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서소문 포럼] 고성능 정부와 강력한 정부









대학 시절 교양과목을 수강할 때였다. 미국에서 갓 귀국한 젊은 강사가 강의를 했다. 소싯적부터 외국생활을 해서였는지 우리 말이 부드럽질 않았다. 강의 도중 ‘powerful government’라는 말을 ‘고성능 정부’라고 옮긴 적이 있다. 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갸웃하자 그는 곧 ‘강력한 정부’라고 수정했다. 말이 서툴러 미안하다며. 그땐 같은 뜻의 말인데 후자가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둘은 영 다른 뜻이 아닌가 싶다. 정부의 능력을 시험하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예컨대 배추 파동이 그렇다. 추석 직후 배추값이 폭등하자 정치권과 여론은 정부의 무능을 질타했다.



 ‘정부가 배추값 하나 제대로 못 잡나.’ 말은 쉽다. 정부 때리기에 딱 좋다. 이 말에 정부도 밀렸다. 부랴부랴 중국산을 수입한다, 배추에 영양제를 준다, 유통구조를 개선한다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김치 소비를 조금 줄이고, 배추 출하를 앞당기면, 얼마 안 가 제자리로 돌아올 배추값이었다. 비싸서 덜 먹는다고 국민 건강이 심각하게 훼손될 사안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걸 가지고 나라가 결딴나듯 소동이 벌어졌다. 언론도 단단히 반성해야겠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를 선정적으로 다루진 않았나 하는 것이다. 요즘은 다락같이 올랐던 배추값이 갑자기 떨어진다며 ‘역파동’을 걱정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민망하게 됐다.



 여기에서 고성능 정부와 강력한 정부의 차이가 나온다. 국민의 기본 찬거리인 배추를 늘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준다면, 이는 대단한 고성능 정부다. 반면 배추값이 폭등하게 된 불가피한 사정을 국민에게 납득시키고 시장원리에 따라 대응 방법을 찾는 건 강력한 정부다. 여론이 바란 건 고성능 정부였다.



 그러나 특정 품목의 가격을 싸게 유지하려고 내리누르는 건 정부 본연의 역할이 아니다. 배추값은 정부가 누른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가격은 시장이 정하는 게 원칙이다. 정부는 배추값의 급격한 변동을 완만하게 만들어 주는 데 족해야 한다. 마치 환율의 변동폭을 줄여줄 목적으로 당국이 외환시장에서 실시하는 ‘스무드 오퍼레이팅(smooth operating)’처럼 말이다. 이는 값을 일정 수준 이하로 붙들어 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논리적으론 이게 맞는데, 국민정서에 비춰선 영 부족해 보인다.



 하기야 정부 능력 밖의 일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경우가 어디 이뿐인가.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동시에 복지예산을 확대해라, 재정 건전성을 지키면서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늘려라, 집값은 떨어트리되 거래는 활성화시켜라, 어려운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부실기업은 구조조정해라, 은행의 경영건전성을 유지하고 저신용 서민층과 중소기업에 돈을 더 많이 빌려줘라, 시장은 개방하되 농업은 지켜라….



 모순되는 정책 요구들이 많다. ‘초(超)울트라 수퍼 고성능 정부’라도 다 맞춰주기 어려운 주문들이다. 현실적으론 우리 정부 능력 밖이다. 혹시 우리는 한계가 뻔한 정부에 너무나 많은 걸 요구하는 건 아닐까. 바랄 걸 바라자는 얘기다.



 이거, 잘못하면 공무원 편든다, 정부 거든다는 말 듣기 십상이겠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시장에 익숙지 못한 정부에게 시장에 개입하도록 등을 떠밀지 말자는 것이다. 정부가 잘 모르고 시장을 휘저으면 뒤탈만 커진다. 노무현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며 나섰다 되레 집값을 올리고 만 기억이 생생하지 않나.



 그렇다면 고성능 정부를 기대하는 것, 표방하는 것 모두가 일종의 포퓰리즘이다. 현실적으로 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 기대와 요구에 정부는 쉽게 휘둘린다. 이것도 해야겠고, 저것도 해야겠다며 현안을 쫓아다니느라 부산하다. 기본적으론 선거를 의식하기 때문 아닌가 싶다.



 하지만 정부가 할 일과 시장에 맡겨야 할 일의 선은 분명하게 그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선을 여간해선 넘지 않는다는 원칙도 세워야 한다. 없는 정답을 찾느라 행정력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한 문제가 또 다른 문제를 낳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되지도 않을 고성능 정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강력한 정부를 지향하는 건 곧 리더십의 영역이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이번엔 배추에 냉해가 올까 농림수산식품부 공무원들이 불안해 하고 있단다. 성큼 찾아온 추위에 배추파동이 재발할 경우 고성능 정부냐, 강력한 정부냐, 또 한번의 갈림길이 닥치는 셈이다.



남윤호 경제 데스크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