이 보물창고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한참 후에 대주는 “아하!”하고 무릎을 쳤다고 한다.













16일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서 스팡현(什<90A1>懸)으로 갔다. 중국 선불교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마조 선사의 고향이다. 2시간쯤 달린 뒤 버스를 내렸다. 그곳에 나한사(羅漢寺)가 있었다. 마조 선사가 31세 때 출가한 사찰이다. 마조는 말했다. “네가 바로 보물창고다!” 순례객들은 그 창고의 열쇠를 찾고자 했다.



 ◆나한사의 새 울음=경내는 고즈넉했다. ‘제일총림(第一叢林)’이라고 쓴 현판이 눈에 띄었다. 중국 선(禪)불교사에서 마조 선사가 차지하는 무게감을 한눈에 드러내는 문구였다. 뜰에 선 나무 위로 새가 날아와 울었다. ‘새 울음’에 관한 마조 선사의 유명한 일화가 떠올랐다. 울음은 순식간에 화두(話頭)가 됐다.



 1200년 전, 마조 선사와 제자 백장(百丈)은 해 저무는 강기슭을 걷고 있었다. 그때 들오리떼가 서쪽 하늘로 줄지어 날아갔다. 마조가 물었다. “저게 무슨 소리냐?” “들오리떼 울음 소리입니다.” 둘은 계속 산책을 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마조가 물었다. “그 들오리떼 울음 소리가 어디로 갔느냐?” 백장이 답했다. “멀리 서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마조는 갑자기 백장의 코를 잡고 비틀었다. 당황한 백장은 “아얏!”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마조는 호통을 치며 말했다. “야, 이놈아. 멀리 날아갔다더니 바로 여기 있지 않느냐!”



 나한사의 뜰에 섰다. 눈을 감았다. 새 소리가 뚝 그쳤다. 새 울음은 어디로 간 걸까. 마조는 왜 백장의 코를 비틀었을까. 마조는 제자에게 무엇을 일깨우고자 했던 걸까.



 우리는 모두 ‘색(色)’을 잡는다. 색이 뭔가. 눈으로 잡는 형상, 귀로 잡는 소리다. 뿐만 아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일으킨 생각과 마음도 모두 색(色)이다. 우리는 늘 그걸 잡는다. 그러다 결국 지치고 만다. 색에서 색으로, 형상에서 형상으로만 겉돌기 때문이다. 백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색을 잡았다. 새의 울음을 잡았다. 그러니 서쪽 하늘 너머로 새가 사라진 뒤에는 멍하게 서있을 뿐이다. 그 울음이 어디로 갔는지 도통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조 선사는 그걸 봤다. 붓다는 말했다. “모든 색(色)이 비었다.” 그 빈 자리가 ‘공(空)’이다. 그럼 새 울음은 어디서 나왔을까. ‘공’에서 나왔다. 그리고 어디로 사라졌을까. ‘공’으로 사라진 거다. 세상의 모든 색은 공에서 나온다. 그렇게 나온 색은 다시 공으로 들어간다. 그렇다고 공 따로, 색 따로가 아니다. 공과 색이 한 몸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가령 배가 고플 때 “아이, 배고파. 밥을 먹고 싶네”란 생각이 올라온다. 그 생각이 ‘색(色)’이다. 그런데 배불리 밥을 먹고 나면 그 생각은 온데간데 없다. 어디로 간 걸까. 다시 ‘공(空)’이 된 거다. 그리고 이번에는 “속이 더부룩하네. 커피나 한 잔 할까?”란 생각이 올라온다. 공에서 다시 색이 올라오는 거다. 색과 공은 이렇게 서로 들락날락하는 사이다.



 이런 순환이 원활하고, 자유롭고, 막힘이 없어야 한다. 왜 그럴까. 그게 우주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마조 선사는 그걸 일러준 거다. 네가 보는 눈, 네가 쓰는 마음이 들락날락 돌아가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임을 말이다. 불교에서 목이 터지게 “마음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색도 뚫고, 공도 뚫어야 이치를 뚫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장은 여전히 ‘새 울음’만 잡고 있었다. 공을 모르니 색만 잡을 뿐이다.



 그래서 마조 선사는 백장의 코를 비틀었다. 왜 그랬을까. 공으로 사라진 새 울음을 불러내기 위해서다. 그랬더니 백장이 “아얏!”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게 뭔가. 공으로 들어갔던 새 울음이 “아얏!”하는 색으로 다시 나온 거다. 마조 선사는 그걸 보라고 했다. “야, 이놈아. 멀리 날아갔다더니 바로 여기 있지 않느냐!”라고 호통을 치면서 말이다.









나한사 경내의 보본당에 있는 마조 선사의 위패.



 ◆마음이 곧 부처다=나한사 경내로 깊숙이 들어갔다. 마조 선사의 출가 사찰다웠다. 마조 선사의 조사상과 위패를 모신 전각도 있었다. 대웅보전 앞에 섰다. 법당 안을 들여다봤다. 왼쪽 벽에는 ‘비심비불(非心非佛·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오른쪽 벽에는 ‘즉심시불(卽心是佛·마음이 곧 부처다)’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마조 선사는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대중이여, 자신의 마음이 부처다.” 이에 얽힌 일화도 있다. 무업이란 사람이 마조 선사를 찾아왔다. 멀리서 걸어오는 무업을 보고서 마조가 말했다. “당당한 불당(佛堂)에 부처가 없군.” 무업이 다가와서 물었다. “선문(禪門)에서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조가 답했다. “아직 아무런 짐작도 못하고 있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외에 별다른 것이라곤 없다.”



