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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장제스와 틀어진 장징궈 “그는 나의 적이다”

조모 왕차이위(王采玉)의 품에 안겨있는 유아시절의 장징궈. 1911년 저장(浙江)성 펑화(奉化)현 시커우(溪口). 김명호 제공
신해혁명 성공 후 중국은 남북으로 분열됐다. 쑨원(孫文)은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군대가 없이는 통일과 민주공화제의 실현이 불가능했다. 독일·일본·미국과 접촉했지만 다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소련 쪽으로 눈을 돌렸다. 10월 혁명에 성공한 소련도 동방의 협력자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쑨원은 국민당을 레닌식 정당으로 개조했다. 중공당원들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소련은 북벌(北伐) 성사를 위해 광저우(廣州)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군사고문단과 현대식 무기를 지원했다.

쑨원이 죽자 베이징과 모스크바에서 연일 대규모 추모행사가 열렸다. 소련은 중국혁명을 수행할 “정치간부”를 양성해 주겠다며 모스크바에 중산(中山)대학을 설립해 쑨원을 기념하고 양국의 우호를 세계에 과시했다.

노동자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상하이 푸둥(浦東)중학에서 퇴학당한 장징궈(蔣經國)는 베이징에서 프랑스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쑨원 추모행사를 참관하며 감동을 받았다. 1년 전 아버지 장제스(蔣介石)를 만나러 황포군관학교에 갔을 때 봤던 국·공 합작과 군벌타도에 관한 온갖 벽보들이 생각났다.

1937년 3월 귀국 도중 하바롭스크 중국영사관 문전의 장징궈. 앞줄 왼쪽에서 넷째가 2년 전 결혼한 부인. 부인 오른쪽이 장징궈. 처음 모스크바의 중국대사관에 나타났을 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장징궈는 중공 설립자이며 쑨원과 함께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리다자오(李大釗)를 알게 됐다. 리는 소련대사관에 살고 있었다. 덕분에 장도 소련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들은 자주 놀러 오는 15세 소년에게 소련 유학을 권했다. 장제스도 반대하지 않았다.
1925년 10월 19일 장징궈는 “혁명인지 뭔지 하는 괴물이 남편을 물어 가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잡으려 한다”는 모친의 한숨을 뒤로했다.

국·공 양당에서 선발한 유학생 90명은 블라디보스토크행 화물선에 오르자마자 국제가(國際歌)를 불러댔다. 장징궈는 배 안에서 부하린의 “공산주의 ABC”를 탐독했다.
장제스는 완전히 좌경화된 사람다운 편지를 아들에게 자주 보냈다. “중국어와 영어
는 잠시 잊어라. 러시아어에 정통해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물상자를 열 수 있다. 정당 가입은 내가 간여할 문제가 아니지만 이왕 그곳에 갔으니 시세와 조류에 따르도록 해라. 우리의 가장 큰 임무는 국제 무산계급의 해방이다. 민중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행복을 희생해야 한다. 중국혁명은 세계혁명의 일부분이다. 절대로 낭만주의에 빠지지 마라.”

중산대학에 유학온 중국인 학생들의 관계는 국·공 양당처럼 복잡했다. 서로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충돌과 마찰이 그치지 않았다. 특히 덩시셴(鄧希賢, 후일의 덩샤오핑)의 활동은 눈에 띌 정도였다.

장징궈는 항상 공산당 편에 섰다. 국민당 쪽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장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의 아들이어서가 아니었다. 장은 대연설가였고 청년단원이었다. 그의 연설이 있는 날이면 학생들은 참고서를 뒤져가며 경청했다. 학교 측에서 발언을 저지하면 항의했다.

1927년 3월, 중공은 상하이 총공회에 파업을 발동하고 무장폭동을 일으켜 장제스의 북벌군을 지원했다. 소식을 들은 중산대학 학생들은 “홍색장군 장제스 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강당에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과 함께 장제스의 사진을 걸었다. 5월 1일 붉은광장에서 거행될 노동절 기념행진에 쓸 대형 초상화까지 준비했다.

장제스는 낮에 생각하고 밤에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국·공 합작 이후 점점 세력이 확대되는 공산당을 좌시하지 않았다. 4월 12일 새벽 4시를 기해 청당(淸黨)을 발동하고 상하이총공회를 공격했다. 다음 날 중공이 시위를 벌이자 국민당 부대에 발포령을 내렸다. 공산당원의 씨를 말리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공개적으로 반공(反共), 반소(反蘇)를 선언했다.

프라우다 기자가 장징궈를 찾아왔다. 16세를 갓 넘은 소년은 몸을 어디다 둬야 좋을지 몰랐다. “그는 노동자들을 죽였다.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다. 부자지간이며 혁명의 동지였지만 지금은 나의 적이다.”

장징궈는 소련에 눌러앉았다. 같은 해 8월 쑨원의 부인 쑹칭링(宋慶齡)도 장제스와 결별하고 모스크바로 왔다. 4개월 후 부친이 쑹칭링의 동생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모친과 함께 조모의 무덤을 찾아가는 꿈을 꿨다고 한다.

1936년 2차 국·공 합작을 성사시킨 장쉐량의 요구로 12년 만에 귀국했다. 그동안 인질 비슷하게 억류당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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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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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