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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0) 낯선 화장실

목욕을 하는 시설, 지금이야 어느 가정에서나 볼 수 있는 샤워기가 달려 있는 곳으로 화장실쯤 되겠다 싶어 들여다 본 그곳에는 이상한 물건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베니어합판으로 얽은 것인데, 의자 모양을 하고 있는 게 이상하다 싶어서 나는 와이먼 군단장에게 “이게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전장서 미군의 문명을 봤다 … 한국이 현대사에 뛰어든 계기였다

와이먼 소장은 피식 웃으면서 “변기(便器·toilet)”라고 설명했다. 나는 처음 보는 낯선 것이어서 어떻게 그것을 변기로 쓸 수 있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끝내 그 사용법을 묻지는 않았다. 화장실을 재래식과 그때까지 간혹 볼 수 있었던 일반 수세식(水洗式) 정도로만 알고 있던 내게 미 고위 장성이 사용하고 있던 변기는 참 새롭고도 충격적이기까지 한 물건이었다.



나는 ‘문명’을 생각했다. 속으로는 ‘아, 이런 것이 미국과 한국의 차이로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전쟁과 함께 이 땅에 본격적으로 상륙한 미군이었다. 그들은 낯설기만 한 존재였다. 금발에다 곱슬머리, 뾰족한 코에 움푹 파인 눈 등 외형은 그저 백인(白人)이라서 그러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통해 나는 그들의 진짜 낯선 면모들을 여러 번 봤다.



해방 뒤 한반도에 온 미군은 당시의 한국인에게 매우 낯설고 이상한 존재였다. 그들은 6·25전쟁이 터진 뒤 한반도에 수많은 물자와 무기를 상륙시키면서 이 땅 위에 서구의 문명을 대규모로 옮겼다. 45년 9월 인력거에 올라타 서울 명동 거리를 지나는 미군의 자유분방한 모습이다. 종군작가로 활동했던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렸다.
내가 평양에서 월남해 서울로 온 때는 1945년 12월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익과 우익이 심하게 싸움을 벌이고 있던 서울은 혼란스러웠다. 내가 서울역에 막 도착해 걸어서 종로를 지날 때였다. 좌익 대열이 격렬한 구호를 외치면서 지나가던 옛 파고다공원 앞에 서 있던 나는 지프를 타고 그 옆을 지나던 미군들을 그때 처음 봤다.



좋아 보이는 옷감으로 만든 군복, 모자를 반쯤 걷어올린 자유분방한 모습, 추잉검을 질겅질겅 씹으며 키득거리는 표정들이 영 이상해 보였다. 그들은 금세 휙 지나쳐 갔다. 그리고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부산 5연대에 배치를 받아 근무할 때부터 나는 그들을 옆에서 지켜봤다.



전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도 미군은 늘 낯선 존재였다. 늘 새로운 무엇인가를 내 앞에서 꺼내 보였고, 우리와는 아주 다른 일처리 방식을 내게 보여줬다. 컬러로 도색하고 그 안에 빽빽한 좌표(座標)를 그려 넣은 미군의 5만 분의 1 지도를 보았을 때도 예의 그런 낯설다는 인상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어딘가 어색한 그들의 행동과 문물을 볼 때마다 내 마음속으로 찾아온 솔직한 감정은 경이(驚異)로움이었다.



국군 1사단장으로서 북한군에 서울을 내주고 하염없이 밀려 내려갈 때 예하의 12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허겁지겁 뛰어와 “저렇게 큰 대포는 처음 봤어요”라고 한 뒤 그와 함께 현장에 뛰어가 본 155㎜ 야포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전차, 거대한 공병 장비, 그리고 매끄러우면서도 효율적인 작전 방식 등도 그랬다. 낯섦과 경이로움이 함께 교차하는 미국인과 그들의 문물….



내가 와이먼 군단장의 집무실을 돌아볼 때 언뜻 본 화장실의 변기 또한 그랬다. 미군은 그렇게 낯설면서도 놀라움을 주는 존재였다. 그들이 지닌 문명의 장점을 배우는 게 우리의 힘을 키우는 첩경이라는 생각이 늘 들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낯선 존재로, 어느덧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과 국군, 그리고 일반 국민에게 바짝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멍하니 서 있는 내게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와이먼 장군은 “다른 곳을 더 둘러보자”면서 앞장섰다. 무엇인가를 남에게 배운다는 것은 중요하다. 더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하는 상대에게서 그 힘의 원천(源泉)을 생각하며 그들이 보이는 문명의 원리와 작동 방법을 알아두는 것은 특히 중요하다.



미군이 대규모로 상륙한 것은 아무래도 6·25 전쟁이 커다란 계기였다. 그들은 전쟁의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사단과 군단, 그리고 군(軍) 규모의 병력을 한반도 남단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런 대규모 병력이 사용해야 하는 무기와 보급물자를 거의 무한정으로 상륙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고 1년6개월여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대한민국 국군은 그런 미군의 시스템과 물자, 무기를 체계적으로 습득할 기회가 적었다.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선(戰線)상황이 차분한 습득, 면밀한 학습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 또한 46년 부산 5연대에서 늘 미 고문관과 함께 같은 집무실을 사용했고, 전장에서는 늘 미군 포병부대, 공지(空地) 연락장교 등과 전선을 함께 떠받치기도 했지만 체계적으로 그들을 배울 기회는 적었다. 그럴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국군 2군단 창설과 미군의 체계적인 교육은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더구나 사단급 차원의 배움이 아닌, 그보다 훨씬 확대된 군단급 규모의 학습이었다.



군단은 앞에서도 잠깐 얘기했듯이 사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부대였다. 사단은 정해진 편제(編制)에 따라 역시 정해진 전쟁을 치르는 단위다. 그에 비해 군단은 몇 개의 사단을 휘하에 거느리고 병참과 공병을 덧붙이면서 다양한 편조(編造)가 가능한 단위다. 편조라는 것은 사단 급 부대를 여러 경우로 조합하거나, 상황에 따라 특별한 대처가 가능하도록 엮는 행위다.



같은 전략 단위이기는 하지만 사단은 일정 지역에서 정해진 공수(攻守)만을 수행하는 데 역할이 한정돼 있다. 그에 비해 군단은 그 지역을 훨씬 확대해 다양한 작전상의 변주(變奏)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경량급의 권투선수가 사단이라면, 군단은 헤비급의 선수 여러 명을 거느린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군단 차원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미군을 배울 기회가 우리에게 온 셈이었다. 155㎜ 포병을 양성해 각 전선으로 보내는 작업과 함께 미군의 행정 시스템, 보급선을 구성해 전선까지 잇는 방법, 예하 사단을 상황에 따라 어떻게 구성해 전선에 내보내는지 등을 광범위하게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나는 배움에 강한 편이다. 나 스스로 어디가 부족한가를 따지고, 남이 어떤 면에서 나보다 뛰어난가를 항상 관찰한다. 그래서 내가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데 열심인 편이다. 능력은 남보다 뛰어나지 못하지만 나를 낮춰 남의 장점을 끌어들이는 데는 적극적이다. 소양강가의 푸르고 시린 봄기운 속에서 느닷없이 맞은 2군단 창설 작업이었지만, 내게는 아주 특별하게 여겨지는 그런 기회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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