 마조 선사는 명쾌하게 말했다. “네가 바로 부처다. 네 마음이 바로 부처다. 너는 부처인 줄 모르지만, 모르고 있는 그 마음까지도 부처다.” 무슨 뜻일까. 이미 다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이미 부처라는 거다. 중생을 깎아서 부처를 만드는 게 아니라, 부처를 덮고 있는 먹구름을 치워서 ‘있던 부처’를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래서 마조는 대주에게 “네 놈이 바로 보물창고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럼 부처를 덮고 있는 그 ‘먹구름’이 뭘까. 그게 바로 ‘이치에 대한 오해, 이치에 대한 착각’이다. 그 오해를 풀기 위해 붓다는 8만4000에 달하는 법을 설했다. 그 착각을 깨트리기 위해 마조 선사는 백장의 코를 비틀었던 거다. 그 오해와 착각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내 안의 보물’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한사의 보본당(報本堂)으로 들어섰다. 마조상과 마조 선사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눈을 감았다. 마조 선사의 ‘먹구름’도 처음에는 짙었다. 그도 한때는 수행의 길에서 소를 때리지 않고 수레를 때렸다. 그런 마조도 이치를 통해 먹구름을 걷었던 것이다. 먹구름이 걷힌 후, 마조 선사가 보여준 안목은 놀랍다. 거기에는 착각을 걷어낸 후의 이치가 온전히 흐른다.



 ◆마조 선사의 유언=마조 선사가 입적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저녁에 원주(院主·절집 사무를 보는 사람)가 와서 물었다. “스님께서는 사대(四大·지수화풍)가 평안치 못하셨는데, 요즘은 어떠십니까?” 육신의 죽음을 눈 앞에 둔 마조 선사에게 “건강이 어떠십니까?”하고 물었던 거다. 마조 선사는 이렇게 답했다. “일면불 월면불(日面佛 月面佛)이니라.” 육신의 생명이 꺼지기 직전에도 마조 선사는 그렇게 이치를 설했다.



 일면불이 뭔가. 낮이다. 해 아래선 만물만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게 바로 ‘색(色)’이다. 그럼 월면불은 뭔가. 밤이다. 색이 모습을 감춘 자리, 다름 아닌 ‘공(空)’이다. 그런데 마조 선사는 “해 아래 드러남을 봐도 부처이고, 달 아래 감추어짐을 봐도 부처다”라고 말한 거다. 색을 봐도 부처만 있고, 공을 봐도 부처만 있다는 거다. 눈을 떠도 부처만 있고, 눈을 감아도 부처만 있다. 온통 부처뿐이다. 그게 이치다.



 열반할 때 마조 선사는 79세였다. 입적하기 전날은 몸도 많이 아프고, 기운도 빠지고, 숨을 쉬기도 벅찼을 것이다. 마조 선사는 곁에 있는 원주에게 “아이고, 가슴이야. 아이고, 아프네. 아야, 아야!”하며 소리를 질렀을 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그걸 보고 “선사도 죽음 앞에선 별 수 없네”라며 실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조 선사의 시선은 달랐다. 그는 아프다는 자신의 소리, 실망했다는 남의 소리까지도 부처의 나툼(명백히 모습을 드러냄. 한자로 現化·顯現)으로 봤다. 그러니 그에게 육신의 생멸. 그 전과 후는 한 자리일 뿐이다.



 마조 선사는 “평상심이 도(道)”라고 말했다. 색(色)에도 달라붙지 않고, 공(空)에도 달라붙지 않는 마음. 아무런 집착 없이 들락날락하는 그 마음이 평상심이란 얘기다. 순례에 동참한 고우 스님(조계종 원로의원·봉화 금봉암)은 마조의 메시지를 현대적으로 풀었다. “불교가 옛날에 하던 방식을 바꿔서, 이젠 우리 생활과 직결시켜 마음을 편안케 하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부처님이 무엇을 깨달았는가를 이해하고, 일상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럼 수행도 잘 되고, 수행하는 과정도 즐겁다.”



 나한사를 나올 때 다시 새가 울었다. 눈을 감았다. “새 울음이 어디서 나오나. 새 울음이 어디로 사라지나.” 그런 물음을 던지며 마조 선사는 순례객들의 코를 비틀고 있었다. 다들 소리를 질렀다. "아얏!”



스팡(중국)=글·사진 백성호 기자



마조 선사의 말말말



-“평상심이 도다.”(平常心是道)



-“ 선(善)을 취하지도 말고, 악(惡)을 버리지도 말아야 한다. 더러운 것에도, 깨끗한 것에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 그대들의 마음이 곧 부처다.”(卽心是佛)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 죄의 성품이 공(空)함을 알면 생각생각 어디에도 죄를 찾을 수가 없다. 그건 자기 성품이 공했기 때문이다.”



- 마조 선사는 뒤에서 갑자기 이름을 부른 뒤, 깜짝 놀라 돌아서는 상대방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이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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