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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비에서 침모로, 다시 식모를 거쳐 ‘가사 도우미’로

 
  바느질에 열중하는 두 여성. 1920년대. 연출된 사진이어서 입성과 외모가 모두 깔끔하지만 재봉틀 뒤에 있는 사람이 주부, 그 옆에서 거들고 있는 사람은 침모인 듯하다. 처음에는 살림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침모가 됐지만, 농촌 생활이 갈수록 피폐해짐에 따라 10살 안팎에 남의 집 식모로 가는 일이 흔해졌다. [사진=『사진으로 본 서울의 어제와 오늘』]
 
1933년 초여름의 어느 날 밤, 경성 남산 기슭에서 진한 밀회를 즐기던 조선인 남녀가 일본 경찰에 발각돼 혼마치 경찰서에 끌려 왔다. 조사 결과 이들은 부부로 판명되었다. 이 계절이면 흔한 일이라 경찰은 한바탕 훈계한 뒤 돌려보냈다. 북촌에 집을 두고 일본인 집에서 ‘요보’로 생활하던 조선인 여성이 잠시 남편을 만나러 나왔다가 당한 봉변이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됐지만 가내 노비가 실제로 소멸한 것은 1910년대 중반 이후였다. 나라가 망하자 일부 친일 귀족을 제외하고는 대대손손 고관을 배출하던 대가(大家)들도 몰락했다. 노비를 계속 부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된 집이 많아졌다. 노비를 부리느니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사람을 사 쓰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라는 논리도 확산됐다. 말단 관리나 군병으로 있다가 실직한 사람들, 맨몸으로 쫓겨난 노비들이 넘쳐났으니 푼돈으로 잠시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남자 일꾼을 붙박이로 두는 큰 부잣집도 있었으나, 어지간한 부잣집은 대개 한두 명의 여자 일꾼만 두었다. 집에서 돈을 주고 부리는 여자 일꾼을 한국인들은 ‘침모(針母)’라 했고, 일본인들은 ‘요보’ 또는 ‘오모니’라 불렀다. 의도적으로 부인이나 어머니를 뜻하는 한국어를 사용함으로써 한민족을 멸시하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침모도 엄연한 직업인이었지만, 생활조건은 옛날의 비(婢)만도 못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밤이나 새벽이나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주인집 아이 거두기, 주인집 정리해 주기, 주인집 지켜주기, 바느질하기, 갖은 살림을 다 맡아 보아 주고 한 달에 겨우 5원이 보통”이었다. 당시 남자 일꾼의 일당은 1원 정도였다. 주인집에서 먹고 자는 침모들은 아예 봉급이 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들은 남편과 자식을 만나기도 어려웠다. 식모(食母)는 학교 기숙사 등의 요리사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1920년대 후반부터 침모 대신 사용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 5공 정부가 ‘귀천(貴賤)의식’을 지운다는 취지로 직업 이름을 개조할 때, 식모는 ‘가사보조원’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86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도우미’라는 이름이 생긴 뒤에는 다시 ‘가사도우미’가 됐다.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붙박이 가사도우미를 두는 집도 급감했고, 자녀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가사도우미로 나서는 중산층 여성도 생겨났다. 이래저래 남의 집 일을 하는 여성들에게 드리워진 신분제의 그림자는 지워진 듯했는데, 부하직원을 가사 도우미로 부린 고위 공무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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