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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Focus] 남과 북의 마음, 그림으로 잇는 화상(畵商) 신동훈

신동훈씨가 효원 정창모 화백의 그림과 함께 섰다. 뒤 오른쪽 그림이 지난 4월 평양을 찾은 신씨에게 정 화백이 유언처럼 건네준 ‘보금자리를 찾아서’다. 신씨는 전북 전주가 고향인 정 화백이 전주 남강 언저리의 기억을 더듬어 그린 그림으로 추정했다.
그는 별명이 ‘평양을 맘대로 드나드는 사나이’다. 북쪽에 ‘형님, 아우’ 하는 인사들도 많다. 아침에 한강을 산책하다가 저녁에는 대동강을 주유한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이 묻는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그의 명함엔 ‘조선미술협회 회장’이라 박혀 있다. 1988년부터 북을 드나들기 70여 회. 신동훈(62)씨 머리엔 남과 북을 미술로 잇기 위한 자료가 한라산과 백두산만큼 쌓였다. 그는 누구일까.

글=정재숙 선임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 조선미술협회 제공

몸피가 듬직한 신동훈씨는 만나자마자 덩치 값도 못하는 이마냥 눈자위가 붉어졌다. “정창모 화백이 지난 7월 12일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었어요. 4월 중순, 제가 평양에서 뵀을 때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20여 년 아버지처럼 모시던 효원 정창모(1931~2010) 선생의 타계는 그에게 충격이었다. 지난해 8월 7일 선우영(1946~2009) 화백의 죽음에 이은 비보였다. 평양 만수대창작사에 있는 그들의 작업실을 찾아 안내원 눈길을 피해가며 나누던 은밀한 대화만이 신씨 가슴에 남았다.

“4월에 만났을 때 정창모 화백이 제 손을 꼭 잡으시며 그림 한 점을 넘겨주시더라고요. 1999년에 그리신 ‘보금자리를 찾아서’예요. 전북 전주가 고향인 정 화백은 저를 보면 옛날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그날은 유난하셨죠. 제 짐작이지만 전주 남강을 그리신 게 아닌가 싶어요. 늘 고향을 그리워하시기에 제가 남쪽의 옛 친구, 가족들 만난 현장을 중계방송하듯 해드리곤 했는데…. 하루라도 이르게 서울 내려와 전시회 한 번 여시도록 하겠다는 약속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 그림이 유언이 아니었는지….” 그는 목이 메었다. 북에서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으며 첫째, 둘째로 꼽히던 두 사람의 잇따른 죽음은 그에겐 지난 20여 년 북한미술 전문가로 뛰어온 세월의 한 매듭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미국 여권이 나의 힘

신동훈씨가 미술과 연을 맺게 된 건 우연이었다. 19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 가 자동차 수리점, 샌드위치 가게 등 이런저런 사업을 하던 중 북한미술 전문 화랑 ‘새스코 갤러리’를 내게 됐다. 미국인이 잘 모르는 북한 작가를 취급하면 장사가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북에 갈 수 있는 미국 여권이 그의 힘이 됐다. 중국에 흘러나온 북한 미술품을 뒤지며 안목을 키우는 한편 평양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사람들과 사귀며 인맥을 쌓았다. 북한 미술인들의 총본산이라 할 ‘만수대창작사’를 제 집 드나들 듯하며 보고 또 봤다. 초짜 화상인 그에게 접근해 돈만 챙기려는 사기꾼들에게 가짜 그림도 숱하게 샀다. ‘그때 200만 달러짜리 공부를 했다’고 회고할 만큼 그는 뭔가에 홀린 듯 북한 그림에 삶 전부를 걸었다.

“서너 살 때 한국전쟁을 겪었고, 대한민국 육군 사병으로 36개월간 복무한 뒤 월남전도 참전했어요. 나는 비록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늘 절감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쟁을 막을 수 있을까. 제가 할 수 있는 건 우리 그림으로 남과 북의 사람들 마음을 잇는 겁니다. 정창모, 선우영 두 분 선생님은 그런 제 마음을 이해해 주셨어요. ‘신 선생이 우리 민족 그림을 세계에 알려 한반도 화합에 도움이 되겠다는 데 우리가 보태야지’ 하시던 선우영 화백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해요.”

정창모 작품은 북한에선 국보급

2003년 평양 만수대창작사 선우영씨 작업실에서 함께한 선우영, 정창모, 신동훈씨(왼쪽부터).
신씨가 기억하는 북한 만수대창작사는 국가가 운영하는 일종의 창작 기지다. 전국에서 뽑혀온 미술인이 나라에서 제공하는 화실에서 출퇴근하며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빚는다. 정창모 화백은 1970년대 초부터 이 만수대창작사 조선화 창작단에서 풍경화 실장으로 활약하며 수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77년 공훈예술가, 89년에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아 작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다.

