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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인감증명제 실시 … 도장에 ‘인격’을 담기 시작하다



1926년 충남 홍성 한 도장포의 ‘인판(印版) 주문부’. 도장포 주인은 주문받아 새긴 도장을 주문부에 찍어 둔 뒤 한 달치씩 묶어 경찰서에 제출해야 했다. 주문부에는 제작일자, 도장의 재질과 가격, 주문자의 주소와 성명·나이를 적었는데 경찰은 이를 근거로 인감의 진위를 판별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자료]

“조선인 여자가 성씨 또는 조이(召史·과부)라는 통칭만 붙이는 것은 결혼 후 이름을 부르지 않는 관습 때문으로 본래 이름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인감을 계출할 때에는 모두 이름을 기입하도록 하며 이름이 없다고 강변할 경우에는 임의로 이름을 만들어 수리한다”(1915년 2월 19일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각도 장관에게 보낸 통첩 제52호).

 우리나라 건국 신화는 환웅이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땅에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천부인을 도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던 시점에는 ‘인(印)’에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음은 분명하다. 도장은 고대부터 세계 전역에서 신물(神物)로 상정되어 왔다. 똑같은 문양을 수많은 문서에 그려 넣을 수 있었기에 도장에는 단 하나의 ‘존재’가 수많은 ‘존재들’을 영구히 지배하는 ‘신’의 이미지가 새겨졌다. 그리고 이런 특징은 관료제와 아주 잘 어울렸다. ‘왕권은 신이 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도장을 관료제의 상징으로 만든 주요인이었다.

 전통시대에는 관료제의 위계에 따라 도장의 이름이 달랐다. 황제의 것은 새(璽) 또는 보(寶)라 했고, 제후의 것은 장(章)이라 했으며, 그 밖의 것은 인(印)이라 했다. 이들을 넓은 의미에서 관인(官印)이라 하는데, 문서에 관인을 찍는 것은 그 문서에 ‘명백하며 되돌릴 수 없는’ 관(官)의 의지가 담겼음을 의미했다. 관직이 없는 사람들은 ‘권리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됐기에 사인(私印)은 장서인이나 낙관처럼 소유나 창작의 주체를 표시하는 구실만 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는 공문서에 사인(私印)을 찍지 않았다. 붓을 잡아 본 사람들은 수결(手決)이라는 붓글씨 사인(sign)을 썼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수촌(手寸)이라 하여 자기 손가락 모양을 그려 넣었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뒤 부동산 등기와 매매·상속 등의 제도를 정비하면서 개인을 법적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삼는 근대법 개념을 도입했다. 1914년 일제는 일본에서 시행 중이던 인감증명제를 적용해 모든 인격체의 최종적인 의사를 날인(捺印)으로 표시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도장이 없는 사람은 인격도 없는 사람으로 취급됐으며 인감도장을 만들어 갖는 것은 법적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재탄생’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인감도장은 각 개인이 비장(秘藏)하는 보물이 됐고, 도장의 재질이나 글씨체가 인생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도 퍼져 나갔다. 대한민국 국새에 자기 이름자를 몰래 새겨 넣은 사람도 국운이 쇠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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