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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기가 만난 조선사람] 황수신과 이극돈 … 사관의 사후 평가는 냉정했다



명재상 황희와 아들 황수신을 모신 창계서원(創溪書院). 전북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에 있다. [출처=문화재청 홈페이지]

세종대의 명재상 황희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다. 치신(致身)·보신(保身)·수신(守身)이 그들로 모두 높은 벼슬을 지냈다. 특히 셋째 황수신(1407~1467)은 영의정까지 올라 대를 이어 정승을 지내는 진기록을 세웠다.

 황수신은 부친만큼 명성을 날리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치적을 남겼다. 관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민원을 원만히 해결하고 변방의 방어태세를 정비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을 평가한 사관(史官)의 시각은 의외로 냉정하다. “황수신이 죽었다. 정승이 되어 대체(大體)는 힘쓰고 처세를 원만하게 하고…여러 대에 벼슬했으나 크게 정사를 밝힌 것이 없고 뇌물이 폭주하여…여러 번 탄핵을 받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성이 황이니, 마음 또한 황(黃)하다’라고 했다”.

 1467년(세조 13) 황수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세조실록』의 사관이 쓴 졸기(卒記)의 내용이다. 청백리로 이름난 부친의 명성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황수신에 대한 비판이 매섭다. 그중에서도 ‘성이 황이니 마음 또한 황이다(姓黃心亦黃)’라는 평가는 압권이다. 실록에 실린 졸기가 역사에 길이 남을 ‘인생 평가서’임을 고려하면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황수신이 자신이 이렇게 평가된 것을 알았다면 어찌했을까. 놀라서 관 속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을까?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도 사관 김일손(金馹孫)의 붓끝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했다. 단종을 의제에, 세조를 항우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 행위를 단죄하려 했다. 실록 편찬을 책임졌던 권신 이극돈(李克墩, 1435~1503)이 그 내용을 발견하여 연산군에게 고하면서 참극이 일어난다. 김일손은 처형되고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겉으로는 김일손의 세조 비판을 문제 삼았지만, 이극돈은 권력을 휘두른 자신의 행적이 김일손에 의해 비판적으로 기록된 것에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역사를 기록했던 사관의 권한은 막강했다. 그들이 내리는 평가는 ‘필주(筆誅)’라 불리기도 했다. ‘붓으로 죽인다’는 뜻이다. 사관이 가진 세속의 권력은 미약하지만 그가 잡은 붓의 힘은 그렇지 않았다. 사관 김일손에게 죽음을 내려 보복했던 이극돈이지만 그 또한 죽은 뒤 또 다른 사관에게 필주를 당한다. “사류(士類)를 죽이고 귀양 보내기를 매우 혹독하게 했다. 사람들이 이극돈을 무오사화의 수악(首惡)이라고 했다.” 『연산군일기』에 실린 이극돈의 졸기 내용이다. 살아있을 때는 이극돈이 이겼지만 궁극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관의 힘은 정승과 권신을 능가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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