“정창모 선생의 작업실은 만수대창작사 안에서도 가장 크고 천장이 높은 독실이었어요. 그만큼 대접 받으셨다는 얘기지요. 실력이 떨어지는 작가들은 집단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거든요. 지금도 햇빛이 따뜻하게 비치는 창가에 앉아 두런두런 말씀하시던 선생님 모습이 떠올라요. 말년에 기력이 떨어지신 선생님이 아침 느지막이 나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명상에 잠겨 계시던 게 기억납니다. 저에게 작품을 맡기고 싶어 하셨죠. 평양 중심가에 있던 널찍한 아파트도 두어 번 가봤어요.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에 이르는 15년 동안 어림잡아 2000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대부분 풍경화와 화조화였죠. 전부 국가에서 가져가버리니 사실 섭섭하시기도 했겠죠. 제게 주신 그림들은 굳이 말하자면 불법 증여였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남쪽에, 나아가 세계에 작품을 내보내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정창모 선생의 유작은 현재 국보급 작품으로 인정받아 조선미술박물관에 100여 점 소장되고 있다. 신씨는 선생님의 별세 뒤 아파트에 남아 있던 나머지 그림이 어떻게 됐는지 몹시 궁금하다고 했다. “최근 남북 관계가 안 좋아 북으로 달려가고 싶은 발길을 붙잡고 있어 더 안타깝다”고 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남과 북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까닭이다.

“정 선생님은 분명히 ‘남에서 신 선생이 오면 전해주라’고 유가족에게 그림을 맡기셨을 것으로 저는 믿습니다. 저를 ‘남북 통일의 한 자락을 맞든 통일 일꾼, 나라도 못하는 일을 하는 미술 일꾼’이라 부르신 분이었는데.”

세계 유례없는 선전화의 천국, 북한

신씨는 북한 그림 ‘북화(北畵)’에 대해 “전통에 독창적인 색깔을 입힌 또 하나의 우리 그림”이라고 주장한다. 남화에 비해 발색(發色)이 강하고 붓의 기운이 거칠며 힘이 있다고 설명한다. 험난한 세월을 겪어 온 북의 역사가 저절로 그림에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또 체제 특성상 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이 발달한 정치화(주제화)와 선전화는 다른 나라나 지역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그림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요즘 세계 미술시장에서 북한의 정치화와 선전화는 이른바 인기 품목입니다. 그런 작품을 생산하는 곳이 이젠 없기 때문이죠. 사회주의 국가들이 하나 둘 사라지면서 선전화의 천국은 북한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유럽과 중국 사람들이 이 분야의 컬렉션을 소리 없이 무섭게 하고 있어요. 북화만이 지닌 국제적인 경쟁력이죠.”

그는 “북화가 돈이 좀 된다 싶으니까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장난을 하는 일부 거간꾼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한 그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몹시 저렴한 작품 값을 빙자해 손쉽게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들이 북화를 제대로 감상하고 평가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걱정이었다.

“두 분 화백의 죽음이 제게는 오히려 용기를 내라는 메시지처럼 다가옵니다. 당신들의 땀과 눈물로 그린 그 작품으로 북한의 미술을 알리고 싶어 했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제게 목숨 같은 작품을 넘기셨던 건데…. 이제 그 소명에 남은 생을 바치렵니다.” 그의 눈자위가 다시 젖어들었다.

● 신동훈

1948년 경기도 고양 출생

1975년 미국 이민 후 워싱턴에서 사업

1988년 워싱턴에 북한미술 전문화랑 ‘새스코갤러리’

개관 뒤 북한 왕래 시작

1989년 중국 베이징에 ‘사시고(思是高) 화랑’ 개관

2006년 서울 순화동에 ‘갤러리 北’ 설립

2006년 뉴욕에서 한국 문봉주 뉴욕총영사와 북한

    박길연 유엔 대사가 만나는 남북미술대전 개최


j 칵테일 >> 38선이 가르지 못하는 동족의 그림들

신동훈씨는 남과 북의 화가들이 전시로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왔다. 2007년 6월 7일부터 9월 7일까지 서울 순화동 갤러리 北에서 열렸던 ‘남북 대표작가 2인전-선우영·이숙자’전이 그 한 예다. 세밀하면서도 농익은 보리밭을 그리는 남쪽 여성화가 이숙자(68)씨와 세세한 붓질로 장엄한 사실화의 세계를 펼쳐내는 북쪽 화가 선우영의 만남은 그림에서 분단도 갈라놓지 못하는 민족성을 확인하는 아름다운 자리였다.

이 전시회 도록에 ‘섬세함, 공필(工筆)의 바탕에서 만나다’를 쓴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역사와 전통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할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썼다. 안타깝게 불발된 경우도 있다. 독도 사랑에 빠진 한국 화단의 원로 화가 일랑 이종상(72·서울대 명예교수)씨와 선우영 화백의 독도를 주제로 한 2인전은 결국 선우 화백의 때이른 죽음으로 미완에 그치고 말았다. 전시를 먼저 제안한 일랑이 신동훈씨의 일산 집을 세 번이나 찾아올 만큼 공을 들였지만 운명은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현재 신씨는 선우영 화백의 유작 중 독도 주제 그림을 6점 확보하고 2인전을 추진 중이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올해야말로 이 전시에 맞춤한 해라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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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