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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신뢰 사회

한번 아니면 누가 뭐래도 아니라는 사람, 의외로 많다. 내 짐작과 추측은 맞고, 남의 증거와 근거는 믿지 못한다. 이들이 무리를 이뤄 운동성을 띠면 말리기 어렵다.

이들의 집단적 불신은 근거 없는 괴담을 낳는다. 이게 신봉자들을 끌어 모은다. 시간이 지나면 사그라지지만, 그러기까지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이 만만찮다. 광우병 사태, 천안함 사건 때가 그랬다. 배추값이 다락같이 오르자 배추 괴담도 흉흉하다. 그뿐인가. 이젠 한 가수의 학력에 시비가 붙었다. 그가 무슨 대학 나온 게 맞다고 경찰이 확인했는데도 그게 아니란다. 경찰을 어찌 믿느냐는 투다.

지독한 불신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현실인데. 사회공동체적 신뢰 수준이 별로 높질 않다. 물론 혈연·지연·학연이라는 사적인 틀 속에선 강한 결속과 신뢰를 보인다. 초면인데도 같은 지역, 같은 학교 출신이면 쉽게 터놓고 지낸다. 술 한잔 같이 하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그 선을 넘으면 남남이다. 남남끼린 여간해서 잘 믿질 않는다.

이런 특성을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프랜스시 후쿠야마는 ‘저신뢰 사회’로 표현했다. 1995년 그의 저서 『트러스트』는 저신뢰 사회로 한국·중국·인도를 지목했다.

그는 신뢰를 ‘사회적 자본’으로 봤다. 그리고 국가의 번영과 경쟁력은 신뢰의 수준에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일본은 신뢰의 수준이 높아 번영을 구가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저신뢰 사회의 경우 성장과 번영에 한계가 있을 거라고 했다.

당시엔 상당히 울림이 있는 논리였다. 이게 우리의 한계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제도가 문제라면 뚝딱 손보면 되지만, 인식과 문화는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후쿠야마의 신뢰도 흔들리고 있다. 고신뢰 사회라던 미국이 위기의 진원지가 됐다. 월가의 탐욕이 주범이다. 사회적 신뢰가 돈독하다던 일본은 어떤가. 총리가 1년을 못 버티고 줄줄이 바뀌는가 하면, 경제는 좀처럼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한국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의장국이 됐다. 금융위기 이후의 경기회복도 가장 빠르다. 선진국들이 진흙탕에서 헤매고 있는 동안에 말이다.

또 중국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 미국과 유럽이 환율로 압박을 가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중국의 신용등급 상향을 검토 중이라고 지난 8일 발표했다. 후쿠야마에겐 신뢰를 받지 못했던 중국이 무디스엔 좋은 신용을 쌓은 것이다.

저신뢰 사회의 약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후쿠야마의 이론은 빛이 바랜 걸까. 아니면 신뢰 수준이 높았다면 번영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고 봐야 할까.

뭐가 맞는지 단정할 순 없다. 다만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선진국도 잘살게 된 다음에야 결과적으로 신뢰가 높아진 건 아닐까. 즉 신뢰가 번영을 이끈 게 아니라, 번영이 신뢰를 낳은 건 아닌가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역시 잘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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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