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배명복의 세상읽기] 거리로 나선 꿈을 잃은 세대





지난 주말 국내 신문 국제면에 눈길을 끄는 사진 하나가 실렸다. ‘진압 경찰을 막아선 고교생 커플’이란 제목의 파리발(發) 사진이다. 프랑스 정부의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남녀 고교생이 꼭 부둥켜 안은 채 도로 한가운데 드러누워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진압 경찰들은 난감한 표정이다. 준비한 각본대로 퍼포먼스를 한 것인지, 경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순간적인 기지(機智)를 발휘한 것인지는 설명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반항, 치기(稚氣), 아니면 일탈(逸脫)?

 시위는 프랑스의 국민 스포츠다. 성인들에게는 프랑스식 민주주의의 핵심 권리이고, 청소년들에게는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다. 툭하면 파업을 하고, 시위를 위해 거리로 나서는 부모와 선생님을 따라 배우며 깨어 있는 시민으로 점차 성장해 간다. 미성년자도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는 대다수 프랑스 사람들에게 청소년들의 시위 참여는 놀랄 일이 아니다.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고교생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빅토르 콜롱바니(16). 그는 프랑스 최고 명문 고교 중 하나인 파리 앙리4세 고등학교 2학년생이다. 이달 초 전국고등학생연맹(UNL) 의장에 선출된 이래 전국의 고교생들을 규합하고, 시위 계획을 짜고, 언론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느라 정신없이 바쁘다. 일간지 르몽드의 기자인 부친까지 엄마·아빠가 모두 현직 언론인이다. 최근 그를 인터뷰한 시사주간지 렉스프레스에 따르면 “학업에 과도한 지장을 주지 않는 한 시위 참여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게 빅토르 부모의 입장이다. 학교 선생님들도 UNL 의장 활동 때문에 수업 시간에 문자를 주고받는 정도는 눈감아주고 있다.




지난 21일 파리에서 벌어진 연금개혁 반대 시위에 참가한 프랑스 고교생 한 쌍이 부둥켜안은 채 도로에 누워 진압 경찰의 앞을 막고 있다. [파리=로이터 뉴시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정치생명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연금개혁은 프랑스의 미래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프랑스 연금제도의 기본은 자신이 낸 돈을 나중에 돌려받는 적립식이 아니라 근로자가 퇴직자를 부양하는 세대 간 이전 방식이다. 저출산과 고실업으로 노동인구는 줄어드는데 평균수명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니 연금재정에 구멍이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 지난해 82억 유로(약 12조8000억원)였던 연금재정 적자는 올해 300억 유로(약 47조원)로 늘어날 전망이다. 적자는 고스란히 국가재정으로 메울 수밖에 없으니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연금재정은 물론이고, 나라 살림 자체가 거덜날 판이다. 그래서 우선 급한 대로 최저 퇴직연령을 60세에서 62세로, 연금 수령 개시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각각 2년씩 늦추자는 것이 개혁안의 골자다.

 정년을 채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연금을 받으려면 지금보다 2년을 더 일해야 하고, 연금 혜택을 보려면 지금보다 2년을 더 기다려야 하니 근로자들로서는 달가울 리 없다. 한마디로 더 일하고, 덜 받으라는 얘기다. 주40시간 근로제와 유급휴가제가 도입된 1936년 이후 70년 넘게 유지해온 프랑스 근로복지제도의 원칙을 뒤집는 큰 변화다. 그렇다고 연금제도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다는 건 프랑스 근로자들 대다수가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국적인 파업과 시위 사태가 7주째 이어지고 있는 것은 사르코지 정부의 일하는 방식과 스타일이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소통하는 자세를 보여도 될까말까 한 문제를 다수 의석을 무기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 그룹의 상속녀인 릴리안 베탕쿠르와 사르코지 진영의 얽히고설킨 정치자금 스캔들도 반발 요인이다. 가뜩이나 부자들 편을 들며, 국민 위에 군림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비판에 시달려온 터에 베탕쿠르 스캔들까지 터지자 ‘부자 증세(增稅)’로 접근할 문제를 서민들의 희생으로 해결하려 든다는 불합리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직접적인 이해가 걸려 있는 어른들은 그렇다 쳐도 어린 학생들까지 가세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정년이 연장되면 새로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문제’라는 논리다. 지금은 가을방학 중이지만 지난주 프랑스 전국 고등학교의 7%인 312개교가 동맹휴업이나 단축수업으로 수업 차질을 빚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은 “사르코지, 넌 이제 끝났어. 우리가 거리로 나왔어”란 피켓을 들고 연금개혁 반대 구호를 외쳤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무장한 게릴라식 시위에 경찰도 당황하고 있다. 축제하듯 웃고 떠들며 시위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가 대부분이지만 일부에서는 폭력과 약탈, 방화 같은 불법 행위도 나타나고 있다. 빅토르는 “우리 세대가 느끼는 분노와 좌절감을 표시하기 위해 거리에 나왔을 뿐”이라며 “소수의 일탈은 공권력의 과도한 개입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정부에 화살을 돌렸다.

 프랑스를 혁명 직전 상황까지 몰고 갔던 68년 사태가 세대 간 문화 충돌이었다면 지금 프랑스에서 나타나고 있는 갈등은 세대 간 경제 충돌이다. 희망을 잃은 세대의 반항이다. 이들의 미래에 희망을 채워주지 못한다면 68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다. 경제는 문화보다 훨씬 절박한 문제다. 연금개혁법안이 상원을 통과함으로써 다 끝났다고 마음 놓을 일이 아니다. 밑바닥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젊은이들의 분노와 좌절을 어떻게 달랠지 고민해야 한다. 그게 어디 사르코지 정부만의 일이겠는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태그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